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인수첩에서 김인옥 시인의 신작 시집 『힐 엔드』 (시인수첩 시인선 103번째)가 출간되었다. 총 4부 58편의 구성으로 한국과 호주를 오가며 쓰인 이 시집은 이주민의 삶과 정체성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한국 디아스포라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1부의 ‘해 질 녘의 당신과 불행하고 슬픈 모든 어둠’으로 시작해 4부 ‘아웃백 일기’로 마무리되는 시집은 시인의 내적 여정을 잘 보여줌과 동시에 한국어로 호주라는 공간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울루루」, 「호지어 레인」 등에서는 호주의 구체적 장소들이 시적 사유의 무대가 되며 「이다키마니」(땅을 읽는다), 「뱀장어가 누워 있는 땅」 등에서는 호주 원주민의 역사와 식민의 상처를 정면으로 다룬다.
출판사 리뷰
시드니에서 전하는 디아스포라의 목소리
시인수첩에서 김인옥 시인의 신작 시집 『힐 엔드』 (시인수첩 시인선 103번째)가 출간되었다. 총 4부 58편의 구성으로 한국과 호주를 오가며 쓰인 이 시집은 이주민의 삶과 정체성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한국 디아스포라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1부의 ‘해 질 녘의 당신과 불행하고 슬픈 모든 어둠’으로 시작해 4부 ‘아웃백 일기’로 마무리되는 시집은 시인의 내적 여정을 잘 보여줌과 동시에 한국어로 호주라는 공간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울루루」, 「호지어 레인」 등에서는 호주의 구체적 장소들이 시적 사유의 무대가 되며 「이다키마니」(땅을 읽는다), 「뱀장어가 누워 있는 땅」 등에서는 호주 원주민의 역사와 식민의 상처를 정면으로 다룬다.
특히 주목할 작품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다. 한국계 입양아의 시선으로 쓰인 이 시는 “한글학교에서 또박또박 younghee를 쓰고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따라 불러도 / 또래의 박자에서 밀려나는 입양아”라는 구절로 정체성의 균열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안녕, 홀로그램 연인들」, 「스플래시다운」 등에서는 공상적 상상력을 동원해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을 그려낸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시적 세계를 구축한다. 이 두 시는 경계가 흐려진 세계에서 사랑과 죽음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디지털 시대의 감수성으로 재해석하거나, 침몰의 이미지를 통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의 불안정성을 형상화한다.
호주 내륙 사막을 횡단하며 쓴 연작 ‘아웃백 일기’는 압축된 언어로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아낸다. “지평선위로길게이글거리는물빛에끌려 / 사륜구동한빛깔로아물거리는이승의시간”(「아웃백 일기8 –신기루」)처럼 띄어쓰기마저 생략한 급박한 호흡은 광활한 사막에서 느끼는 실존적 고독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또한 시집 곳곳에서 어머니의 존재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하얗게 핀 파파베라」에서는 “스무 살 엄마는 문맹이었다”로 시작해 전쟁과 이산의 역사를 개인사로 풀어낸다. 4부의 마지막 시 「언큐어드」에서는 “몸져누운 엄마가 시 한가운데 들어왔다”라며 질병과 죽음, 그리고 시 쓰기의 의미를 성찰하며 시집의 내적 의미를 풍성하게 한다.
『힐 엔드』는 이주민의 향수와 정체성 혼란이라는 전통적 주제를 넘어, 호주 땅이 품은 역사적 층위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시인은 원주민과 이주민의 상처가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하며 식민과 이주의 복잡한 역사를 섬세하게 직조한다. 이는 단순한 이분법적 갈등을 초월하여 공간 자체의 복합적 서사를 드러내는 독창적 시각이다. 또한 『힐 엔드』는 관광객의 표면적 인상을 거부한다. 대신 그곳에 뿌리내린 이주민의 깊은 응시로 공간을 해석하면서도 한국어의 미학적 가능성을 확장한다. 이러한 시도는 디아스포라 문학이 향수의 틀을 벗어나 보다 넓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새로운 문학적 지형을 개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21세기 한국인의 삶은 더 이상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포착해 한국 문학의 지평을 확장한 시집 『힐 엔드』는 이주와 정착, 모국어와 외국어,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길을 찾는 모든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리고 묻는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 시집 해설 들여다보기
디아스포라, 길항하는 두 세계와 시적 여정
조동범 (시인·문학평론가)
디아스포라, 너머의 언어
디아스포라의 언어를 떠올린다. 하나의 세계로부터 또 다른 세계로 이어진 이산(離散)의 여정을 따라간다. 일반적으로 디아스포라는 고통과 상처, 슬픔과 결핍을 상정한다. 또한 디아스포라 문학 역시 그러한 것들을 재현하며 부정의 상상력을 드러낸다. 김인옥의 시적 여정은 바로 이와 같은 디아스포라를 통해 이어지고 완성된다. 그에게 디아스포라는 숙명과도 같은 문학적 영토다. 독자들은 그의 시집 『힐 엔드』를 따라가며 디아스포라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김인옥 시에 나타난 디아스포라는 시인의 섬세한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유의 힘을 부려놓는다.
