출판사 리뷰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 젊은 남성들의 분노
그 근본 원인을 해부하다
전 세계를 위협과 공포로 몰아넣다!
남성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우리 시대의 조커들극심한 빈곤, 복지의 부재, 부모에게서 버려짐, 직장에서의 홀대, 사랑하는 이의 부재 등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불행을 다 가진 남성, 아서 플렉이 코믹스 희대의 빌런인 조커로 변해가는 영화 《조커》는 개봉 당시 남성의 폭력을 미화한다며 엄청난 논란을 불렀다. 그 덕에 영화 속 아서 플렉은 그저 캐릭터를 넘어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바로 인셀(비자발적 독신주의자)의 수호신이. 인셀은 자신들이 유전적으로 좋은 외모를 타고 나지 못해 여성들과 연애와 결혼에 실패하는 것이라 믿는 특정 집단을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자신과 같은 고충을 토로하는 부류와 온라인에서 교류하는 것을 넘어 그들끼리 강화한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이 사회와 여성을 향해 터뜨리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미 인셀이 저지른 총기 난사, 여성혐오 살인이 사회 문제로 부상하자 인셀 남성을 진지하게 다루기 위한 학술 논문과 보고서가 출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셀들은 영화 《조커》가 자신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보낸다고 생각했다. 조커가 된 아서 플렉은 소외된 남성의 대변자다. 그는 폭력과 사회 혼란, 소요를 이용하여 우리 사회가 남성성을 부정하고 무너뜨리고 있다는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그렇기에 영화를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는 극렬하게 대립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조커의 탄생을 불러온 복잡한 원인을 외면하고 문제를 오로지 아서 개인의 악한 성향으로 규정했다. 보수 진영에서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긴 했으나 그들 역시 아서 플렉을 타고나기를 나쁜 인간으로 보아 개인의 노력을 강조했다.
저자 사이먼 제임스 코플랜드는 ‘젊은 남성의 분노’,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을 연구하기로 하면서 이런 단순한 선악 구도에서 벗어난다. 이들은 왜 분노하는가? 왜 그 분노의 화살을 여성에게 돌리는가? 왜 젊은 남성은 극우 사상에 이끌려 남성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위해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사상을 갖게 되는가? 저자는 이런 핵심 질문을 탐구하면 그 원인을 남성성에는 ‘본래’ 건강한 것과 유해한 것이 나뉘어 있고 오늘날의 문제는 폭력과 여성혐오, 지배, 권력 추구 같은 나쁜 남성성이 발현된 탓에 있다는 ‘유해한 남성성 이론’을 반박한다. 일부 사람이 주장하듯 사회에서 낙오한 패배자나 타고난 여성혐오자가 아니라 평범한 남성들조차 자신들이 역차별당했다고 억울해하며 마음속에서 극우적 사상에 동조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평범하고 지루하기도 한 바로 옆집 남자와 다를 바 없는 개인이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그저 일상에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한 길을 모색하려 애쓸 뿐이다. 아이히만이 그러했든 남성 역시 (비록 끔찍한 방식으로기는 하지만) 점점 더 버거워지는 세상 속에서 생존을 추구하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이다.”(31쪽) 그렇다면 이들의 분노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남자의 상황이 정말 그렇게 나쁜 걸까?
자본주의와 남성성의 위기남자의 상황이 정말 그렇게 나쁜 걸까? 이렇게 물으면 남성들은 오늘날 여성과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자신들이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실제로 뒤처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럼 반대 진영의 사람들은 또 항변한다. 남자만 정수기 물통을 교체하는 것 말고 여성이 남성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저자는 서구 사회의 여러 통계를 분석해 보면 ‘남성성의 위기’가 온 것은 맞다고 진단한다. 많은 남성이 학업 성적에서 여성보다 낮은 점수를 받고, 대학 진학률도 더 낮으며, 학습 장애를 가지는 빈도도 높다. 또한 남성이 더 자살을 많이 시도하며, 일터에서 더 많이 사망하고, 압도적으로 더 많이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남성이 이런 불평등으로 불만을 느끼고 분노하는 것은 일부 타당하고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통계 역시도 현재 남성이 겪는 문제와 분노의 원천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본다. 다른 통계는 대학 졸업 후 사회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는 것은 남성이며 남녀 간 임금 격차도 엄연히 상존하기 때문이다. ‘억압 받고 상처 입은 남성’이라는 신화에는 좀 더 깊이 있는 탐구가 필요하다.
