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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사기 1~9 세트 (전9권)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 부모님 |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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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오랜 연구 끝에 펴낸 <사기> 완역본이다. 본문뿐 아니라 대표주석서 3권까지 함께 번역한 기념비적인 책으로, 총 40여 권이 출간되는 대형 프로젝트다. 1권 오제본기, 2권 하본기, 3권 은본기와 주본기, 4권 진본기, 5권 진시황본기, 6권 항우본기, 7권 고조본기, 8권 여태후본기와 효문본기, 9권 효경본기와 효무본기로 구성되었다.

  출판사 리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오랜 연구 끝에 펴낸 《사기》 완역본이다. 본문뿐 아니라 대표주석서 3권까지 함께 번역한 기념비적인 책이다. 새로운 관점의 주석까지 추가하여 우리의 시각으로 중국사를 볼 때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지 실감하게 하는 책이다. 총 40여 권이 출간될 예정이며, 현재 본기 세트 9권이 출간되었다.
1권 오제본기, 2권 하본기, 3권 은본기와 주본기, 4권 진본기, 5권 진시황본기, 6권 항우본기, 7권 고조본기, 8권 여태후본기와 효문본기, 9권 효경본기와 효무본기로 구성되었다.

우리의 시각으로 시대의 고전을 다시 읽는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세계 최초로 삼가주석 번역은 물론
새로운 관점의 주석까지 추가한 《신주사기》 출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사마천의 《사기》 본기 12권과 이에 주석을 단 대표 주석서 《집해》, 《색은》, 《정의》를 번역한 새로운 사기를 출간했다. 《신주사기》 9권이 그것.
사마천의 《사기》는 〈세가〉나 〈열전〉의 일부 장면들이 널리 알려지면서 재미있는 책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제대로 알려고 하면 방대하고도 난해한 역사서다. 예로부터 《사기》를 풀이한 수많은 주석서들이 난무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수십 종의 주석서 중 대표적인 주석서가 남조 송나라 배인(裵?)의 《집해(集解)》와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색은(索隱)》,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정의(正義)》를 꼽는데 이를 삼가주석(三家注釋)이라고 한다. 삼가주석을 보지 않고 《사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삼가주석은 본문보다 방대하고 동양 고대 사상과 제도, 관습 등에 해박해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인데, 때로는 사마천의 본문과 충돌하기도 한다. 그래서 삼가주석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사기 연구의 길이기도 하다.
그간 일본 명치서원(明治書院)에서 1973년부터 《신역한문대계(新譯漢文大系)》의 하나로 《사기(史記:전 15권)》를 간행한 것이 중국어권 이외의 나라에서 수행했던 가장 방대한 사기 편찬사업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사기》도 삼가주석 전체를 완역하지는 못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사기연구실에서 번역하고 신주를 단 《신주사기》는 중국어권 이외의 나라에서 처음으로 《사기》 본문과 삼가주석을 모두 번역하고 새로운 관점의 〈신주(新註)〉까지 달았다. 롯데장학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았는데, 이번에 간행된 본기만 9권이다. 〈지〉, 〈표〉, 〈세가〉, 〈열전〉까지 모두 간행되면 총 40권을 상회하는 방대한 프로젝트이다.

중국사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중국고대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난제는 중국사의 시작이 언제부터냐는 것이다. 이는 중국민족의 시작이 언제부터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중국민족은 유방이 세운 한나라를 따서 한족(漢族)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우(禹)임금의 하나라에서 ‘하(夏)’ 자를 따고 섬서성 화산에서 ‘화(華)’ 자를 따서 하화족(夏華族)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한족, 즉 하화족 역사의 시작이 언제부터냐는 것인데, 사마천은 황제(黃帝)부터 시작하는 〈오제본기〉로 중국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사마천의 이런 설정에 의문을 품은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오제 전에 삼황(三皇)이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색은》의 편찬자 사마정은 사마천이 삼황을 삭제한데 불만을 품고 복희, 신농, 여와씨를 수록한 〈삼황본기〉를 따로 편찬했을 정도로 사마천의 계보도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사마천은 오제의 시작을 황제로 설정했지만 서진(西晉)의 황보밀(皇甫謐:215~282)은 《제왕세기》에서 삼황도 수록하고 황제가 아니라 소호(少昊)를 오제의 첫 번째로 꼽았다. 사마천이 황제부터 중국사를 시작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사마천이 숨긴 역사, 사라진 동이족 군주들

