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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살이
파이낸셜 어드바이즈 한현순의 뉴질랜드 이민 성공기
도서출판 JMG(자료원·메세나·그래그래) | 부모님 | 2026.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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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1947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미8군 장교클럽 여비서로 일하던 한 여성이 1971년 우연한 만남으로 국제결혼을 하고 뉴질랜드로 이주한다. 세 아들을 홀로 키우며 타국의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수많은 고난을 넘고, 동양 여성 최초로 파이낸셜 어드바이저로 자리 잡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인간 승리 자전 에세이다.

웰링턴 지역 일간지 「The Post」와 「코리아포스트(NZ Korea Post)」가 성공한 한인 여성 사업가이자 부동산 투자 전문가로 집중 조명한 인물의 기록이다. 삶의 전환점이 된 40대 이후의 도전, 금융과 부동산 현장에서의 실전 경험, 뉴질랜드 사회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 시간 순으로 구성돼 이민·자립 서사의 의미를 전한다.

  출판사 리뷰

이 책은 1947년 7월, 충북 옥천군 군북면 지오리에서 한귀섭의 6남매 셋째딸로 출생해 평택 주재 미 8군 장교클럽 여비서로 근무해 오다 24세 때인 1971년 5월, 한국 주재 뉴질랜드 <한뉴목장 농업 컨설턴트>로 재직하던 뉴질랜드 청년을 서울 조계사 부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만나 지정된 좌석에서 평택까지 같이 앉아가게 되고, 얼마 후 뉴질랜드 청년의 구애와 청혼으로 한국 주재 뉴질랜드 대사관의 주선으로 국제결혼 후 남편을 따라 뉴질랜드로 귀화해, 세 아들을 낳아 훌륭히 키우면서 자식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키기 위해 솔로 맘으로 뉴질랜드 사회 직업전선으로 나아가 타국 사회에서의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기며 동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파이낸셜 어드바이즈(재정 고문 또는 재정구원)로 활동하며 뉴질랜드 사회 정착에 성공한 파이낸셜 어드바이즈 한현순의 일대기를 기록한 인간 승리 자전 에세이다.

웰링턴 지역 일간지인 「The Post(구 Dominion Post)」지는 그녀를 향해 “성공한 한인 여성 사업가”이자 “부동산 투자 전문가”로 소개했고, 「코리아포스트(NZ Korea Post)」지는 2015년~2017년 비즈니스 섹션(12면~18면)에다 수 차례 “모기지(mortgage) 설계의 마술사”, “자산 증식의 파트너”, “웰링턴의 부동산 투자 멘토”라는 제목으로 집중 보도하기도 했다.

최근까지 뉴질랜드 아일랜드 베이 뉴타운에 거주하며, <Haley Fenwick Financial advisor'(헤일리 펜윅 경제 자문)> 프리랜서 사무실을 열어놓고 멘토로 활동했던 그녀는, “43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아주 늦게 사회에 나온 온상 속의 화초, 아니면 잡풀(?)이라고 해야겠다. 보통 그 나이가 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는데 이 사람은 좀 달랐다. 일어섰다. 세 아들을 대학에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솔로 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해 냈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형 거미줄에 걸려든 한 마리의 벌처럼 허우적거리며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절박함 속에서 살아날 길을 찾아야 했기에……. 그 절박함이 그녀를 살렸다.”라고 처음 직장을 구하기 위해 그녀가 직업소개소를 찾아 나선 그날을 회고하고 있다.

출판사 서평

이 책은 1947년 7월, 충북 옥천군 군북면 지오리에서 한귀섭의 6남매 셋째딸로 출생해 평택 주재 미 8군 장교클럽 여비서로 근무해 오다 24세 때인 1971년 5월, 한국 주재 뉴질랜드 <한뉴목장 농업 컨설턴트>로 재직하던 뉴질랜드 청년을 서울 조계사 부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만나 지정된 좌석에서 평택까지 같이 앉아가게 되고, 얼마 후 뉴질랜드 청년의 구애와 청혼으로 한국 주재 뉴질랜드 대사관의 주선으로 국제결혼 후 남편을 따라 뉴질랜드로 귀화해, 세 아들을 낳아 훌륭히 키우면서 자식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키기 위해 솔로 맘으로 뉴질랜드 사회 직업전선으로 나아가 타국 사회에서의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기며 동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파이낸셜 어드바이즈(재정 고문 또는 재정구원)로 활동하며 뉴질랜드 사회 정착에 성공한 파이낸셜 어드바이즈 한현순의 일대기를 기록한 인간 승리 자전 에세이다.

