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고려중기부터 19세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재이론이 어떻게 수용되고 변화했는지를 추적한다. 재이론은 자연재해와 기이한 현상을 국왕의 정치와 연결해 해석한 전근대 동아시아의 정치사상이었다. 이 책은 재이를 미신으로 치부해 온 기존 인식을 비판하며, 재이론이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현실적 필요와 정치적 기능에 주목한다.
동중서에서 주희에 이르는 중국 재이론의 전개를 검토한 뒤, 조선 사회에서 재이론이 언론 활동과 정치 비판, 도덕적 성찰의 기제로 작동한 과정을 분석한다. 이론 체계의 변화보다 정치적 기능의 변천이 재이론의 존속과 소멸을 이끌었다는 점을 밝히며, 서양 과학 지식의 유입 이후 재이론이 어떻게 해체되었는지도 살핀다.
출판사 리뷰
고려중기부터 19세기까지 한국에서 재이론이
어떻게 수용되고 변화해 갔는지 추적하다!
재이론(災異論)이란 무엇인가?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역사에 관심이 많다 하더라도 ‘재이(災異)’는 상당히 낯선 용어일 것이다. 재이는, 오늘날로 치면 자연재해와 사회적 재난, 그리고 물리법칙으로는 잘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을 말한다. 재해나 재난이 일어나면 국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는데, 전근대 사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수재나 한재, 우박과 서리, 전염병이나 전란(戰亂)과 같이 인간 사회에 피해를 주는 재해(災害)와 일·월식이나 유성·혜성, 또는 기이한 현상이나 동·식물의 출현과 같이 비(非)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변이(變異)를 합하여 ‘재이’라고 했다.
일단 재이가 일어나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하면 구료(救療) 활동이나 세금 감면과 같은 구재(救災)를 위한 실무적인 대책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원인 분석과 예방에 관한 논의였다. 재이가 왜 일어났는지 이유를 알아야 예방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구재를 위한 실무적인 대책이 당장에 시급한 현실적인 대책이었다면, 재이 발생의 원인을 따지고 이를 바탕으로 예방책을 마련하는 것은 보다 근원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전근대 한국 사회에서 재이는 단순히 ‘천재지변(天災地變)’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재이는 오랫동안 국왕의 실정(失政)에 대한 ‘하늘의 경고[=천견(天譴)]’로 여겨졌다. 이는 국왕이 실정을 범하면 그에 대한 벌(罰)로 하늘이 재이를 내린다는 관념을 바탕으로 한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무수히 많이 남아 있는 천재지변 기사는 바로 이와 같은 관념의 역사적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몹시 두려워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을 반성한다’라는 뜻의 ‘공구수성(恐懼修省)’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성어(成語)이다. 재이가 일어나면 역대의 국왕은 ‘공구수성’을 입버릇처럼 말하며 낮은 자세로 자신의 실정이 무엇인지 또 예방을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널리 물어 구했다. 바로 이와 같은 역사의 기저에 있었던 사상과 이에 따른 다양한 논의를 아울러 ‘재이론(災異論)’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는 조선후기 재이론의 변천과 의미에 대해 탐구한다.
재이론,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랫동안 재이론은 전근대 사회의 ‘미신(迷信)’으로 치부되었다. 자연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재이 발생의 원인을 ‘과학적’(=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생겨난 자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재이론을 일종의 ‘우상(偶像)’처럼 낳았다고 설명했다. 재이론의 역사적 소멸도 19세기 말 서양 근대과학의 전래와 확산에 따른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19세기 말 서양으로부터 근대과학이 유입되어 ‘사상의 대체’가 일어났고, 이로써 전통 재이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직관적으로는 그럴 것도 같지만, 이 책은 이러한 종래의 설명을 거부한다.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일월식 때 행하던 구식례(救食禮)는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일월식이 언제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면 의식(儀式)을 미리 준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계산을 통한 일월식 예측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일월식 재이론이 고수되었다는 뜻이다. 일월식이 규칙적인 자연 현상이고 계산을 통해 언제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는데도 구식례를 거행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재이 발생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던 시절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재이론을 만들었다는 설명은 과연 유효한가. 재이[자연]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재이론의 역사적 존치는 필수적이고 절대적이었을까.
