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잃어버린 고조선과 부여의 역사를 찾는다!현재 중국과 일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긍지를 살리려고 과장된 역사를 가르치지만, 우리는 대륙으로 한 번도 진출해 보지 못하고 한반도 안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민족으로, 도저히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왜곡되고 축소된 역사를 가르친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조선시대까지 한민족의 고대 사료는 『단군고기』와 『신지비사』, 『배달유기』,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 표훈(表訓)의 『삼성밀기』, 『조대기』 등이 있었다. 특히 『신지비사』와 『배달유기』는 고조선 건국에 관련이 깊은 내용이 담겨 있던 책으로 조선 초까지 전승되어 서운관(書雲觀)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개국 직후 편찬했던 『고려사』를 다시 고쳐 종래의 자주적인 내용을 제후국에 맞도록 편찬하였고, 특히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고서를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내리고 고기류(古記類)를 수거하고 불태우는 등 조선판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질렀으며, 그나마 민간에 숨겨둔 것마저 일제는 1910년 수거령을 내려 이 땅 곳곳에서 51종 20만 권 정도의 서적을 수거해 불태우거나 본국으로 가져가 버렸다.(조선총독부 관보)
때문에 한국 고대사 사료는 매우 부족하다. 하지만 중국 25사 및 관련된 사료를 연구하는 사학자들 덕분에 고조선과 부여가 실존의 역사임이 밝혀지고 있다. 중국 손작운(孫作雲)은 『산해경』을 동이 고서(古書)로 규정하고, 해내경을 아예 조선기(朝鮮記)라고 불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열전에도 만이(蠻夷) 세력이 옛 연(燕)과 제(濟)까지 미쳤다는 기록, 『설문해자』에서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고, 동시에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 BC403∼BC221 기록)에서 연(燕)나라가 북쪽으로 오환(烏桓), 부여(夫餘)와 이웃하고 있고, 동쪽으로 예맥(穢貊), 조선(朝鮮), 진번(眞番)과 교역이 있다고 하였다. 강단사학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고조선과 부여의 역사는 역사적 사실임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일제식민지 사관과 동북공정 문제우리 민족의 역사는 그동안 심하게 왜곡되고 부정되어 전해왔다. 1945년 광복이 되어 80년이 지났지만, 사학계는 여전히 식민사관의 잔재를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이 있는데, 하나는 사대주의 노론 사관이고, 또 하나는 식민 사관이다.
노론 사관은 1623년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들의 인조반정에서 시작됐다. 성리학을 받든 존명반청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이후 노론과 노론 벽파로 이어지면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300년간 나라를 말아먹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팔고 관작을 받아먹은 양반들 대다수는 노론이었고, 그 후예들이 일제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했으며 광복 뒤에도 사학계 주류가 되었다. 식민사관(植民史觀) 역시 노론 사관과 다를 바 없는데, 영토(領土)적 개념(槪念)이 한반도 내로 국한되어 비슷하기 때문이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이란 한반도 북부에서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해 400년간이나 식민지를 경영했고, 남부에서는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백제와 신라를 경영했다고 하는 역사 조작에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사관이다. 특히 청천강 패수설과 평양의 낙랑군설은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의 핵심 요소이다.
지금도 한국 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에 몸담고 식민사학의 주구 노릇을 하던 학자와 그 후예들에게 잠식되고 있다. 그들은 일제가 주장한 식민사관을 실증사학이라는 가면 아래 교묘히 숨겨 그대로 수용하였다. 실증주의 사학은 발굴한 유적과 유물을 과학적으로 검증함으로써 문헌에 기록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한다고 주장하면서 고증되지 않은 사료는 대부분 불신한다. 7~8천 년 이전의 고대 유적과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지만, 고조선과 단군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사가 아닌 신화로 치부되고 있다. 이러한 실증사학에 따라 우리 역사 대부분이 잘려나갔다.
