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고대 페르시아 예언자의 이름을 딴 인간 '차라투스트라'가 초인이 되어 가는 과정을 서술한 '니체'의 작품을 풀어쓴 책. 연구공간 '수유+ 너머'의 청소년학교에서 니체를 강의한 지은이가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는 해설을 제시했다. 청소년에게 왜 철학이 필요한지, 니체 철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안내하는 책이다.
출판사 리뷰
미래를 창조하는 '초인'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니체의 유쾌한 철학
‘초인’, ‘영원회귀’, ‘권력의지’, 니체 철학의 삼대 키워드이다. ‘초인’이 본령이며, 나머지 두 낱말은 초인으로 수렴한다. 초인은 슈퍼맨 같은 초능력소유자도 아니고, 외부에서 도래하는 자도 아니다. 인간은 본디 끊임없이 자신을 고양시키고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런 삶의 가혹함 앞에서 허무주의에 굴복하거나 내세의 구원에 기대지 않은 채,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실험하고 고양시키려는 의지(권력의지)를 벼리면서 만들어가는 미래의 ‘번갯불’이 초인이다. 먹구름 속에서 익어 가는 번갯불처럼 우리 모두는 내부에 초인을 잉태하고 있는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그럼 내 안의 초인을 어떻게 일깨울지 궁금하지 않은가. "절망도 하지 않은 채, 희망도 품지 않은 채",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따라가며 삶의 비밀을 향해 돌진해 보자.
니체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독특한 철학서이다. 개념의 말잔치를 방불케 하는 난해한 서술이 아니라, 고대 페르시아 예언자의 이름을 딴 인간 차라투스트라가 초인이 되어 가는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서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처에 깔려 있는 은유와 역설, 오늘날 독자에게 낯선 잠언의 숲길을 잘 헤쳐 나간다는 건 니체 자신도 장담하지 않았다. 니체는 글은 피로 써야 하고,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니체는 자신의 글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리라는 것도 예견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노련한 안내자가 있다. 니체를 통해 공부와 삶의 새로운 지평을 경험한 제2의 차라투스트라, 제2의 니체가 안내를 자청한 것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청소년학교에서 청소년에게 왜 철학이 필요한지, 니체 철학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니체를 만나면 인생이 얼마나 행복해지는지를 '설파'했으며, 이제 그 지혜를 더 많은 청소년과 나누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천 길 고원에서 들려오는 깊은 울림 같은 니체의 글만큼이나 유려하고 강렬한 『차라투스트라』해설서와 접속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존재의 실존적 문제, 삶의 문제, 진리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의 힘을 제공한다. 하지만 니체 이전의 철학들이 관념적 논쟁에 빠져 무엇보다 삶의 문제를 저버렸다면, 니체는 삶을 살리는 데 진리를 바쳤다. 그렇게 니체가 탐구한 삶의 본질에는 고통스러운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인간은 이런 삶의 숙명 앞에서 좌절하거나 타협하거나 안주하기 쉽다. 당시 19세기 독일의 상황이 이러했다. 만연한 허무주의, 여전한 신의 건재, 새로운 우상인 국가의 출현. 이에 니체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망치를 든 삶의 사랑법’, ‘삶의 지혜(생철학)’를 선사한다. 그리하여 누구도 함부로 오를 수 없는 높은 산 동굴에서 10년간 '지혜의 모험'을 마치고 하산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차라투스트라』의 핵심 주제가 차라투스트라의 이 첫 외침 속에 담겨 있다. 인간의 운명은 초인이 되는 것! "인간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넘어섰다고 해서,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극복했다고 해서 초인이 인간과 완전히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인간이지만 그 인간과는 본성을 달리하는 새로운 인간의 존재 방식, 이것이 초인이다." --- p.30