그런데 사마정과 황보밀 등은 사마천이 삼황과 오제를 삭제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중국은 최근 산동성(山東省) 남부 임기(臨沂:린이)시에 거대한 동이문화박물관을 열었다. 여기에 4명의 동이족 군주를 전시해놨는데, 태호 복희씨, 소호 김천씨, 치우, 순임금이 그들이다. 삼황의 시작이 태호 복희씨이기 때문에 삼황부터 《사기》를 기술하면 한족의 중국사가 아니라 동이족의 중국사가 되기 때문에 삼황을 삭제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의 혈통에 대해 “헌원(황제)의 후예요 소호의 후손이다”라면서 “남가야 시조 김수로왕은 신라와 같은 성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 700만에 달하는 가락종친들이 모두 소호 김천씨의 후예라는 뜻이다.
이처럼 소호는 동이족임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사마천은 소호도 지웠다. 즉, 삼황의 시작이 태호 복희씨고, 오제의 시작이 소호 김천씨인데, 태호나 소호부터 시작하면 한족의 중국사가 아니라 동이족의 중국사가 되기에 사마천은 태호와 소호를 지우고 황제부터 시작하는 중국인의 《사기》를 작성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사마천은 동이족의 역사를 지우고 한족, 즉 하화족의 중국사를 서술했다. 얼핏 봐도 중국 남방사람들과 북방사람들의 생김새가 다름에도 모두 한족이라는 개념은 사마천의 《사기》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신주사기》는 때로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그 근거를 찾고, 때로는 고대의 여러 학자들은 물론 청나라 고증학파와 민국시대(民國時代:1912~1949) 고사변학파들의 주석까지 집중적으로 연구해 중국사의 계통을 바로잡으면서 동이족의 고대사를 복원해 냈다. 1권 오제본기의 ‘사마천이 설정한 오제 및 하은주 시조계보도(109쪽)’는 전 세계에서 최초로 작성한 계보도다. 이를 통해 ①황제, ②전욱, ③곡, ④요, ⑤순의 오제는 물론 하·은·주(夏殷周) 3대의 시조가 모두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직독직해한 《신주사기》

《신주사기》는 사마천이 쓴 본문과 삼가주석을 모두 번역하고 그 아래 원문을 수록했다. 또한 의역을 최대한 피하고 한 문장 한 문장 직독직해를 원칙으로 삼아 번역했다. 그래서 한자를 조금 아는 독자라면 원문과 대조하며 사기 원문을 읽는 지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단순한 중국사가 아니라 하화족의 역사 속에 숨겨진 동이족의 역사를 찾는 여정이야말로 현재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가 《신주사기》를 읽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권별 내용]

《신주사기》 제1권 오제본기
사마천은 왜 중국인들이 중국사의 시작으로 여기는 삼황을 지우고 오제부터 역사 기술을 시작했을까? 또 오제의 첫 임금인 소호를 지우고 그 부친 황제를 중국사의 시작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1권 신주(새로운 주석)를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사마천이 설정한 오제 및 하은주 시조 계보도’에도 오제는 물론 하·은·주의 시조가 모두 동이족으로 드러난다. 사마천이 감추고 싶었지만 가리지 못한 역사가 본문 및 삼가주석, 그리고 신주에서 밝혀진다.

《신주사기》 제2권 하본기
공자가 하·은·주 삼대를 이상사회로 크게 높였는데, 지금까지 중국인들은 이 시대를 이상사회로 여긴다. 그 첫 번째 국가에 대해 서술한 하본기는 하나라 시조 우(禹)임금부터 시작한다. 그 우의 출자 계통은 역대 중국학자들의 오랜 논쟁거리였는데, 사마천의 《사기》는 오제의 두 번째인 제전욱의 아들 곤의 아들로 서술한 반면 반고의 《한서》는 제전욱의 오대 후손 곤의 아들로 달리 말하고 있다.
《신주사기》 는 이런 역대사료를 모두 분석한 후 제전욱의 아버지 창의가 동이족 소호의 동복형제인 점을 들어서 우임금 역시 동이족임을 밝혀냈다. 우가 개척했다는 9주의 범위에 대해 현재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강역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후대에 크게 확대된 것이고 우공 9주의 범위는 지금의 산동성과 하남성 일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도 논증하고, 관련 지도를 제작해 게시했다.