1990년, 마흔셋이라는 늦은 나이에, 솔로 맘의 신분으로 뉴질랜드 사회 직업전선으로 나아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씩 근무하며 자리를 잡을 만하면 또다시 구조조정을 당해 이 직장, 저 직장 전전하며 타국 사회에서의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기며 동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일곱 번째 직장인 종신생명보험 판매 회사 파이낸셜 어드바이즈(재정고문 또는 재정구원)로 활동하며 <뉴질랜드 전역 TOP 10 브로커> 반열에 올라 4년간 <백만 달러 원탁회의>에 초청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었다.

그러다 1992년 6월 2일, 본의 아니게 종신보험회사 한 클라이언트의 집 한 채를 인수, 세입자 관리를 해주며 부동산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후 한 해에 한 채씩 부동산을 사들였고, 어떤 해는 두 채도 사들이고, 얼마 후는 웰링턴 지역을 넘어서 뉴질랜드 남섬의 부동산도 사들이며 <집 한 채는 나무 한 그루>라는 개념으로 부(富)의 문을 열어갔다…….

웰링턴 지역 일간지인 「The Post(구 Dominion Post)」지는 그녀를 향해 “성공한 한인 여성 사업가”이자 “부동산 투자 전문가”로 소개했고, 「코리아포스트(NZ Korea Post)」지는 2015년~2017년 비즈니스 섹션(12면~18면)에다 여러 회에 걸쳐 “모기지(mortgage) 설계의 마술사”, “자산 증식의 파트너”, “웰링턴의 부동산 투자 멘토”라는 제목으로 집중 보도하기도 했다.

48세 때인 1995년 5월, 종신보험 판매 프리랜서로 전향해 최근까지 뉴질랜드 아일랜드 베이 뉴타운에 거주하며, <Haley Fenwick Financial advisor'(헤일리 펜윅 경제 자문) 사무실을 열어놓고 멘토로 활동했던 그녀는, “43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아주 늦게 사회에 나온 온상 속의 화초, 아니면 잡풀(?)이라고 해야겠다. 보통 그 나이가 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는데 이 사람은 좀 달랐다. 일어섰다. 세 아들을 대학에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솔로 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해 냈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형 거미줄에 걸려든 한 마리의 벌처럼 허우적거리며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절박함 속에서 살아날 길을 찾아야 했기에……. 그 절박함이 그녀를 살렸다.”라고 처음 직장을 구하기 위해 그녀가 직업소개소를 찾아 나선 그날을 회고하고 있다.

분망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1993년 3월 대전 EXPO’93 뉴질랜드관 관리자로 한국에 파견되었고, 그해 12월에는 뉴질랜드 육류수출위원회 한국어 통역사로 발탁되어, 한국 미트 바이어들의 육류 수입 상담을 한국어로 통역하며 뉴질랜드 전역 모든 도축장을 한국의 바이어들에게 안내하며 갖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뚜기처럼 우뚝 서는 한국인의 참모습을 보여주며, 전 세계인들로부터 귀감이 되는 <한국인 상>을 이룩하였다는 정평을 받고 있다.