나아가 전통 재이론의 해체와 소멸을 한국 과학사상사의 발전이나 진보로 보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동아시아 과학담론을 지배했던 소위 니덤의 목적론적 과학사 인식은 전통 자연관의 유지와 존속을 정체 내지 쇠퇴로, 서양 근대과학의 적극적인 수용과 이를 통한 전통 자연관의 부정과 극복을 발전 내지 진보로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의 관심은 이러한 거대 담론이 아니다. ‘재이론이 왜 그토록 조선 사회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던 재이론이 언제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을까’라는 소박한 질문에 답을 찾는 게 이 책의 주된 목표이다.
이를 위해 이 책에서는 재이론을 이론과 기능으로 나누어 분석하는 전략을 택했다. 재이론의 내적인 이론체계의 변화와 외적인 정치적 기능의 변천을 정합적으로 구조화하는 방법이다. 내적인 이론체계의 분석에서는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이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주재천(主宰天)·이법천(理法天) 등의 개념이, 그리고 외적인 정치적 기능의 분석에서는 구언(求言)과 응지상소(應旨上疏), 언론 활동 등의 영역이 주요 검토 대상이 된다.
양자의 관계를 보면, 재이론은 이론의 영역보다는 기능의 영역이 변화를 추동한 측면이 더 컸다. 천인감응에 대한 강한 천착은 재이론에 대한 강한 반발로 나타났고, 재이론의 이론적 정비는 결국 재이론의 안정적인 활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체·소멸에서도 이론의 균열보다는 기능의 쇠퇴와 형해화가 더 큰 요인이었다.
재이론이 역사적으로 실존할 수 있었던 것은 초월적인 믿음보다는 현실에서의 필요가 더 큰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지식인이 품었던 고민은 견강부회하지 않는 재이론 활용이었다. 그들은 적지 않은 허점을 확인했으면서도 재이론을 부정하거나 폐기하지 않고, 이를 보완하고 재편해 나갔다. 이 점에서 재이론이 오랫동안 존속하며 정치·사상적으로 변화·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미신적 또는 종교적 믿음의 발로(發露)여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담당했던 역할과 기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요 내용
이 책은 동중서(董仲舒)에서 주희(朱熹)까지 중국 고중세 재이론의 전개를 이론과 기능을 중심으로 분석한 뒤, 고려중기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한국에서 재이론이 어떻게 수용되고 변화해 갔는지 추적한다.
동아시아에서 재이론을 정치사상으로 체계화한 인물은 전한(前漢)의 동중서이다. 동중서는 종래의 천견설과 천인감응론을 결합해 재이론을 이념적으로는 군주의 정치권력과 통치를 정당화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이것의 무한한 팽창을 예방하고 억제하는 양면적 성격의 정치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런데 후한(後漢) 이후 재이론은 예언·참위화의 변질을 겪었고, 당(唐) 대에는 예언·참위적 재이론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하지만 북송(北宋)의 유학자는 재이론을 폐기하지 않고 천리(天理)에 부합하는 강상윤리의 실천을 재이론의 중심에 놓으며 이론적으로 재편했다. 북송 대 이후 많은 지식인의 고민은 재이를 견강부회(牽强附會)하지 않으면서도 군주에게 경계(警戒)하는 마음을 심어줄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이에 주희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은 재이를 군주의 심성수양 문제로 귀결시키며 재이론의 역사적 수명을 연장시켰다. 이로써 주자학에서 재이론은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우주론적 근거로 기능하게 되었다.
조선 세조 대의 패권정치에 반발하며 등장한 15세기 후반의 사림은 도학정치(道學政治)의 구현을 염원했고, 이것의 구현을 위한 정치·사상적 기제로서 재이론에 주목했다. 이른바 주자학적 재이론의 대두였다. 재이론은 안전한 언론 활동을 보장해 주고, 도학정치가 왜 필요한지, 또 이것을 조선 사회에 왜 구현해야 하는지 우주론적으로 정당화해 주었다. 주자학의 학문·사유체계 내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정연한 논리로 펼칠 수 있었고, 군주에게 심성수양(心性修養)과 성학에 대한 탐구를 강도 높게 요구할 수 있었다. 동시에 제도 개혁과 민생 문제를 제기하는 효과적인 언로(言路)로 기능했다. 15~16세기 재이론은 유용한 정치·사상적 기제로 활용되었다.