이렇게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일제의 식민사관, 여기에 더해 실증사학에 의한 우리 역사 변질이 매우 심각하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의 결과로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한민족 역사의 활동무대가 한반도 내로 축소되었다.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에서 동북 지방은 지금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을 일컫는 말이다. 식민사관에 따른 억지 주장으로 이 지역의 역사가 공백으로 남았고, 그래서 이 지역을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그러나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역사만 바로 정립되면 동북공정의 논리는 저절로 무너진다. 확실한 사료와 유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부정할 수 없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역사 교육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보아야 할 때다.
고조선과 홍산(紅山) 및 하가점 하층(夏家店下層) 문화(文化)와 연관성기원전 4,500년경 홍산문화는 황하문명과 별개인 동이족의 선진 문명으로 ①여신을 모신 사당 ②원형 제단(祭壇) ③적석총(積石塚)이 특징이다. 요녕성 조양시 건평(建平)과 능원(凌源) 지역에서 발견된 우하량(牛河梁) 유적은 홍산문화 만기(晩期, 기원전 3,500∼3,000년)에 해당되는데, 거대한 제단, 여신묘(女神廟), 적석총(積石塚) 등이 출토되었다. .
또한 BC 2,200년~ BC 1,600년경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는 전기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는데, 조양(朝陽), 능원(陵源), 객좌(客左), 건평(建平) 등과 내몽고와 요녕성 접경지역인 적봉(赤峰) 삼좌점(三座店)과 성자산(城子山)에서 엄청난 규모의 석성과 돌무덤 떼, 제단, 주거지 등 출토되었다.
하가점 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 BC. 1,000년~ BC. 600년경)는 후기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며,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석관묘 안에서 출토되어 동이족의 대표적인 유물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들 홍산문화의 유물 중 특히 여신묘에서 곰의 턱뼈와 진흙으로 만든 곰의 발도 함께 출토되어, 홍산(紅山) 사람들이 여신과 함께 곰을 숭배하는 부족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단군 신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에 당황한 중국은 1980년대부터 통일적(統一的) 다민족국가론(多民族國家論)을 들고나와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소수 민족과 역사는 고대부터 중화민족의 일원이고 중국사라고 주장하면서, 고조선과 후예인 부여, 고구려, 발해 등 모든 우리 고대국가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고, 동북 지역의 모든 고대 민족인 숙신, 동호, 선비 등을 황제의 후예로 보고 중화민족의 일부로 만들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설명했듯 기원전 2천 년경 무렵부터 홍산(紅山)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이어지는데, 기원전 2천 년경 요하 유역에 존재할 수 있는 국가는 사서를 아무리 뒤져봐도 고조선 외에는 없다.
사서(史書)로 보는 고조선 사료1 『산해경』 해내경: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한다. 조선은 천독이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人愛之).
사료2 『산해경』 해내북경: 조선은 열양(列陽) 동쪽에 있다. 바다 북쪽, 산의 남쪽에 있으며,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사료3 『사기색은(史記索隱)』: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 세 강이 합해져 열수(列水)가 된다. 아마도 낙랑이니 조선이니 하는 것은 여기에서 이름을 취한 듯하다.
유적과 유물로 입증되는 고조선 건국은 청동기 출현 시기인 기원전 20세기, 늦게 보아도 지석묘 출현 시기인 기원전 18세기에는 건국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먼저 가장 오래된 선진시대 사료인 『산해경』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하북성에 있다고 하였다. 『산해경』을 주해한 곽박은 조선은 지금 낙랑군이며, 열양은 대방이고 연나라 땅이므로, 중국 동해 안쪽 (곧 현재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과 북해인 발해의 모퉁이인 하북성 곧 하북성 동북쪽에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평양에 조선을 건국하여 1,500년을 다스렸고, (아사달은 빛나는 아침의 땅이란 뜻) 평양,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臧唐京) 순으로 도읍지를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 허목의 『미수기언(眉記言)』에는 조선은 유주(幽州)에 있었다 하였는데, 유주는 중국 하북성 보정시와 북경시 지역을 말한다.