중국 정부의 뉴질랜드식 옥외목장 설립 기획
내가 기적적으로 바다에서 구조를 받은 후에도 남편의 여자 문제는 계속되었다. 미남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 지적인 모습 때문이어서 그런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여자들 특히 농장주들의 아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인기의 결과는, 나라는 인간을 해마다 초라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나는 건강한 날보다 아픈 날들이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작은 동네에서 입소문으로 빠르게 전달되는 남편에 대한 소문도 자주 나에게 도착했었다.
이런 식으로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던 1980년 중반, 남편이 뜬금없이 중국에 가서 일을 할 기회가 있을 성싶다고 했다. 라는 뉴질랜드 회사가 중국 정부로부터 중국에 뉴질랜드식의 Outdoor farm(야외 농장)을 설립해 달라는 청탁을 받아내서 광고를 냈는데 그 광고가 남편의 사무실(Ministry of Agriculture and Fishery - 농수산부)에도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광고된 문장 중에 중요한 조건은 “결혼한 남자라야 하고 가족이 전부 갈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의 차분한 설명을 들으면서, 어이없게도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중국에 가서 살면 남편의 여자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희망 같은 것이었다. 나는 가겠다고 동의를 했고, 남편은 이력서를 CHINZACO에 보냈다.
얼마 후 우리 두 사람은 오클랜드(Auckland)로 인터뷰를 받으러 비행기를 탔다. 아이들은 학교를 빠질 수 없었기에 이웃집에 맡겨 두고 우리 둘만 떠났다. 우리 둘만의 여행이었는데, 우리는 이미 연인 관계를 떠난 지 오래되어서 그냥 모르는 사람과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면접관 앞에 나란히 앉아서 남편이 자격 여부에 대한 답을 했다. 교육 수준, 일에 대한 경험, 열대 지방의 목초에 대한 지식, 농경 기구 사용법 등등이었다. 면접관은 아주 외딴 중국에서의 생활이 무척 힘들 것이라 설명했다. 현재 일하고 있는 분은 건강 상태가, 12개월 사이에, 나빠져서 부득이 사표를 내야 했기에 우리는 그 뒤를 잇는 것이라 했다. 면접관의 설명 속에 그곳에서의 생활 환경이 얼마나 나쁜지를 암시했다. 실은 나의 건강 상태는 그곳에 가기도 전에 벌써 망가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중국어 수업을 받다
1981년 초 우리 부부가 발탁되었다는 통지를 받은 후 우리는 오클랜드대학교(University of Auckland : 1883년 설립된 뉴질랜드 북섬에 위치한 뉴질랜드 최대의 대학교)로 가서 6주간의 중국어 교육을 받았다. 우리의 중국어 교수님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까지 구사하시는 분이셨고, 높은 교육을 받은 중국인 학자처럼 한자를 자유자재로 써 내려가실 정도의 실력파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중국어는 배우기 쉬웠다. 문법이 영어 나열과 같았고 한국어같이 수식어가 많지 않아서 그랬을까? 나는 중국어에 홀딱 반해 버렸다. 중국어는 따뜻한 언어로 내게로 다가왔다.
중국어는 어렵지 않게 배웠으나 현재 그렇게 유창한 편은 아니다. 베이징에 가면 내가 상하이(上海)에서 온 줄 알고, 상하이에 가면 내가 베이징(北京)에서 온 줄 아는, 내 중국어 발음은 그저 그런 듯하다. 그래도 중국에 여행을 가면 돌아다니는 데는 별문제가 없다.
1981년 7월. 그렇게 중국 정부를 위해서 뉴질랜드식의 아웃도어 파밍(Outdoor Farming : 옥외 농장)을 셋업(Setup : 설립) 하려고 남편과 세 아들과 나는 중국을 향해 떠났다.