17세기 이후 재이론은 정치세력의 분화 속에서 정략적으로 이용되었다. 정치세력이 동·서로 분화하고, 언론 활동이 붕당에 따라 나뉘면서 재이론이 그 근거 논리로 복무하게 된 것이다. 이에 재이론의 정략적 활용을 경계하면서 재이론의 본의를 되새기고자 하는 학술적 노력 속에서 『역대요성록(歷代妖星錄)』, 『역대수성편람(歷代修省便覽)』, 『천동상위고(天東象緯考)』와 같은 재이 문헌이 편찬되었다. 그리고 역학 연구의 심화를 배경으로 재이론이 기수설(氣數說) 및 역학과 결합하면서 이론적 체계성이 한층 강화되었다.
18세기 중반 재이론은 정치·사상적으로 중대한 변화를 맞았다. 하나는 서양 과학지식의 유입으로 전통적 재이론의 이론체계가 흔들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이론이 정략적으로 남용되며 하나의 관습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재이론이 담당하던 정치·도덕적 기능은 쉽게 폐기되지 않았다. 이익·홍대용·홍석주·이규경 등의 지식인은 “자연은 인사와 무관하다”는 사실과 “군주는 재이를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요구를 어떻게 조화시킬지 모색했다. 하지만 과도기적 시기를 맞아 재이론은 이론적 균열에 정치적 관습화가 더해지면서 그 본의는 퇴색되고, 19세기 후반 유명무실한 ‘전통’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의 재이론은 이론체계의 균열에 정치적 기능의 상실이 더해지면서 종언(終焉)을 맞게 되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경석현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마쳤다. <조선후기 재이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조선후기 과학사상 및 과학기술의 변화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국립대구과학관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 『18세기 어느 천문학자 집안의 흥망성쇠 이야기』(저서, 2024), 「조선 현종 9년(1668) 이옥(李沃, 1641~1698)의 『역대수성편람(歷代修省便覽)』 편찬과 존군적(尊君的) 재이론」(2025) 등이 있다.
목차
책머리에
제1장 서론
제2장 재이론의 이론체계와 정치적 기능-동중서(董仲舒)와 주희(朱熹)의 재이론을 중심으로-
1. 동중서(董仲舒) 재이론의 이론적 양면성과 정치적 소통
2. 한(漢) 대 재이론의 참위(讖緯)·예언화(豫言化)
3. 송(宋) 대 합리적 재이관과 주희(朱熹)의 이학적(理學的) 재이론
제3장 고려~조선 초 유교정치사상의 전개와 재이론의 변화
1. 고려 중기 신유학(新儒學)의 영향과 합리적 재이관의 형성
2. 조선 초기 정권 안정화와 재이론의 역할
제4장 15세기 후반~16세기 주자학적 재이론의 대두와 전개
1. 15세기 후반 주자학적 재이론의 대두
2. 16세기 주자학적 재이론의 전개와 정치적 활용
제5장 17세기 초·중반 주자학적 재이론의 정치·사상적 변화와 대응
1. 재이론의 정략적(政略的) 활용과 군주 수성론(修省論)의 강화
2. 역학(易學) 연구의 확산과 주자학적 재이론과의 융화
3. 재이론과 변통론(變通論)의 조우
제6장 17세기 중반~18세기 초반 정치·사상적 갈등과 재이론 활용의 다변화
1. 현종 5년(1664) 『역대요성록(歷代妖星錄)』의 정치 지향적 재이론
2. 현종 9년(1668) 『역대수성편람(歷代修省便覽)』의 존군적(尊君的) 재이론
3. 숙종 34년(1708) 『천동상위고(天東象緯考)』와 군주 수성(修省)의 재이론
제7장 18세기 중반~19세기 중반 ‘신·구(新·舊)’ 재이론의 갈등과 재이론의 관습화
1. 주자학적 일월식론(日月食論)의 변동과 ‘당식불식(當食不食)’ 논쟁
2. 『문헌비고(文獻備考)』 「상위고(象緯考)」의 ‘신·구(新·舊)’ 재이론
3. 실증적 재이관의 전개와 재이론의 재인식
4. 재이론의 정치적 기능 변질과 관습화
제8장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