또 『시경(詩經)』 한혁편(韓奕篇)과 『제왕운기』에도 고조선은, 많은 부락 연맹체의 우두머리를 거수(渠帥)로 삼아 자기 봉지를 다스리도록 하는 거수국(渠帥國)을 거느린 고대국가라 하였다.
각종 문헌에 나오는 거수국들은 부여(夫餘), 고죽(孤 竹), 고구려(高句麗), 예(濊), 맥, 추(追), 진번(眞番), 낙랑(樂浪), 임둔(臨 屯), 현도(玄), 숙신(肅愼), 청구(靑丘), 양이(良夷), 발(發), 유(兪), 옥저 (沃沮), 진(辰), 비류(沸流), 행인(荇人), 개마(蓋馬), 구다(句茶), 조나(藻 那), 주나(侏那), 한(韓) 등이 있으며, 부여와 고구려도 단군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거수국으로 출발하여, 단군조선이 중앙통치력을 잃게 되자 독립한 나라였다.
고조선의 강역1) 도장으로 추정하는 고조선 영역
내몽골 나만기(柰曼旗) 유적에서 발견된 옥인장(玉印章) 등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옥인장(玉印章) 연대는 기원전 6,500년 전에서 5,000년 전으로 은나라에서 발견된 도장보다 적어도 2,000년 이상을 상회한다. 이는 황하문명으로 전파되었다.
2) 비파형 동검으로 추정하는 고조선 영역
『삼국유사』에서 환인(桓因)이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을 주듯, 천부인은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을 말한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은 내몽골과 만주지역 및 한반도까지 두루 발견되었으며 특히 하북성 승덕시 칠로도산과 내몽골 적봉시 노로아호산 부근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3) 탁자형 고인돌로 고조선 영역 추정
고인돌을 지석묘(支石墓)로 부르는데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 역할을 한다.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지석묘(支石墓)도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산동성, 절강성 및 한반도 전역에 분포되어 있지만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4) 명도전으로 추정하는 고조선 강역
북경과 하북성, 요동 지역, 한반도 서북부에서 출토되는 명도전은 고조선 강역과 대부분 일치한다. 이를 기존 사학계에서는 기원전 3세기 초에 연나라가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고조선과 교역했던 증거로 보지만, 당시는 연나라 말기로 국력이 쇠퇴했던 시기이고, 연나라가 화폐를 사용했다는 어떤 사서 기록도 없다. 또 고조선 팔조법금(八條法禁)을 보면, 고조선이 화폐를 사용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는데, 명도전은 비파형 동검, 세형동검, 고인돌 등 고조선의 대표적인 지표 유물과 출토 지역이 같다.
더 결정적인 것은 명도전이 연나라 실제 강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미미한 수준으로 출토된다는 점이다. 이로 보면, 명도전이 가장 많이 발견된 북경과 하북성 북부는 고조선 핵심 강역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조선 왕검성은 고구려(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 『삼국사기』는 “고조선의 왕검성은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平壤城)”이라 하였고, 왕부(王符, 85~162년)의 『잠부론』은 “한성 서쪽에 준왕이 다스리던 고조선 왕검성이 있다”고 하였으며, 후한 때 반고(班古, 32~92년)의 『전한서』 지리지는 “고조선의 왕험성에 훗날 한나라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된다”고 하였다.
현재 보정시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鎭)에 폐허가 된 고성(固城) 즉 범양고성(範陽古城)이 있는데, 이것이 왕검성이다. 이는 『전한서』 지리지에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 주석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 당태종 아들 이태(李泰)의 『괄지지(括地志)』는 “고구려 치소인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으로 곧 고조선 땅이다”고 하였고, 당나라 장수철 주석의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는 “고조선 왕검성과 같은 자리에 훗날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유득공의 『발해고(渤海考)』는 “평양성이 훗날 발해 중경현덕부 치소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왕검성이 있었던 낙랑군은 서진 시대에는 평주 속군이 되었는데, “276년 당시 요동, 창려(昌黎), 현토, 대방, 낙랑 등의 5군은 평주에 속했다”는 신찬의 『진서』 지리지 기록과 일치한다. 더 결정적인 기록은 원나라 탈탈(脫脫)의 『요사』이다. 요나라의 “동경요양부는 본래 고조선 땅으로 동경(東京)이 바로 옛 평양성”이며, “발해의 홀한주도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라고 한다“ 하였다.