환영 파티
우리가 도착한 날 베이징의 농수산청에서 내려온 분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공항은 상하이였나 보다. 뉴질랜드의 겨울을 뒤로하고 비행기로 이동해 온 우리 가족에게 숨이 막히는 상하이 공항의 여름날의 습도가 우리를 덮쳤다. 오랜 비행 후에 피로함으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반 열대 지방의 여름 온도는 충격적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우리는 국방색 중국 정부의 차량에 올랐고, 그 차량의 숫자는 많았다. 꼭 우리가 무슨 유명세를 가진 사람들처럼 호송하는 차량들은 거리를 메우는 듯했다. 한참 후에 도착한 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식당이었다.
오성급 호텔에 딸려 있는 식당이었다. 우리가 앉아야 할 테이블도 중국 대륙처럼 컸다. 모두들 부산을 떨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 낯설은 곳에서 낯설은 사람들과 앉은 나는 어리벙벙한 마음 상태였다. 그 와중에, 내 마음속의 어린아이가 파티에 참석한 인원이 몇 명인가 하고 세기 시작했다. 세다가 헷갈려서 포기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둥그런 식탁에 둘러앉아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모두 환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우리 집 세 녀석들은 우리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중국 학생들하고(이 학생들은 영어에 능통한 실력파들이었고 번역사들이었다)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거리고 웃기까지 했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번역사들이 해주는 것 같았다. 생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중국인들과 마치 오랫동안 알아 온 친구들처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는 모습,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 아들들이 아주 대견스러웠다. ‘아, 이렇게 우리의 새 생활이 시작되는구나’ 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나를 감싸주었다. (중략)

2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치안지앙시범목장
그다음 날 우리는 차에 올랐다. 국방색의 군용차였다. 차량 문도 없었다. 긴 행렬의 군용차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문명을 등지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 오랜 시간의 주행 거리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해서 200여 년 전의 지구에 도착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도 후미진 치안지앙시범 목장(Qian-Jiang Shi-fan Muchang)이라는 곳이었다.
치안지앙(Qianjiang)은 중국어로 중국 광시성 라이빈시 싱빈구 치안지앙(中國 廣西省 來賓市 興賓區 遷江縣)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1952년 치안지앙이 라이빈구에 편입되기로 결정되기 전까지, 치안지앙현은 11세기 초부터 치안지앙 현의 행정 중심지로 알려져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치안지앙 진(遷江縣)은 중국이 간체자를 도입하기 전까지는 천강현(遷江縣, 遷江縣誌 53면)으로 표기해 온 마을 이름이었다.
먼 산등성이, 푸른 하늘 밑에 머리에 흰 수건을 둘러멘 아낙네들이 망치질을 해댔다. 다이너마이트로 폭발해 놓은 돌들을 잘게 깨는 작업을 하고 있는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던 하늘은 우주만큼 넓었고 양반댁 마당처럼 갓 쓸고 간 빗자루 자국의 흰 구름이 보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조용했다. 너무 공간이 넓어서 아낙네들의 망치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들의 동작은 꼭 팬터마임(pantomime)을 보는 것 같았다. 가끔 까치같이 보이는 새 한두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이는 그곳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평화스러웠다. 조용했다. 조용했다. 조용했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이곳에 저 아낙네들은 어떻게, 어디서, 이곳으로 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옛날처럼 곳곳에서 모아온 노예들인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처럼…….

  목차

저자의 글……4

프롤로그……18

그 삶이라는 것……18
예언……19

첫째 마당 이야기……21

나의 탄생……22
울보와 기적……23
내 어린 시절의 행복……23
쥐의 세상 뒷간……24
들꽃……24
거리 상가의 노래와 교회에서 주던 시루떡……25
두꺼비 녀석들……25
혼자만의 게임들……26
산 동네 친구들……26
기차의 기적소리……27
하늘의 선물……27
동대문국민학교에 입학하다……28
책 낭독 챔피언……30
꼬부랑 할머니들……31
그리운 귀뚜라미들의 코러스……32
개구리들의 개굴개굴 합창……32
혼자인 백로……32
양반님들같이 품위 있는 소나무들……33
즐거웠던 나날들……33
가랑잎과의 게임……34
거리마다 즐비했던 시인들의 이야기……34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34
행복한 시절의 한 가지 사건 - 엄마의 부재……35
국민학교 6학년 때 – 국가 장학금 시험……36
중학교 입학시험……39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다……40
첫 번째 외국어 – 영어……41
두 번째 외국어 – 독일어……43
세 번째 외국어 – 일본어……44
네 번째 외국어 – 중국어……46
다섯 번째 외국어 – 불어……47

