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현대시세계 시인선 131권. 임경남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적 대상의 ‘시적 화자화’라 할 수 있다. 시적 대상을 피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심리적 거리를 시적 화자를 통해 농밀하게 보여준다. 임경남 시의 탁월함은 시적 대상을 직접 진술하거나 감상에 물들지 않고 대상을 객관화하여 섬세하고도 내밀하게 묘사한다는 점이다.
출판사 리뷰
‘나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발견한 ‘눈부신 경(經)’인 임경남의 첫 시집
2005년 『문학예술』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시단에 나온 임경남 시인이 16년 만에 첫 시집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를 출간했다.
임경남 시인의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는 ‘나’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발견한 “눈부신 경(經)”(「미술관 좌상들」)이다. 여행은 내 가치관뿐 아니라 내 주변 환경과 세계를 보는 관점을 이동시켜준다. 넓어진 시야를 바탕으로 주체적·객관적 사고로의 전환과 확장으로 주관에서 객관으로, 자아에서 타자로, 관념에서 실행으로 관점이 변화하는 것이다.
임경남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시인 임경남은 명사이고/ 시를 좋아하는 임경남은 동사”라고 했는데, 명사는 늘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동사는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움직인다. 명사가 식물이라면 동사는 동물인 셈이다. 명사는 한번 자리를 잡으면 그 바운더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정되어 점차 낡아간다. 반면 동사는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 집에 있을 때는 명사지만 외출하는 순간 임경남은 동사로 전환된다. 움직인다는 것은 다른 각도에서 나를 볼 뿐만 아니라 다른 ‘나’와 더 넓은 다른 세계를 직관한다는 것이다.
임경남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적 대상의 ‘시적 화자화’라 할 수 있다. 시적 대상을 피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심리적 거리를 시적 화자를 통해 농밀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시작법은 시적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감각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언어 표현 행위의 적절성과 깊은 관계”(오규원 『현대시작법』)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표제작 「금요일의 일기예보」의 시적 화자는 ‘나’이고, 시적 대상은 금요일이지만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노동은 목요일에 절정을 이루고 금요일 일과가 끝나면 이틀 간의 휴식이 주어진다. 그런 면에서 금요일은 “일주일의 꼭짓점”이다. 요일의 맨 꼭대기가 된다. “맑거나 맛있거나”는 “저녁 내내 불온해지고 싶은”, 틀에 매여 벗어나지 못한 내가 꿈꾸는 일탈이다. “흐리거나 비가” 오는 동쪽은 집처럼 한 곳에 묶여 고정화된 ‘나’, “맑거나 맛있”는 서쪽은 자유와 일탈의 감성이 충일한 ‘나’를 의미한다.
임경남 시의 탁월함은 시적 대상을 직접 진술하거나 감상에 물들지 않고 대상을 객관화하여 섬세하고도 내밀하게 묘사한다는 점이다. “이맘때쯤 뽑혀 나”간 엄마의 상실이나 “울음으로 살이 오르는 화장장”(이하 「완창」)에서 엄마가 “활활 타”올라도 좀체 흥분하지 않고 시적 역동성을 조용히 가동한다. 절제된 시적 문법으로, 겉으로 표출하지 않는 슬픔과 불안을 조용히 접어 기억의 서랍에 집어넣는다.
임경남 시인은 지금 “복숭아처럼 여린 발목”(「베란다 꽃밭」)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시작해 시의 변비로 고생하면서도 “군데군데 터지고 있는 생의 솔기”(「노루 발자국」)를 수선하는 재미에 폭 빠져 있다. 좀체 공간의 경계를 넘지 않는, “몸이 감옥인 사람”(이하 「안녕, 안녕」)에게 필요한 것은 “유목의 언어”이다. 유목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발상의 자유로움이 생명이다.
‘나’를 찾는 여행에서 자아와 타자의 교류를 저어한다. 시적 대상(사물)에 대한 관찰과 상상, 사유가 관념의 틀에 얽매이지 말고 공간의 자유를 획득해야 참된 ‘나’의 발견과 시의 여행에서 알찬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의도는 계획의 차원이지만 실제는 통일된 연관성과 객관적 거리, 시적 긴장감의 발현이다. 불안을 숨기면 불화가 보이고, 불화를 감추면 불안이 보인다. 닿을 수 없는 곳에 도달하려면 손에 잡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금요일의 일기예보
나는 맑거나 맛있거나
구름의 동쪽은 흐리거나 비가 온다
편서풍을 타고 온 너는
기압골을 빠져나와 두근거리는 내 귀에 닿는다
일주일의 꼭짓점은 금요일
저녁 내내 불온해지고 싶은 고기압의 날
네이비색 스커트 자락이 팔랑 뛰어오른다
창밖은 짱짱한 추위
오목한 너의 품으로 자진해버릴 것 같은 오늘의 예보
감정의 등압선이 너를 향해 부풀고
나비가 오는 토요일은 오지 않아도 좋아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
미술관 좌상들
미술관의 죽은 이마에 나비가 날아든다
산벚이 열두 폭의 병풍을 부풀리며 가는 동안
어디선가 봄의 행차가 들썩인다.