하지만 하산한 차라투스트라가 맨 처음 발을 디딘 '얼룩소' 마을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되려 극복을 경쟁에 의한 타인의 넘어서기로 오해했다. 극복은 '자신의 극복'이다. 자신을 극복하는 것은 예전의 나를 철저하게 경멸하는 '위대한 경멸'을 통해야만 한다. 본디 경멸은 삶을 파괴하는 대단히 위험한 감정이자 행동이지만, 니체는 이 단어를 역설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 삶이 힘겹고 타인과의 관계가 꼬일 때는 자신을 고정시킨 채 외부를 자신에게 뜯어맞추려 할 때이다. 여기에서 탈출하는 길은 "다른 것을 경험하고, 다른 것을 느끼고, 다른 것을 사유할 수" 있도록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것이다. "초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변신의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기도 하다." --- p.54
"생각해 보라. 수많은 존재로 변신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이 얼마나 클지. 내가 매일 위대해질 수 있다면 굳이 남의 재능을 시기하고 미워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죽음은 완성을 가져오고, 초인이라는 미래를 낳는다." --- p.55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차근차근 초인이 되는 길을 설파해 간다. 근대라는 인간의 시대를 거친 뒤에도 살아남은 신을 극복하고, '난쟁이'로 화한 중력의 악령(도덕, 기성의 가치들)도 떨쳐내고, 국가라는 새로운 우상의 실체도 파악했건만. 감지했듯 역시 초인이 되는 길은 만만치 않다. 마지막에 "정말 엄청난 내공의 예언자가 나타난다."
"그래. 나도 용기를 내어 이것저것 시도해 봤지. 그런데 '모든 노고는 부질없는 것'이었어.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우리는 실패하고 말았어. 그러니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어. '모든 것은 한결같다.'" --- p.177
예언자는 다름 아닌 '허무주의'를 유포하는 자다. "해 봐야 소용없을걸." 예언자의 이 말에 차라투스트라는 사흘 동안이나 마지시도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한 채 말조차 잊었다. 며칠을 앓고 난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에게 이렇게 외친다. "아니다, 아니다, 세 번을 말하지만 아니다!"
무엇이 아니란 걸까? 사실 우리들 주변엔 허무주의와 그 변종들이 허다하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허무주의자"인 것이 당연할 정도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지금까지 잘못 배웠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허무주의는 약자들의 정신적 소화 불량이다." 배우기는 했지만 서툴렀고, "가장 좋은 것은 아예 배우지도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배워야 한다. 배우는 법조차 배워야 한다. 원래 "높은 종에 속하면 속할수록 성공하는 경우가 그만큼 드물다." … 실패했다고 절망할 이유는 없다. 용기를 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절반만 성공했다고 뭐가 그리 놀랄 일일까? '그대들 내부에서 인류의 미래가 밀치락달치락 몸부림치고 있지 않은가?'" --- p.179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웃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웃는 법을 배워야겠다. … 우리의 미래는 가능성들로 충만하다. 우리는 새롭게 창조할 게 너무나 많다. 그러니 실패했다고 찡그리지 말고 활짝 웃어라. … 우리에게는 가야 할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인류는 지금 엄청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창조하는 실험, 그것도 인류 자신이 인류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 우리가 초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실험을 통해 우리의 완전한 상속자가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실패와 절망 속에서 웃는 법을 배울 때에만 초인을 잉태한 조짐이 느껴질 것이다." --- p.180
자, 이제 "철학자이자 생리학자,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니체가, 거의 모든 부류의 세상 사람들을 만나고, 거의 모든 도덕을 경험한 차라투스트라가 알려주는 삶을 사랑하는 법, 삶을 긍정하는 법,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법을 들어보자.