둘째 마당 이야기…… 49

다시 어린 시절로……50
상이군인이 많았던 어린 시절……51
모윤숙 씨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51
그 많은 상처 속에서도……57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나……58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들……58
나의 엄마……59
엄마는 음치……60
우리 엄마의 영어 실력……62
긍정적인 사상……62
엄마와 나는 자매 같다네……63
엄마의 틀니……64
2006년 10월 29일 – 엄마의 마지막 날……65
나의 외조부모님들에 대해서……67
엄마는 외동딸……68
남자아이로 둔갑하신 엄마……70
외조부모의 외동딸 혼사 준비……71
부모님의 뜻대로……72
상반되는 부모님의 결혼 - 모든 결혼은 그러한가? 73
귀한 공주님이 허드레 일꾼으로 전락하다……73
나의 아버지……74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 주신 인생철학……76
남편과 옥천 방문……77

셋째 마당 이야기……79

첫 번째 직장 – 타자기를 만나다……80
나에게 학생들은 이방인……83
첫 번째 점이 나타나다……84
올빼미, 나의 올빼미……84
지금 선생님이 안 계셔……85
우리의 한평생 우정이 그렇게 시작되다……85
미 8군 타자수 모집……86
또 낙방……88
올빼미의 제안으로 <캠프 험프리스>엘 가다……89
또 하나의 시험……90
타자 시험 합격!……90
필기시험 합격!……91
구두시험 – 영국인 인사청장……91
기다리는 시간……92
또다시 평택으로……93
빈자리가 있긴 한데……94
두 번째 직업 – 웨이트리스……95
또 다른 세계를 만나다……95
담배 연기 속의 일……95
사고 – 좋은 일에는 나쁜 일이 따라온다더니……96
일 시작한 지 꼭 한 달 되던 날……97
전화위복……99
보고서 작성……100
내일 아침 9시까지 오시오……102
또 하나의 새로운 문이 열리다……102
나의 세 번째 직장 - 장교 클럽의 여비서……103
두 개의 별명 – 베이비와 전화번호부……103
승진 위에 또 승진……106
말 많은 사람들……108
나타난 쫄병……109
펜 프랜드……113
만나자고 하는 펜팔……113
결혼하기 일 년 전에 일어난 슬픈 일……115
새로 부임해 온 커스토디언……116
한국인들은 모두 도둑놈……116
허락받은 도둑놈……118
프러포즈인가?……120
결근……121
나는 냉혈 인간인가?……122
또 한 단계의 승진……123
처음 만난 이성……124
다시 찾아온 그 고등학생……126
14살에서 19살까지……127
나는 부모님의 불량품일까?……128
아버지께 용돈 드리기……128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129
아버지의 죽음……131
꿈속에서의 아버지 이야기……132
결혼은 안 해!……133
우리 아버지의 계획……133
회색의 새……135
올빼미의 상경 명령……135
올빼미가 버스표를 바꾸다……137
그날은 석가 탄신일이었다……138
낚싯밥을 덜컥 문 나는 맹꽁이……139
그를 찾아간 운명의 그날……140
절세가인이 아닌 절세 미남……142
평화스러운 옥수수밭……142
가면 안 된다고 그가 만류하다……143
미스 한을 데려다줘라……144
궤도를 벗어났던 하루……144
우리 식구들과의 만남……145
괴상한 청혼과 주일 뉴질랜드 대사님의 편지……146
엄마가 좋다고 하셨다……147
주황색 독일 차 – 폭스바겐……147
다이아몬드 반지……148
휴가 허락……149
동해안을 따라서 속초로……150
임신이래……152
1971년 12월 2일 – 결혼식……153
‘아부지 나 결혼했다. 이제 됐어?’……154
마약범!……155
돌아가야 해……156