한 번도 전시회를 열지 못한 박수근의 사람들이
거친 질감의 화폭을 찢고 쏟아진다
마애불은 마지막 다이어트를 끝냈는지
무거운 바위 안에서 뛰쳐나오고
선글라스와 노랑머리와 핫팬츠 차림의 사람들이
차라리 눈부신 경(經)이다
꽃담을 지키던 돌장승들 모가지도 없이
구름의 신발로 따라나서는데
친구들 연인들 가족들 삼삼오오 걸어가는 입상들
돗자리를 펴고 벚꽃 아래 도시락을 먹는 좌상들
모두가 봄의 공범자,
미술관 밖을 뛰쳐나온 보물들이다
세한도를 빠져나온 소나무 한 그루
찻집 쪽으로 그림자를 기울이면
나는 잘 익은 그늘을 열고 천 년의 도록 속으로 들어간다
어느 시대의 유물인가
그때
접어둔 나비 한 마리 셀카 속으로 날아드는데
연어, 포장마차로 회귀하다
그가 행복하냐고 물었다
뜨거운 그 무엇이 전류처럼 확 달아오르고 있을 때
찬바람이 불면
레나강을 돌아나온 해류를 따라
아시아에서 북극해로 헤엄쳐가는
머나먼 여정
등지느러미에 물비늘 같은 꿈을 키워가며
어머니의 어머니가 일러준
모천회귀를 사는 것
어미의 강 어느 기슭에서
산고의 아픔으로 죽어가는 것보다
골목길 포장마차에다 바다를 훌쩍 옮겨와
찬 소주잔 기울이는 막막한 목구멍에
한 점 따뜻한 위안이 되는 거라
물비늘 추억이 산란하던 부근을
탁탁 튀어오르기도 하면서
작가 소개
지은이 : 임경남
1965년 경북 영덕 출생. 2005년 『문학예술』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인천문인협회 회원, 내항문학 회원으로 활동 중. 2021년 인천문화재단 2021 예술표현활동 지원사업에 선정. 2021년 자기계발서 『나 데리고 잘 사는 법』 임시원(필명)으로 출간.
목차
1부
간격 · 13
선사시대로 진입하다 · 14
뉴스 · 15
미술관 좌상들 · 16
금요일의 일기예보 · 18
연어골목 · 19
안녕, 안녕 · 20
니스를 나이스로 읽다 · 22
화분 · 23
요플레를 먹을 땐 턱받이가 필요해 · 24
서귀포에서 · 26
빈집 · 28
겨울밤 · 30
햄릿증후군 · 31
코닥의 재발견 · 32
2부
첫봄 · 35
손 없는 날 · 36
모창 · 38
종이꽃 · 40
벚나무에게서 배우다 · 41
진달래 실종사건 · 42
무정란 · 44
송곳니 · 46
후리덤을 아세요 · 48
능소화 흘러내리다 · 50
변비 · 52
야릇한 잠 · 53
아침의 스타카토 · 54
대숲 · 56
무허가 · 57
3부
베란다 꽃밭 · 61
불면 · 62
버드나무의 유적 · 63
서랍 · 64
농담의 온도 · 66
텃밭 이야기 · 68
노루 발자국 · 69
땅의 눈 · 70
음모 혹은 음모 · 71
호명 · 72
뒤란 · 74
V · 75
4월을 출력하지 마라 · 76
제습기 · 77
할머니의 하트 · 78
4부
콩돌 · 81
고서(古書) · 82
연어, 포장마차로 회귀하다 · 83
크리스마스 반딧불이 · 84
셔틀콕 · 85
불안 · 86
완창 · 87
이명(耳鳴) · 88
공갈젖꼭지 · 90
이별은 딱딱하다 · 92
구름부동산 · 94
소풍 · 95
귀 좀 빌려주세요 · 96
13월의 달력 · 98
실금이 자라나는 안락의자 · 99
해설 ‘간극’과 ‘사이’를 자극하는 식물성 불안 / 김정수 ·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