《신주사기》 제3권 은본기·주본기
은나라가 동이족 국가라는 사실은 은나라를 연구하는 전 세계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사마천은 은나라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이 현조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고 설을 낳았다는 난생사화로 은본기를 시작했다.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난생사화는 동이족 건국사화이다. 간적은 제곡의 두 번째 비인데, 제곡은 동이족 소호의 손자다.
중국인들은 하남성 안양시에서 은허(殷墟) 유적이 발견되기 전까지 하·은(夏殷)을 실존했던 국가로 여기지 않았다. 은허가 발굴된 이후부터 은나라를 국가로 여겼는데, 이는 중국 국가사의 시작이 동이족임을 뜻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하나라를 실존 국가로 만들기 위한 국가 차원의 역사공정을 계속하는 이유는 은나라를 중국사의 시작으로 설정해서는 하화족의 중국사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본기도 마찬가지다. 사마천은 주나라가 동이족 국가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 스스로 주 시조 후직의 어머니 강원이 제곡의 첫 번째 비라는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주나라 또한 동이족의 국가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신주사기》는 그간 주나라를 서이(西夷)라고 부른 것은 은나라의 서쪽에 있었다는 뜻이며, 중국이라는 개념이 지금과 달리 주나라 수도 낙양과 그 북쪽 황하를 뜻하는 하락(河洛)이라는 작은 지역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신주사기》 제4권 진본기
제4권은 진본기다. 진의 선조는 제 전욱의 후예 여수인데, 제 전욱이 동이족임은 물론 여수가 현조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고 임신해서 대업을 낳았다는 난생사화라는 점에서 진나라는 동이족 국가이다. 그런데 진나라는 중원을 최초로 통일한 국가다. 실로 현 중국의 모체는 진의 중원통일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진시황의 중원통일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중국역사상 최대 사건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사기》 〈봉선서〉에 “진나라는 소호의 제사를 주관한다”라고 쓴 것처럼 진나라는 동이족 소호의 후예국가다. 《신주사기》 연구진들은 진시황(秦始皇)이 혜성처럼 나타나 중원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서기전 262년~서기전 260년에 진나라 60만 대군과 조나라 45만 대군이 맞붙은 장평지전에서 조나라 45만 군사가 전원 전사하면서 진나라가 승리한 것이 40여 년 후에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조나라 왕실은 진나라 왕실에서 갈라져 나은 같은 영성(?姓)의 국가였다는 점에서 장평지전은 형제국가들 간의 격전이었다. 진나라의 중원통일사 역시 동이족 국가 사이의 혈투의 결과였다.

《신주사기》 제5권 진시황본기
중원 사상 최초로 통일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의 자세한 일대기다.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한 후 스스로 태황(泰皇)의 황(皇) 자와 오제의 제(帝) 자를 합해 황제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불과 15년도 못 되어 망한 이유를 탐색한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후 불로장생을 추구하고, 유학자들을 묻어죽이는 분서갱유 등을 단행한 것이 조속한 멸망의 원인이라는 것이 사마천의 견해다. 《신주사기》 연구진들은 이 부분에서도 우리 관점의 해석을 중시한다. 진시황이 순행한 동쪽 끝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중요한데,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음을 논증하고, ‘진나라 영역’ 지도(89쪽)와 ‘진개 침입 이후 연장성과 행정구역’ 지도(103쪽)에서 진나라 만리장성 동쪽 끝과 연나라가 고조선 강역 일부를 빼앗고 설치한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표기했는데, 대부분 지금의 하북성 일대다. 이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사기연구실과 국토지리연구실 연구자들의 오랜 연구와 토론 끝에 작성한 지도다. 또한 진나라의 남쪽 강역도 지금의 절강성 북부까지만 차지했을 뿐 복건, 강서, 호남, 귀주, 운남성 등은 진나라의 영역이 아니었음도 밝혔다.