넷째 마당 이야기……159

내가 사랑했던 한국을 뒤로하고……160
비행기……161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다……161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도착……162
시댁에 도착하다……163
드론보다 더 겁나는 샌드플라이 공격……164
바위 틈새의 굴 – 나의 식량이 되다……166
결혼 이후 천천히 깔려 오는 안개……167
시간이 흘러 시어머님 댁을 떠날 때가 되다……168
남쪽으로 남쪽으로……169
Hello George!……169
거대한 여객선 – 인터 아일랜드호……171
한국의 동해안과 비슷한 픽턴에서 넬슨까지……172
모투에카에 도착하다……173
리와카로 이사하다……174
남편이 산 첫 번째 우리 집……176
뉴질랜드 남섬에서의 겨울……177
남편의 딜레마……178
1972년 크리스마스 파티……179
큰아들 사이몬(Simon)의 탄생……182
아이들을 싫어했던 나……183
내 몸이 만들어 낸 기적……184
도움의 손길 - 플랑켓 너스……186
유모차를 끌고 극장엘 가다……187
기이한 방법으로 기어다니는 아기……187
어머, 저 꼬마 좀 봐……189
단어 배우기……189
큰아들의 초등학교 생활 시작……189
큰아이 9개월 때 난 또 둘째를 임신하다……191
리틀 황제의 탄생 – 둘째 아들(Anton)……191
황달 – 둘째의 힘든 시작……192
이번엔 딸이겠지 – 우리 집 막내(Rex)……195
자궁 탈출증……196
또 아들이네……196
2미터밖에 못 보는 막내……197
신발 닦기……198
아들 셋 하고 산책을 나가면……199
남편의 대장암 선고……201
그날 남편은 큰 병원으로 이송되다……203
피아노와 그림……204
Summer Art School……205
팔려 나간 나의 명작……205
아이들과의 게임들……206
위험한 점프……209
위험한 엄마……211
튜발 라이게이션 수술……212
무척이나 슬펐던 ‘자궁 적출 수술’……212
정신병원 입원 직전에 풀려나다……212
결혼생활은 너무나도 어려워……215
망가져 버린 행복의 분수……219

다섯째 마당 이야기……221

새로운 일……222
흙을 뚫고 나오는 작은 생명의 기쁨……223
엄마가 뉴질랜드로 오셨다……224
그렇게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엄마였는데……226
이번엔 오빠가 왔다……227
누구든 해서는 안 될 행동……229
“넌 한 번도 날 사랑한 적이 없지? 내 돈을 보고 결혼한 거잖아!”……231
뉴질랜드 달러로 4,000불을 빌려 간 오빠……232
오빠와 관련된 에피소드 한 가지 더……233
도둑으로 몰리다……233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고파 올빼미에게 가다……235
골든 베이로 이사를 하다……237
보스카와 싹스……239
코스모스와 싹스……242
목숨을 잃는 고래들……245
나의 차례……246
죽음이 나를 기다리던 날……246
물속에서의 죽음으로의 여행……248
그물로 건져 올린 구조……249
중국 정부의 뉴질랜드식 옥외목장 설립 기획……252
중국어 수업을 받다……253
환영 파티……254
마오타이주의 위력……256
탁구공 만한 바퀴벌레……257
2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치안지앙시범목장……258
중국은 거대한 대륙……259
아이들의 통신 교육 - 홈스쿨링……262
공산주의 사회의 면모……264
영혼을 빼앗아 가는 사진기……266
일자리 옮김……267
산시성의 모래 폭풍……268
아이들의 전쟁놀이……271
야외 이동공연단……272
동나무 심기……273
24시간 감시하는 공안주……275
레위 알리 씨와 우리 집 막내……279
내면에서의 메시지……281
1984년 8월 – 중국을 떠나오다……282
미국 여행……283
Have a Good Day!……285
1984년 10월 뉴질랜드로 돌아오다……286
1984년 또 하나의 수술……287
무슨 일이 있었어? - 의사 선생님의 의문……288
새로 생긴 나의 엄마들……288
남편의 일본인 애인……291
나의 남편은 왜 밖으로만 나돌까?……292
이중성격의 소유자인가?……293
약속을 어긴 남편……294
금이 간 우리의 결혼이라는 항아리……295
악몽들……296
1985년 12월에 내린 결정……297
남편이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298
거주지를 웰링턴으로 옮기다……298
이번에도 남편이 나를 따라오다……299