저자는 젊은 남성이 분노하는 이유에 관한 구조적 원인을 다각도로 탐사한다. 먼저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경제적 구조와 문화는 남성성과 남자다움에 대한 전통적 이상을 해체해 버렸다. 20세기에 우리 사회에는 이상화된 남성성에 대한 서사가 있었다. 남성은 개척자이며, 적을 무찌르는 보호자이고, 가족을 부양하며 형제애로 뭉친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는 일에 대한 전통적 개념과 경제적 안정성을 해체했으며 자유라는 이름 아래 노동을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체제의 변화는 남성이 그동안 갖고 있던 삶의 목표와 방향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삶의 목적은 이제 돈이다. 저자는 이런 토대 변화가 ‘장식적 문화’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장식적 문화는 사람들이 공적 영역에서 어떤 기능적 역할도 하지 않고 오직 장식적인 존재로서, 소비자로서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것을 말한다. 남성성은 이제 국가와 가족을 책임지는 기둥이 아니라 젊음과 외모, 매력, 돈, 과시적 상품 등 남과 구별되는 인플루언서로서의 개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기준에 잠식되었다. “장식적 문화는 한때 남성성의 사명이 남성에게 부여한 사회적 목적과 소속감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수많은 남성이 (…) 이제는 오직 혼자의 힘으로 가능한 많이 소비함으로써만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하라고 요구받는다.”(59쪽)
노력으로 성취할 수 없는 이러한 버거운 요구는 수많은 남성에게 좌절과 환멸을 불러왔다. 왜냐하면 남성은 이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이 소비자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마주함과 동시에 구체적 현실에서는 여전히 국가에 이바지하고 여성을 보호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성의 사명을 이행하라는 기대를 받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많은 남성이 남자다움이란 무엇인지 혼란을 느끼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성 전쟁, 특히 일상에서 남성이 받는 차별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남성과 고작 그런 걸로 화를 내냐고 주장하는 여성의 싸움은 이런 혼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불안한 남성들은 이제 자신들이 남성다움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믿으며 그 사실에 대해 극도의 분노와 니체의 말을 빌려 모든 것에 대한 원한, 즉 ‘르상티망’을 품고 있다. 그 화살이 향한 곳이 바로 페미니즘과 여성이다. 누구보다도 연애와 섹스에 강한 욕망을 품고 여성이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갈망하지만 그럴 능력도 소질도 없다고 느끼는 남성들은 인셀이 되어 남성과 여성은 선천적으로 다르다고 믿는다. 여성은 오로지 모든 것을 다 가진 최상의 남자만 욕망하는 족속이며 그것을 깨달은 자신은 아예 사랑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분노하는 남성들은 그들만의 공동체, 소위 ‘남초’ 커뮤니티에 모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여성과 사회에 대한 원한을 키우고 있다. 남초 커뮤니티는 분노하는 남성들에게 삶의 목적과 위안을 주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값싼 위안을 뿐이다. 남초 커뮤니티의 메시지는 자신들이 역차별받고 있다는 확증편향을 강화하며 모든 문제는 너의 탓이라는 자기 계발과 노력이라는 환상을 주입하는데 그친다. 여전히 삶의 목적을 회복하지 못한 남성들은 극단적인 허무주의로 스스로 삶을 포기하거나 테러를 통해 우리 사회에 크나큰 고통을 안기고 있다.
노력과 자기 계발이라는 신화
거짓 위안을 주는 가짜 공동체남성은 외롭다.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의 세상에서 대면 우정의 비율은 점점 감소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남성에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념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우정과 공동체를 향한 욕구가 많은 남성이 남초 커뮤니티와 극우 조직에 가입하는 이유다. 그런 공동체에서 남성은 사회와 여성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받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공동체에서 남성은 남보다 앞서 나가고 규율 있는 존재가 되라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주입받으며 자기 계발은 이를 위한 도구가 된다. 자기 계발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남자가 되어라! 조던 피터슨의《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이라는 책의 유행과 그에게 보내는 젊은 남성의 존경, 남성이 여성을 유혹할 수 있도록 돕는 일련의 기술을 가르치는 픽업 아티스트의 흥행과 난립 등이 그 예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잔인한 낙관주의’ 부른다. 왜냐하면 자기 계발에 몰두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고립이 되지만 오히려 자신의 상황을 악화하는 그 행위에 시간, 에너지, 희망을 계속 투자하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 담론은 대부분의 남성이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한 남성상을 만들어 내고 따라서 거의 언제나 실패로 귀결된다. “자기 계발은 거의 언제나 실패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자원의 제약뿐 아니라 자기 계발이 만드는 비현실적이고 달성 불가능한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는 매노스피어 내부에서 좀처럼 논의되지 않는다. 실패 자체가 남성적이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작동한다. 결국 실패는 말해지지 못한 채 감춰지고 표현되지 못한 채 남는다.”(205쪽)
게다가 소셜 미디어에서 형성된 젊은 남성의 공동체는 쉽게 사라지는 허상이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올라오는 모든 콘텐츠는 기업의 수익성과 플랫폼 유지에 활용될 뿐이다. 저자가 남초 커뮤니티의 게시글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커뮤니티 안에서 깊은 관계는 생기지 않는다. 웃긴 밈이 진지한 글을 밀어 버리며 대화는 짧은 댓글로 끝난다. 소셜 미디어의 한 공간에서 젊은 남성에게 규칙을 지키고, 자기 계발에 매진하면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게시글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젊은 남성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 기대하지만 그런 희망은 끝내 실현되지 않는다. 남은 것은 분노의 폭발이다.
