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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5 : 연산군·중종·인조
사대부들이 왕을 폐위시키는 군약신강의 시대
다산초당(다산북스) | 부모님 |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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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실록의 행간에 담긴 진실을 추적하는 대하역사서의 귀환. 연산군, 중종, 인조 대에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로 변모했다. 절대왕권을 꿈꾼 군주 연산군, 공신들과 사림 사이를 배회한 중종 모두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으며 조정은 신하들의 권력투쟁으로 날을 새웠다.

역사의 후퇴는 비단 500년 전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구체적인 아젠다를 세우고 실질적인 이슈를 해결하면서 역사의 발전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정치권 내의 제로섬 게임으로 역사의 후퇴를 반복하고 있는가? 오늘날 독자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출판사 리뷰

“조선 최초로 사대부들에게 폐위당한 연산군을 위한 변명”
실록의 행간에 담긴 진실을 추적하는 대하역사서의 귀환!


연산군은 정말 음란하고 백성들에게 폭정을 행사했기 때문에 폐위당했을까? 연산군의 황음무도함을 상징하는 흥청들은 엄연한 예술가들이었다. 또한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에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베풀며 위무했고, 궁궐 인근 집들을 철거할 때는 정당한 보상을 해주었다. 연산군은 절대왕권을 꿈꾸며 권력과 재산을 신하들과 나누지 않았기에 훈구와 사림 모두의 적이 되었다. 훈구파는 칼로 그를 죽였고 사림은 붓으로 두 번 죽였다. 반면 조광조를 등용한 현군으로 알려진 중종은 신하들의 권력투쟁에 말려들어 후궁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을 죽일 만큼 용렬한 인물이었다. 훈구와 사림 사이를 오가며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했고 정치적 업적도 거의 남기지 못했다. 연산군, 중종, 인종으로 이어지는 시대는 사대부들의 권력투쟁으로 점철되었고, 신권이 왕권을 능가하면서 조선을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로 변모시켰다.

《연산군일기》 가려 읽기
실록은 사실의 기술과 사관의 평으로 나누어진다. 이제까지 우리는 연산군을 희대의 폭군이자 황음무도한 군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반정이 일어나 폐위당한 것으로 말이다. 이러한 믿음의 근거지는 《연산군일기》였다. 실제로 《연산군일기》를 보자.

월산대군 이정의 승평부부인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사실은 승평부부인 박씨가 죽었다는 것이다.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는 것은 사람들의 말로서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왔다. 당시 사대부들의 부인이 남편과 동갑이거나 한두 살 많은 풍습과 비교해보면 사망 당시 승평부부인의 나이는 53~55세로 추정된다. 당시 이 나이의 여성이 잉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조선은 궁궐 담장 아래 100척 이내 집을 짓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이에 연산군은 민가 철거를 명했는데 먼저 당상관을 집 주인들에게 보내어 효유시켰다. 당상관은 정3품 통정대부, 무신은 정3품 절충장군 이상으로서 왕이 있는 건물에 올라서 국사를 논하는 고위직을 뜻한다. 이런 당상관을 먼저 보내 설득 작업에 나서게 한 것이다. 또한 철거 대상 주택을 4등급으로 나누어 면포를 지급하였고 봄이 되기를 기다려 작업을 하였다. 이를 볼 때 연산군을 폭군으로만 몰아가기에는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연산군이 폐위당한 것은 절대왕권을 꿈꾼 군주였기 때문이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당시 희생된 자들의 재산을 연산군은 신하들과 나누지 않았다. 이는 공신들과 재산 및 권력을 나누었던 세조나 성종과는 다른 조치였다. 연산군은 사대부들을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고 성리학으로 조선을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훈구 세력은 반정을 통해 연산군을 칼로 죽였고, 사림 세력은 실록에서 붓을 통해 연산군을 두 번 죽였다.
또한 연산군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혹이 있다. 연산군이 역질에 걸렸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1506년(중종 1) 10월 7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8일 연산군이 죽었다면서 언급된 날짜는 10월 6일이었다. 연산군이 병에 걸렸다고 보고받은 전날 연산군은 이미 죽었던 것이다. 자연사가 아니라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전염병인 역질에 걸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생활하던 나인이나 유배지를 지키던 군졸들이 전염되었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중종은 왜 후궁과 아들마저 죽였을까?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은 실권이 전혀 없었다. 반정 3대장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왕 위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힌 것은 반대 3대장들이 일찍 죽었다는 것이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을 등용했지만 중종과 사림은 지향점이 달랐다. 사림은 조선을 성리학적 태평성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중종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림 세력의 개혁은 한때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소격서를 폐지하고 현량과를 실시하면서 조정 내에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위훈 삭제 문제가 불거지면서 상황은 하룻밤 만에 변했다. 중종에게는 훈구와 사림 두 세력이 모두 필요했다. 그런데 사림이 훈구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자 태도를 돌변해 사림 세력을 단번에 조정에서 쫓아내고 죽였다. 또한 신하들의 권력투쟁에 휘말리면서 후궁 경빈 박씨와 아들인 복성군 이미까지 죽이는 상황에 내몰렸다. 훈구와 사림의 권력투쟁이 사라진 공백을 외척들이 채웠고 대윤과 소윤의 싸움으로 세자 이호의 자리까지 흔들렸다. 중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인종은 성군의 자질을 타고났으나 재위한 지 9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조선의 불행이었다.