여섯째 마당 이야기……301

네 번째의 직장 – 은행 외환과……302
1986년 6월 대만 친구를 만나다……304
운전사와 요리사……305
다섯 번째 직장(Micrographic Wellington Limited) Receptionist……306
연봉 $19,000에서 $29,000로……306
내 인생의 꽃을 다시 피우기 시작하다……308
사장님이 준비해 주신 생일 파티……309
세 번째의 점(點) – 사장님……310
뉴질랜드 주재 일본대사관에서 걸려 온 전화……311
가슴 아픈 증거물이 나오다……311
자동차 사고……313
일본어 장학생 여행……314
법정에 서다……317
호사다마 - 좋은 일엔 나쁜 일이 뒤따른다……319
어마어마한 퇴직금을 받고 퇴사하다……320
내가 언제 너의 상사였어?……320
여섯 번째 직업 – Operational Manager - 운영 관리자……321
정확한 사실만 이야기하라……322
또 감직……323
또 나를 따라온 남편……324
가족상담소가 내려준 최종 답안……325
이혼 – 1989년 9월 1일……326
또 하나의 교훈……328
모터바이크 사고……328
마지막 이력서 – 29번째……330
4번째의 점(點) – 더불 엠(MM)……331
100명의 이름을 적어 오라……333
하면 안 되는 3가지 일……334
부의 문이 열리다……336
결국은 보험판매원으로 첫발을 내딛다……337
하면 된다……337
일곱 번째의 직업-파이낸셜 어드바이저……337
충격을 준 그 ‘재정 구원’이라는 직책의 이름……337
준비해 둔 동아줄……338
보험 판매 업무의 시작……339
벽돌 크기 만한 휴대 전화기……341
125메가바이트 노트북……342
5개년 재무계획과 박정희 대통령……343
5개년 재무계획서의 세부 명세……345
계획이 없으면 성취도 없다……346
43세……347
마음 수련……348
Financial Planning 세미나에 등록하다……349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350
드디어 첫 클라이언트가 나타나다……351
7월 1일 밤……351
첫 번의 결과……354

일곱째 마당 이야기……357

부동산의 문이 열리다……358
집요한 그의 추적……362
융자 가능……363
Deposit(착수금)은?……364
동아줄 은인 – YL(Yueh-li Chang) – 나의 두 번째 점(點)……365
부동산 사업에 첫발을 내딛다……366
책임감 없는 젊은 세입자들……367
부동산을 한 해에 한 채씩 사들이다……368
파이낸셜 어드바이즈로 일하면서 배운 것들……368
집 한 채는 나무 한 그루……370
대전 EXPO’93……372
대전 EXPO’93 관리자로 파견되다……374
뉴질랜드 전시관의 홍수……378
감기와 페니실린 부작용……378
뚱뚱보로 변모……380
나의 천국 – 3D 스크린 영화관……381
1993년 12월 통역사로……382
텐텐(10 : 10)의 나날……385
이름을 사는 동료들……386
전화번호부 = 나의 파트너……387
작전 변경……387
어딜 가나 앉으면 꾸벅꾸벅 졸았던 그 시절……388
Cold Call로 만난 영국 노인……389
1995년 5월 프리랜서가 되다……391
또 한 분의 은인을 만나다 – 더블 엘(LL : Philip Love)……392
동양인 세일즈우먼에 관한 신문 기사……394
웰링턴 이브닝 포스트에 오른 나와 내 사무실 모습……395
계획에도 없었던 부동산 전문가……396
비교되는 두 가정……396
특이한 목소리……398
뉴질랜드 전역 Top 10 브로커가 되다……398
백만 달러 원탁회의에 초대되다……401
큰아들의 결혼……402
할머니가 되다……406
2005년 9월 손자 탄생……407
브릿지 게임 레슨을 받기 시작하다……408
2010년 조용필 씨의 노래에 반하다……410
2012년 우리 집 둘째 리틀 황제의 결혼……413
사무실 문을 닫다……414
글쓰기 공부를 시작하다……415
갑상샘이 고장나다……416
자서전 쓰기를 다시 시작하다……420
또 이상한 일이……422
문제는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였다……424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424
올빼미의 소원……424
또 배움의 발작 - 우클렐레 시작……426

에필로그……428

마지막 커튼을 내리면서……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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