거대한 분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금지와 배제가 아니라 대안 서사를 만들기젊은 남성의 분노는 외부인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폭력으로 무장한 극우 사상의 먹잇감이 된다. 우리 사회는 그것을 직접 경험했다. 2025년 1월 19일 법원에 불만을 품은 남성들은 서부지법으로 몰려가 법원의 기물을 파손하고 사람들을 위협했다. 이 거대한 분노 앞에 우리는 무력했다.
여성혐오 살인도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저자의 모국인 호주에서는 2024년 4월, 조엘 카우치라는 이름의 남성이 시드니 본다이의 한 번화한 쇼핑센터에 들어가 흉기를 휘둘러 6명을 살해하고 어린 소녀를 포함한 여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사망자 6명 중 5명은 여성이고 유일한 남성 피해자는 이를 막으려 했던 보안 요원이었다. 호주는 연방 정부와 주 정부가 긴급 회의를 열고 젊은 남성의 극우화와 남성들의 폭력을 막기 위한 법안을 제정하겠다고 했지만 현실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위험한 남성들을 서둘러 격리하려는 임시적 조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성들을 격리하고 남초 커뮤니티를 금지하는 조치는 시민에 대한 과도한 감시, 권리 침해, 소수자에 대한 억압, 극단주의 집단의 풍선 효과를 불러왔다. 차단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다른 곳으로 옮길 뿐이다.
그동안 나쁜 남성에 대한 방어 전략은 ‘대응 서사’였다. 대응 서사는 남성의 잘못된 말과 행동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미러링’, 그리고 즉각적 반박이다. 성별 임금 격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그 격차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하거나 남성이 사회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주장에 대해 남성이 여전히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방식이다. 이런 대응 서사는 안타깝지만 효과가 없다. 남성들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적대감만 강화된다. 저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대안 서사’라고 말한다. 반박 대신에 남성에게 그들의 문제가 발생한 실제 원인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하고 함께 해결하자고 이끄는 것이다. 대안 서사는 아주 어렵지만 남성의 분노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일단 그들이 그렇게 느꼈음을 인정하고 출발한다. 실제로 연구 결과는 극우 사상에 빠진 소년을 구출하기 위한 ‘엑시트 프로그램’의 운영에서 소년과 함께 비밀을 보장한 채 비난 없는 태도로 문제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했을 때 소년 스스로 극우 집단에서 빠져 나올 가능성이 높음을 입증했다.
저자는 남성의 분노와 불만은 단지 젠더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우리 사회는 그들의 삶 전반을 개선해야 한다. 먼저 남성이 남성성을 인식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젠더 전문가가 어린 남학생과 대화하며 긍정적인 롤모델을 형성하도록 이끌고 건강한 관계를 맺을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남성들을 남초 커뮤니티로 내몰지 않도록 새로운 형태의 소속감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에서 많은 사람과 대면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야 한다. 국가에게는 더 어려운 의무가 있다 바로 안정적인 고용을 창출하고 경제적 불확실성을 줄이는 제도적, 정책적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장식적 문화를 약화하고 협력과 공동체, 삶의 기쁨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남성성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유해한 남성성 하나로 환원하는 것은 복잡하고 광범위한 사회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한 해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이는 남성이 자신의 남성성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시대, 공간, 역사적 맥락, 지역적 특수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결과이다(Waling, 2019a). 남성성 자체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것이 아닌 만큼 남성과 관련된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남성성 하나에 돌리는 것은 명백히 무리이다.
- 1장 젊은 남성, 사회의 폭탄이 되다진짜 문제는 남성성의 사명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그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게 되었느냐에 있다. 오늘날에는 남성뿐 아니라 사실상 우리 모두가 ‘장식적 문화ornamental culture’를 받아들인다. 이 문화는 우리가 인생과 사회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Faludi, 1999). 장식적 문화란 사람들이 공적 영역에서 어떤 기능적 역할도 수행하지 않고 오직 장식적인 존재나 소비자로만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문화를 의미한다(Faludi, 1999: 35). 이런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정치, 교회, 노동조합, 사회단체 등 다양한 공동체 활동에서 점점 멀어진다. 이런 영역들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유용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 2장 소외된 젊은 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