《신주사기》 제6권 항우본기
먼저 사마천이 사기본기를 쓴 순서를 주목해야 한다. 사마천의 편찬 권수로는 항우본기가 사기 제7권, 고조본기가 제8권이다. 중원패권을 두고 다투었던 한 고조 유방보다 항우를 앞에 내세웠다.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의 시각으로 볼 때 항우는 반역자였고, 그래서 반고는 《한서》에서 항우를 본기는커녕 일종의 반란자들의 사적인 〈진승 항적열전〉에 수록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항우를 한고조 유방보다 앞서 본기에 수록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마천이 항우를 크게 높인 것은 아니었다. 사마천은 “태사공은 말한다”라는 사평(史評)에서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군사를 잘못 움직인 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크게 비판했다. ‘옛날 일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패왕의 사업만을 말하면서 힘으로 천하를 정벌’하려다가 패했다면서 천명이 아니라 항우 자신의 잘못 때문에 패했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천명 자체는 거부하지 않았지만 그 천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시각이 유방과 항우의 홍문연(鴻門宴)에 대한 기술에 들어있다. 이때 항우가 유방의 목을 벴으면 중원의 패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함의였다. 항우의 왕사(王師) 범증(范增)이 “오호라! 어린아이와는 일을 도모할 수 없구나. 항왕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패공일 것이다.”라고 한탄한 말은 이래서 인용한 것이다.

《신주사기》 제7권 고조본기
객관적인 전력으로 따지면 중원패권에서 승리할 수 없었던 유방이 어떻게 모든 조건에서 유리한 항우를 꺾고 중원을 차지했을까? 사마천이 그리는 유방은 미천한 지위에 있지만 뜻은 큰 인물이었다. 항우는 초나라 명장 항연의 후손이지만 《사기색은》에서 유방의 “성(姓)이나 자(字)는 모두 정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출신조차 불분명했던 유방이 중원 패권을 장악한 것이다. 유방은 신분이 미천했기에 사마천이 만든 하화족 중국사의 계보를 완성시키는데 적당한 인물이었다.
사마천은 오제부터 시작해 하은주 삼대를 거쳐 진한(秦漢)에 이르는 하화족의 중국사를 서술했는데, 출자 자체가 불분명한 유방의 한나라를 종착점으로 삼으면 동이족의 중국사에서 탈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조본기를 통해 사마천은 항우처럼 혼자 우뚝한 제왕보다 본인은 부족하지만 명 참모들을 주위에 둘 줄 아는 제왕이 승리한다는 메시지도 던졌던 것이다. 천하는 제왕 혼자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현자들이 함께 통치한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유방은 중원을 차지한 후 자식과 동생들을 제후로 봉하고, 이성제후들을 제거하려 하면서 난관에 봉착한다. 특히 자신감이 넘쳐서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대패하는 장면은 자만에 대해서는 하늘이 징계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그래서 유방 사후 여후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신주사기》 제8권 여태후본기·효문본기
한고조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는 산동성 출신으로 여(呂)씨에 이름이 치(雉)였다. 유방은 자신 사후 유씨 천하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 백마를 죽여 대신들과 맹세하면서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공격해야 한다”고 맹세하게 했다. 그러나 유방은 여후의 계략에 빠져 한신과 팽월같은 공신들을 제거함으로써 유씨 왕실을 스스로 약하게 만들었다. 유방은 여후의 아들 유영 대신 척부인의 아들 여의를 후사로 삼으려 했으나 장량 등의 계책으로 실패하고 유영이 즉위했다. 그가 혜제인데 혜제 사후 여태후는 혜제의 후궁에서 출생한 여러 왕자들을 차례로 등극시키면서 여씨를 대거 등용해 유씨 왕실을 여씨 왕실처럼 만들었다. 여후는 유씨만을 후왕에 책봉하라는 유방의 유훈을 어기고 동생인 여산(呂産), 여록(呂祿) 등을 후왕으로 책봉했지만 여후가 죽자 곧 반격이 시작되어 여씨들은 대거 주멸되면서 여씨 정권은 무너지고 고조의 넷째아들 유항이 문제가 되었다.
문제는 여후가 여씨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을 치유하는데 적격인 제왕이었다. 그 뒤를 이은 경제(景帝)의 치세와 함께 ‘문경지치(文景之治)’로 불리는데, 사마천 역시 두 제왕을 성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마천이 바라던 제왕의 상이 문제와 경제에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여태후는 실제로 정권은 장악했지만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음에도 사마천이 〈여태후본기〉에 넣어서 서술한 것은 이름뿐만 아니라 실제로 황제 역할은 한 것을 인정한다는 뜻일 것이다.