디아스포라는 크게 정치적·사회적 디아스포라와 개인적 디아스포라로 구분한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한인 이주로 대표되는 정치적·사회적 디아스포라를 경험했으며 이것은 지금까지 상처와 고통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또한 개인의 이주가 활발해진 이후에는 개인적 디아스포라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김인옥의 시는 이 가운데 개인적 디아스포라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그의 시 속 디아스포라는 단순한 개인사적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개인적 디아스포라라는 실제 삶의 가운데서도 신화와 전설, 역사와 이주사, 현실과 정치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수용하며 자신의 시적 의지와 사유를 개진한다.
여성스러운 건 몰라도
순전히 신여성이 되고 싶었습니다
동경 자체가 출발선이었는지도요
사진 한 장이 혼인 서류였고
플래시 한 번에 증조할머니는 신부가 되었지요
살굿빛으로 걸어보고 싶었지요
미래의 미래까지 닿을 줄 알았지요
닷지트럭이 흙먼지를 날리며 떠난 부두엔 덜컹이며 흔들
린 사진 한 장 남았습니다
잠깐 마주 본 옆모습은 아주까리기름을 발랐는가 했는데
굽은 어깨와 돌아선 등이 저만치 거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하얀 것이 꽃인지 벗겨진 고무신인지
허리까지 차오른 사탕수수밭에서 방울방울 맺힌 땀
아침은 저녁으로 저녁은 밤으로 넘어갔고
빛조차 닿지 않는 교회에서는 나이 스무 해 차이를 이불
처럼 덮고 살라 했지요
…(중략)…
다만, 꽃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그 이름을 부르지 못했을 뿐이죠
-「플루메리아의 초상」 부분
어쩌면 김인옥의 시는 하와이로 떠난 한인 디아스포라의 비극과 고통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가 한인 디아스포라를 비롯하여 디아스포라 전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떠나온 고국과 지금 살고 있는 호주를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가 디아스포라의 정처 없음이라는 본질을 집요하게 탐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인 디아스포라의 상징적 사건인 하와이 이주사를 시의 바탕에 깔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와이 디아스포라는 근대 초기 한인 디아스포라의 출발점이자 슬픈 역사다.
이민과 같은 개인적 디아스포라의 경우, 정치적·사회적 디아스포라와 다른 양상을 띠지만고국의 상실과 결핍을 전제로 한다는 점은 같다. 근대를 관통하며 나타난 뿌리 뽑힌 삶의 정처 없음은 그것이 정치적·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친연성을 갖기 마련이다. 양상과 강도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비극적 근대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김인옥의 시는 떠나온 자의 시선 속에 내부자와 외부자의 경험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들의 간극을 통해 시적 정서와 의지를 길어 올리려 한다.
해 질 녘, 당신은 비통한 피로 가득합니다 피를 나눈
심장이 미지의 핏빛을 발합니다 비단뱀 쿠니아가 핏기로 꿈틀댈 때 아득한 음각은 살육에 쫓긴 생채기에서 비롯된 건가요 황량하게 서 있는 것 말고 적막으로부터 마주 눕는 일은 점점 선명해집니다
제단을 떠올리면 반추되는 누군가의 슬픈 날,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당신을 파양합니다 폐부 깊숙이 새긴 침묵은 종족의 가호를 빌기 위한 신성함인가요 그 많은 새와 검은 새 부족이 휩쓸고 간 자리는 죽음의 선분을 드리웁니다 모든 의미는 예측할 수 없는 의미뿐
숨진 채 발견되지 않은 어린 전사와 아폴로 11호는 머나먼 전설입니다 창에 찔린 무지개 뱀이 비보다 먼저 쏟아낸 비명, 서로의 상처를 닦아주기 위해 영혼의 무게는
비밀스럽습니다 지난 일을 암시하기 위해 가슴에 박힌 별의 반짝임까지 슬퍼져야 하나요
심장을 어루만지던 별자리가 멀어져가면 미래의 미래
는 위태롭습니다 신들은 밥상에서 걸어 나와 춤을 춥니
다 붉은 눈시울 곁들인 당신과 당신의 어린 전사는 제물을 향한 시퀀스인가요 떼어낼 수 없는 그늘은 자라서 전설로 변주되기도 하지만 문득, 거대한 저물녘 시뮬레이션이 궁금해집니다
- 「울루루*」
* 호주 노던 테리토리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세계 최대의 바위산. 원주민 아난구족의 성지로 ‘그늘이 지난 장소’라는 뜻.