현재 학계에서 정흥현(定興縣) 고성(固城)이 한(漢)나라 패수현(浿水縣)이자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府) 상락현(常樂縣) 위치로 밝혀졌다. 따라서 계조하(鷄爪河) 일명 패수 동쪽 7㎞에 있는 정흥현(定興縣) 고성(固城)이 바로 고조선 왕검성 치소로 추정된다.
왕검성(王儉城) 위치한사군은 실재했는가?
한나라는 군(郡)을 설치하면 황제직할지이기 때문에 중앙에서 태수 등을 파견했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는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면서 그와 같은 기록이 없다. 왜일까?
1. 반고의 『한서』(약 180년 후 기록)는, 『사기』의 5군이 황제직할지인 한사군으로 바뀌고 5군 제후들의 이름까지 삭제해 버렸다. 당시 직할 통치가 어려운 곳은 제후가 다스리는 국(國)을 설치하지 군(郡)을 설치하지는 않는다. 또 (『사기』보다 약 5백 년 뒤인 432년 편찬) 『후한서』는 『사기』에 나오는 조선 평정(平定) 기사에서 정(定) 자를 멸(滅) 자로 바꿔 조선을 멸망(滅亡)시킨 것으로 변조했다.
사료 『후한서』: 마침내 조선을 멸해 낙랑, 현토, 임둔, 진번으로 했다(遂滅朝鮮 爲樂浪 玄 臨屯 眞番). 낙랑, 현토, 임둔, 진번 등 4군을 두었다(爲樂浪 玄 臨屯 眞番)
위에서 만약 한 4군이 실제로 설치되어 직할 통치했다면, 위(爲) 자가 아니라 치(治) 자를 써야 한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점은 전한에서 서진까지(전한, 왕망의 신(新)나라, 유수(劉秀)의 후한, 220년 조조 아들 조비(曺丕)에 의한 한나라 멸망, 위(魏), 서진에 이르기까지) 5개 왕조가 바뀌는 400년간 한사군만 생존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반도에 있었다는 낙랑군이 거짓인 이유!사학계는 대동강 남안의 토성리에 있는 약 1.5km 토성(土城)과 목곽묘(木槨墓) 고분 100여 기를 한사군의 지배 시기의 토성과 무덤이라고 보고, 낙랑군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기』 조선열전에 보면, 우거왕이 험준한 곳에서 저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강 주변 토성은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또 낙랑군 고분으로 추정되는 목곽묘(木槨墓) 고분 100여 기도 BC 108년 훨씬 이전 목곽묘이며, 한사군이 설치되는 시기에는 사라진 무덤이다. 결국 대동강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세형동검류의 고조선계 문화가 주류를 이룬다. 또 봉니 200여 개 발견을 근거로 우리 사학계는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 사학계는 관직명이 전한 당시 관직 제도와 맞지 않고 크기가 제각각이라는 점을 들어 위조되었다고 추정한다. 특히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라고 쓰인 봉니가 위조품인 이유는 왕망의 신나라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당연히 낙선대윤장(樂鮮大尹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점제현(蟬縣) 신사비는 뜨거운 감자다. 동경대 세키노 다다시 교수가 평남 온천군 성현리에서 발견했는데, (점제현은 낙랑군 25개 속현 중의 하나-『한서』 지리지) 비석이 발견된 평안도 온천면 일대는 2천여 년 전, 한나라 시대에는 바다 밑에 있었다. 또 비석의 성분은 대동강 유역에서 생성된 화강암이 아니고 외부에서 옮겨온 것일 뿐만 아니라 2000년 전에 만든 비석 기초에 시멘트가 발라져 있었다.