《신주사기》 제9권 효경본기·효무본기
효경제는 인자한 군주였지만 조조(晁錯)의 삭번책으로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했다가 7국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본기〉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효경제의 아들 효무제 본기다. 그가 바로 사마천을 궁형에 처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무제는 제후들의 권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흉노·고조선·대원국 등을 정벌해 한나라 강역을 크게 확장시킨 중흥군주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무제를 아주 박하게 기술했다. 사마천은 “무제는 즉위 초에 더욱 공경하게 귀신의 제사를 받들었다.”라고 무제를 영생불사를 꿈꾸는 방사(方士) 군주처럼 그렸다.
무제의 가장 큰 우선정책이 ‘해중(海中)의 신선’을 찾는 것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한고조도 크게 곤욕을 겪었던 흉노를 정벌했으나 정작 〈효무본기〉에는 이에 대한 사항이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조선 정벌에 대해 “이듬해 조선을 정벌했다”라고 한마디로 묘사하고, 대원국(大宛國) 정벌에 대해서도, “이해에 서쪽 대원국을 정벌했다”라고 한 마디로 정리했으며, 나아가 “건장궁(建章宮)을 지었는데 헤아려보니 문이 1천 개이고 방이 1만 개였다”라고, 진시황 못지않게 거대한 역사(役使)를 좋아하는 군주로 묘사했다.
무제에 대한 이런 박한 기술은 그가 당한 궁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사마천은 황제로 시작해 삼대와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로 이어지는 하화족의 민족사를 서술하려는 자신에게 궁형을 가한 무제를 좋게 평가할 수가 없었다. 역사가가 아무리 중립성을 강조해도 역사 서술에 절대적 객관이나 중립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사마천
기원전 145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90년경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자(子)는 자장(子長)이며 섬서성 용문(龍門) 출신으로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한 무제 때 태사령(太史令)이었다.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와서 동중서(董仲舒)와 공안국(孔安國)에게 학문을 배웠다. 20세 때 여행을 시작하여 중국 전역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돌아온 후에는 낭중(郎中)에 올랐다.기원전 110년 아버지 사마담이 그에게 반드시 역사서를 집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108년 태사령이 되어 무제를 시종했으며 천제(天帝)에 제사 드리는 봉선(封禪)에 참여하고 역법을 개정했다. 부친의 유지를 받들고자 국가의 장서가 있는 석실 금궤(石室金櫃)에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했다. 기원전 104년 정식으로 『사기』 집필을 시작했다.기원전 99년 이릉(李陵)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사마천은 홀로 무제 앞에 나아가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옥에 갇힌 그에게 세 가지 형벌 중에 하나를 고를 권리가 주어졌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둘째 돈 50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할 것이었다. 사마천은 두 번째 방법을 취하고 싶어 했으나 귀족이 아니었던 그가 그런 거액을 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결국 마지막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기원전 93년 사마천은 마침내 다시 무제의 곁에 있게 되었다. 이때는 『사기』의 집필이 대체적으로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지 대략 20년 만이었다.

지은이 : 배인
자가 용구龍駒로서 남북조시대 남조 송(420~479)의 하동 문희(현 산서성 문희현) 출신이다. 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의 아들로서 《사기집해》 80권을 편찬했다.

지은이 : 사마정
자가 자정子正으로 당나라 하내(지금 하남성 심양) 출신인데 굉문관 학사를 역임했다. 사마천이 삼황을 삭제한 것을 문제로 여겨서 삼황본기를 추가했으며 위소, 두예, 초주 등 여러 주석자의 주석을 폭넓게 모으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사기색은》 30권을 편찬했다.

지은이 : 장수절
당나라의 저명한 학자로, 개원 24년(736) 《사기정의》 서문에 “30여 년 동안 학문을 섭렵했다”고 썼을 정도로 《사기》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편찬한 《사기정의》에는 특히 당나라 위왕 이태 등이 편찬한 《괄지지》를 폭넓게 인용한 것을 비롯해서 역사지리에 관한 내용이 풍부하다.

  목차

신주사기 1 오제본기
신주사기 2 하본기
신주사기 3 은본기·주본기
신주사기 4 진본기
신주사기 5 진시황본기
신주사기 6 항우본기
신주사기 7 고조본기
신주사기 8 여태후본기·효문본기
신주사기 9 효경본기·효무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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