인간은 자기를 극복하려는 존재라고 했다. 극복하려는 의지가 바로 생명체 고유의 본성인 '권력의지'다. 돈, 명예, 지위를 욕구하는 의지가 절대 아니다. "니체의 권력은 오히려 "능력"과 비슷한 말이다. … 즉 내가 타고날 때부터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은 뭘까? 바로 사유와 신체의 능력이다. 사유 능력의 고양이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를 터득하면 터득할수록 신체도 더 고귀해진다. … 니체가 말하는 '권력의지'는 이렇게 더 지혜로워지고, 더 고귀한 신체를 갖출 수 있도록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뜻한다." --- p.186
생명체가 가진 권력의지의 본성이 이러하다 보니, 그것은 늘 '위험'을 동반한다. 그러니 자기를 극복하려는 존재는 위험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가치의 전도'를 감행한 니체가 말하는 위험은 물리력으로 가해지는 외부의 폭력이 아니다. 나에게 닥친 시험, 시련 같은 것이리라. 인간의 이성을 예찬한 근대적 신체는 세계의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예측하고 포착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졌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실상은 눈 뜨고 일어날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세상사와 인생사에 난무한 것이 위험이고 우연이다. 천 개의 우연이 춤추는 위험한 대지! 이 우연과 이 대지를 사랑하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차라투스트라에게서 지혜를 배우고 용기를 축적해 왔다. 실패에서 그 덕목을 배우는 법도 배웠다. 웃는 법과 춤추는 법도 배웠다. 그런 우리의 용감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영원한 의지"가 덫 놓은 합리성, 목적성이라는 구름이다. 이 구름을 걷어내고 나면 "뜻밖에."라는 청명한 하늘이 나타난다.
"모든 것에 있어서 가능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으니, 합리성이라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가르침으로써, 나는 저 영원한 의지라는 것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유분방함과 어리석음을 앉혀 놓았던 것이다. 얼마간의 이성, 별과 별 사이에 뿌려진 지혜의 씨앗, 이러한 효모는 모든 사물에 섞여 있다. 어리석음을 위해 지혜가 만물 속에 섞여 있는 것이다! 얼마간의 지혜,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일체의 사물에게서 저들 사물들은 차라리 우연이라는 발로 춤을 추려 한다는, 저 행복한 확신을 발견했다. … 내게 있어서 너는 신성한 우연이라는 것이 춤을 추는 무도장이며 신성한 주사위와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자를 위한 신의 탁자라는 것이다.(해 뜨기 전에)
우연이 춤추는 "신들의 도박대"인 이 대지에서 벌이는 주사위 놀이가 즐겁기만 할까? 항상 내가 이긴다는 보장도 없는데. "주사위를 던지는 것도 어렵고,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다."바로 이때 요구되는 것이 어린아이의 정신이다.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막의 열기를 묵묵히 견디어 걸어가는 "낙타의 강인함"을 넘어, 인내와 복종을 요구하는 용과 일전을 벌일 수 있는 사자의 용기도 넘어, 매번 그 놀이를 즐기는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거듭나야 한다."아이들이 가장 못 하는 게 삶에 대한 부정이고 증오다. 그렇게 아이처럼 놀이할 수 있어야 즐거운 놀이가 된다." --- p.218
이렇게 춤을 추고 날아갈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연을 신성하게 받아들일 때 삶은 중력의 장에서 벗어나고, 우리 앞에는 천 개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제 우리는 "탐색의 기쁨"을 맘껏 누리면 된다. 누구도 나의 길을 대신 가 줄 수 없으므로 길 위에서 시도하고 물음으로써 삶의 비밀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한가. 이것이 삶인데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지 않고 견디겠는가. 이것이 운명인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고 견디겠는가. 이것이 삶인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삶은 원래 힘든 것이다. 그러나 힘든 만큼 모험하고 탐색하는 기쁨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삶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는 도덕이라는 중력의 악령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길을 가도록 허락하지 않으니 중력의 악령이 올라탄 우리들의 삶이 힘겹고 고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삶이 힘겹다고 한탄하면 그런 게 바로 삶이라고 중력의 악령은 조롱에 찬 얼굴로 말해줄 것이다.