서큘러키 광장에 영희가 서 있다
영희가 고개를 돌리면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부터 궁리한다
이국의 카펫 위에서 걸음마를 뗄 때도
강보에 싸일 때도
순한 이름 아래 밑그림이 드러나던 나
오랫동안 정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그림자를 두고 온 아이처럼
그게 뿌리였을까
왜 하필 무궁화일까
눈동자가 흔들릴 때마다
살아남으려면 웃지도 말아야 한다고
누가 그랬을까
…(중략)…
한글학교에서 또박또박 younghee를 쓰고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따라 불러도
또래의 박자에서 밀려나는 입양아
홉뜬 눈으로 웃으면 교포처럼 보일까
…(중략)…
부재가 배경이 될수록
경계 너머 나라는 뒷걸음친다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이 운동장을 빠져나간다
눈을 감았다 뜬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부분
모든 존재는 그래피티로 시작되는가 벽 안의 어둠을
감추는 모양새로 영혼은 사라진 것들의 무게를 측정한다 길고양이가 출구 없는 입구에서 단호함을 핥는구나
천지를 떠도는 당신들은 혀가 만든 자국 위로 유폐된 종족, 진실은 실화를 잉태하는가 굴욕의 시대는 닫히고 환생과 후생의 갈림길을 떠올린다 당신들을 걷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풀어지는 신발 끈이 몰락의 가장자리를 어루만질 때
디저리두를 부는 죄수의 손안에서 흰개미의 알이 튀어나오고 당신들은 새의 울음을 터트린다 애보리진 소녀의 하얀 가발이 벗겨지면 핏빛 지난날은 침묵한다 죽음을 박탈당한 누군가와 입 맞추는 새, 고양이 혓바닥 위에 모여 앉은 비밀, 불행하고 슬픈 모든 어둠을 부재로 설명한다 기록되지 않은 사례는 신의 눈동자를 꿰뚫을 것인가
당신들은 걷고 싶을 뿐 끝도 없는 밤의 거리에서 길고양이는 영혼의 폐허를 헤맨다 망자의 무게는 성실히 저울질 되고 평평한 묘지는 조금 더 참혹한 죽음에 다가선다 그리하여 또다시 유기되는 시신들은 낙서처럼 자정을 향해 사라진다 선득할수록 현실은 선명하게 목격될 것이고 내일은 또 내일대로 살아남을 것이다
- 「호지어 레인*」
* 호주 멜버른 도심에 위치한 그래피티 거리. 단순한 낙서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와 역사적 의미를 담은 거리 예술 작품.
목차
시인의 말·5
1부 | 해 질 녘의 당신과 불행하고 슬픈 모든 어둠
생존 벙커에서의 사랑·13
울루루·16
호지어 레인·18
제인 도·20
그리고 그때부터는 또한 손을 잡기가 더 쉬워지지 않는
그런 날이 계속되었다·22
심판·24
아일랜드 고스트·26
전시된 당신·28
제국의 열차·30
너무 취한 아버지는 죽어도 싸지·32
끝과 시작의 곁에서·34
스텔라 씨만 모르는·36
잘려 나간 귀·38
2부 | 그때 나는 스스로를 깨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안녕, 홀로그램 연인들·43
부활절 날 뒤집힌 가족·46
성냥팔이 소녀와 저물녘을 절뚝거리는 길고양이·50
어느 날 낯선 병이 지구를 덮고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52
스플래시다운·54
I’m made from 12 plastic bottles·56
타임라인·58
비트 앤 스윗과 0과 1·60
디스커넥티드·62
한쪽 날개는 불에 타고 다른 한쪽은 절며·64
스카이스크레이퍼·66
아무도 원치 않았던 이야기·68
유리, 아이러니·70
이리스의 방·73
3부| 먼지를 지나면 별은 영원히 빛나려 합니다
이다키마니·79
청춘의 덫·82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미친 각주들·84
패잔병의 깃발·87
알래스카·90
거진·92
플루메리아의 초상·93
스타벅스·96
스무 살·97
일주일·98
나는 미술관이다·100
출구 없음·103
벌거숭이 임금님·106
지옥에서 피어나는 별·108
통화·110
볕·112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114
4부 | 아웃백 일기
아웃백 일기 2 - 버크에 가도 되겠습니까·119
아웃백 일기 5 - 크레이그 오두막·122
아웃백 일기 6 - 몇백 년은 외로웠을 처녀가·124
아웃백 일기 7 - 힐 엔드·126
아웃백 일기 8 - 신기루·128
아웃백 일기 9 - 언브 로큰·129
뱀장어가 누워 있는 땅·131
검트리 숲에서 보내는 편지·134
1박 - 문학 행사 전야·136
타운홀·138
하얗게 핀 파파베라·140
삼월·142
너는 항상 주석을 달더라·144
언큐어드·146
해설 | 조동범 (시인·문학평론가)
디아스포라, 길항하는 두 세계와 시적 여정·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