고조선과 진국 및 삼한의 관계대한민국의 국호와 한민족의 뿌리는조선과 삼한에 있다. 여기서 삼한이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三國)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의미한다. 조한 전쟁시 “(고조선의) 조선상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왕에게 간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동쪽에 있는 진국으로 갔으며 그때 백성 2천여 호가 따라갔다(朝 鮮相歷谿卿以諫 右渠不申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 二千餘戶)”는 『삼국지』 기사에서 알 수 있듯, 진국은 위만조선의 남쪽이 아니라 동쪽에 있었다. 또 대조영이 세운 발해의 나라 이름도 진국(振國)이었다.
『후한서』도 마한, 진한, 변진의 삼한 모두가 진국에서 발전했고, 진왕이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삼한 전체를 다스린다고 했다. 다만 도읍을 『삼국지』는 월지국, 『후한서』는 목지국이라고 하였다. 결국 진국이 삼한 전체의 전신이었고, 어떤 계기나 사건을 통해 삼한으로 분할된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한(韓)은 3개 종류가 있다. 마한, 진한, 변진으로 나뉘어 있으며 78국이다. 모두 옛 진국이다(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凡七十八 國 皆古之辰國也).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래 우리 사학계가 신라, 백제, 가야가 삼한 소국들에서 발전한 국가라고 주장했는데, 속셈은 임나일본부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라는 강력한 고대국가가 기원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삼국(原三國) 시대라는 말도 이런 주장에 맞추다 보니 등장한 조어였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삼국사기』에 고구려 태조왕 시기 고구려와 마한 연합군이 한나라 현토성을 공략했던 기사가 있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기록에서, 멸망한 마한 세력은 사학계 주장처럼 한반도 서남부로 간 것이 아니라 한산 이북에, 강제로 이주했다고 나온다. 이어서 이 지역의 주민들이 고구려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김부식이 추론한 마한이 온조왕 때에 멸망했으나 고구려와 함께 요동 정벌을 할 수 있는 지역에 부활했음이 사실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다”라고 단언하는 최치원의 삼한론과도 일맥상통한다.
부여의 기원과 건국 신화『논형』에 따르면 부여는 북이(北夷) 고리국(離國) 출신 맥족 동명(東明)이 남하해 예족의 땅에 세운 국가이며 고리국은 탁리국(離國) 혹은 색리국(索離國)이라 불린다. 『산해경』과 『상서대전』 및 『사기』 화식열전 기록으로 미루어, 부여의 건국 시기는 기원전 1046년경 이전이고, 고대국가의 성립 시기는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건국 위치는 예맥의 결합이 이루어진 상곡 북쪽 지역 곧 상곡군(上谷郡)이다. 『삼국사기』는 북부여는 해모수, 동부여는 해부르를 시조로 보고 있지만, 중국 사서는 동명 신화만 기록하고 있는데, 고구려와 백제가 동명왕 사당을 만들고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아 동명 부여가 전체의 건국 시조로 보인다. 동명 신화의 기본 자료는 1세기경에 채록된 『논형』에 근거한다.
한편 동명 부여는 한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한서』에 따르면, 한나라 유방의 건국 과정에서 북맥은 군사적 지원을 했으며, 서기 121년과 122년 두 차례 고구려와 마한 연합군의 한나라 현토성을 공략 시 부여가 수만 병력을 보내 고구려 연합군을 깨뜨렸다. 그리고 신나라 왕망의 새 인수 명단에도 현토, 낙랑, 고구려, 부여가 있었다.

여기는 고구려 안시성이 아니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요녕성에 있는 봉황성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여기서 감히 말할 수 있다.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알을 잃어버렸는지는 똑똑히 고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 데는 분명히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고조선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치를 갖춘 석성, 비파형 동검 등이 발견되는데 중원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치를 갖춘 석성은 고구려 성의 특징을 보여주며, 비파형 동검도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대부분 요하 유역과 한반도에서 발견된다. 이는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이 중화민족과 다른 동이족 집단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요하문명으로 입증되는 동아시아에서 최초의 고대국가는 바로 고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