p126
삶이 꼭 이런 식으로 되어 가야 하는가, 삶이 좀 지루해지고 엉성해지고 있지 않은가, 삶이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힌다면 그때가 바로 삶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되짚어 보고 바꾸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증거다. 삶이 보내는 이 신호를 무시하면 언젠가는 삶이 우리를 가혹하게 대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삶을 진단하고 삶의 건강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니체를 통과해 가는 길이 가장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결코 지름길은 아니다. 니체는 지름길을 싫어했다. 쉬운 길이라고, 빠른 길이라고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 지름길을 통해 삶의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니체를 통과하는 길이 비록 빠르지는 않아도 더 건강해지고 더 고상해지고 더 심오해지는 길이라는 사실은 보장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니체가 갖는 의미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삶을 즐겁고 심오하게 살고자 한다면 니체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
작가 소개
저자 : 프리드리히 니체
1844년 10월 15일 독일 작센 주 라이프치히 근교의 농촌 마을 뢰켄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 빌헬름 루드비히 니체는 루터교 목사이자 전직 교사였고, 어머니 프란치스카 올레르 또한 목사 집안 출신의 여성이었다. 니체가 독실한 종교적 분위기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면서도 철학사에서 가장 호되게 기독교를 비판한 철학자가 된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1850년에 소년시민학교에 입학했지만 단조로운 학과 내용에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고 칸디다텐 베버 사립학교에 들어갔다. 1856년에 슐포르타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본격적인 인문계 교육을 받았다. 1864년 니체는 본 대학에 들어가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하다가 이듬해에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 문헌학 공부를 계속했다. 쇼펜하우어에 감명을 받은 니체는 철학자로서의 삶을 자신이 살아갈 길로 방향을 정했다. 1869년, 25세의 청년 니체는 스위스 바젤 대학의 문헌학 교수가 되어 강의와 연구에 전념하는 한편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1873년부터 <반시대적 고찰>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등을 집필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35세에 교수직을 사임했다. 1982년, 루 살로메를 만나 두 번 청혼을 했으나 거절을 당한 뒤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 쓰는 일에 몰두, 최대의 역작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했다. 1889년, 정신착란에 의한 발작으로 쓰러져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어떤 처방도 효험이 없어 니체는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존재가 되고 말았다. 1893년부터는 사람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으며, 육체적 기능도 약화되어 더 이상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1897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누이동생 엘리자베트와 함께 바이마르로 이주했다. 1900년 8월 25일 정오, 니체는 바이마르의 자택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고 고향인 뢰켄에 안장되었다.
저자 : 이수영
인문팩토리길 연구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철학 공부 쪽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고, 연구자들의 학문공동체였던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오랫동안 공부했다. 삶과 공부의 여러 스승들을 거쳐 자그마한 인문학연구소인 인문팩토리길에서 독립의 실험을 거치고 있다. 현재 여성자활공동체인 W-ing에서, 소외된 여성들과 밥도 같이 먹고 등산도 함께하면서 인문학을 강의 중이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과 복지, 자활과 쉼터, 현장과 인문학 등 함께-살기의 가능성을 위한 여러 개념들에 대해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섹슈얼리티와 광기》(2008), 《미래를 창조하는 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009), 《권력이란 무엇인가》(2009), 《명랑철학-니체를 읽는 아홉 가지 키워드》(2011)가 있다.
목차
머리말 _ 니체 한번 만나 보실래요?
프롤로그 _ 망치를 들고 하는 변신의 철학
1 차라투스트라, 초인을 설파하다
인간과 초인의 차이
인간 극복의 방법
정신의 세 단계 변화
2 신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
신의 발명자들
국가라는 새로운 우상
숭배를 금지하라
3 인간의 도덕을 전복하라
평등보다는 차이를
이웃 사랑보다는 자기 사랑을
노예의 도덕에서 주인의 도덕으로
4 위험에 빠진 차라투스트라를 구하라
추악한 인간들에 대한 역겨움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원한
허무주의의 환멸
5 운명을 사랑하는 법
보존의지에서 권력의지로
삶을 긍정하라
신성한 우연
에필로그 _ 새로운 가치를 발명하고 삶을 긍정한 철학자,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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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원목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외우고 싶은 명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