정상적인 왕조 국가에서 이탈하는 군약신강의 시대
연산군, 중종, 인조 대에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로 변모했다. 절대왕권을 꿈꾼 군주 연산군, 공신들과 사림 사이를 배회한 중종 모두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으며 조정은 신하들의 권력투쟁으로 날을 새웠다. 조선이 정상적인 왕조 국가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이 시기는 역사가 후퇴한 시대라고 평가할 만하다. 역사의 후퇴는 비단 500년 전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구체적인 아젠다를 세우고 실질적인 이슈를 해결하면서 역사의 발전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정치권 내의 제로섬 게임으로 역사의 후퇴를 반복하고 있는가? 이 책은 오늘날 독자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이후인 재위 4년 8월 18일 서교(西郊)로 나가서 백성들이 농사짓는 것을 격려하고 돌아와서 연희궁(衍禧宮) 뒷산에서 시위하는 군사를 시켜 여우와 토끼를 사냥했다. 그달 8월 21일의 사냥 기사는 연산군 사냥의 성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왕이 동교(東郊)에서 농사를 구경하고 전곶(箭串)에 이르러 학익진(鶴翼陣)을 쳐서 짐승을 사냥하고, 화양정(華陽亭)에 머물러 승지, 사관 등에게 각기 절구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또 미륵동(彌勒洞)에 학익진을 치고 짐승을 사냥했고, 환궁할 때 길가의 농민들을 먹였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진을 쳤다가 적을 섬멸하는 군진을 뜻한다. 연산군에게 사냥은 군사훈련이었다. 또한 환궁 길에 길가의 백성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것처럼 그의 자리에서 사냥은 곡식을 해치는 짐승을 제거하고 직접 백성들을 만나서 음식을 제공하는 정사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미 문(文)은 숭상하지만 무(武)는 천시하는 숭문천무(崇文賤武) 의식에 젖은 사대부들은 군주에게 오직 유학만 강독할 것을 요청했다. 이는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연산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사냥과 군사훈련>중에서

연산군을 쫓아낸 사대부 집단이 만든 이미지가 연산군은 백성들에게도 폭군이었다는 것이다. 이들 유학자들이 작성한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에는 연산군이 백성들에게도 폭군이었다는 사례가 무수히 담겨 있다. 연산군이 ‘위를 능멸하는 풍조를 바로잡겠다’면서 공신들까지 주륙했는데 백성들에게는 어떠했겠느냐는 것이다. 연산군 5년(1499) 8월 14일 경연에서 시독관 정광필(鄭光弼)이 아뢰었다.
“들으니 서강변에 어떤 여인이 있는데, 그 주인이 쇠꼬챙이를 달구어 불로 지졌습니다. 겨우 죽지 않고 살아서 ‘주인이 낙형(烙刑, 불로 지지는 형벌)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형벌을 사용할 때는 비록 임금이라도 이렇게 참혹하게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아랫사람이겠습니까.”
연산군은 정광필을 칭찬했다.
“매우 참혹한 일이다. 만약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겠는가.”
… 승지 권주는 《경국대전》에 노비를 처벌했는데 죽음에 이르지 않은 경우에는 장을 칠 수밖에 없다고 보고했다. 문제는 이 장까지 돈으로 속(贖)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전교를 내렸다.
“이경은 속을 받지 말고 결장(決杖)하라.”
임금이 특별히 명령한 것이므로 나장들은 더욱 가혹하게 장을 쳤을 것이다. 이렇게 연산군은 자신의 여종을 불로 지진 이경을 국법의 한도 내에서 강하게 처벌했다.
-<백성들에게도 폭군이었나?> 중에서

조광조가 죽는 날 사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임금이 즉위한 뒤로는 대간이 사람의 죄를 논하여 혹 가혹하게 벌주려 하여도 임금은 반드시 평번(平反, 죄를 감해 줌)하였으며 임금의 뜻으로 죽인 자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대간도 조광조를 더 죄주자는 청을 하지 않았는데 문득 이런 분부를 하였으니, 시의(時議)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짐작해서 이렇게 분부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중종실록》 12월 16일)

사관은 중종의 이중 처신을 지적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중종의 성격이자 본질이었다. 기회주의가 중종의 속성이었다. 대간에서 죽이자고 청하면 완화하는 척해서 인자한 이미지를 만들다가 막상 자신의 의도에 조금만 어긋나면 잔인한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 사람 죽이기를 파리 목숨처럼 하는 인물이 중종이었다. 박영문, 신윤무를 죽인 것과 조광조를 죽인 것은 근본적으로 같았다. 모두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조광조가 죽은 것은 공신 집단을 해체하려 한 것과 백성들에게 중종 이상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간당으로 제거되는 사림>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이덕일
1961년생으로 충남 아산에서 자랐다.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사료에 대한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 대중과 호흡하는 집필가로서의 본능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문체로 한국사에서 숨겨져 있고 뒤틀려 있는 가장 비밀한 부분을 건드려왔다. 언제나 발표하는 저술마다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역사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왔다. 그는 모든 권위와 기득권을 거부하며 주류 학계에 편입되지 않고, 그들이 외면하거나 감히 드러내지 못하는 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하여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었다. 방송, 신문, 잡지의 기고 활동과 대중 강연 등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지식과 열정을 함께 나누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왕 독살 사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조선 왕을 말하다》, 《근대를 말하다》 등은 이러한 활동의 결과라 할 수 있다.그가 쓰는 《조선왕조실록》 역시 학습과 지식 전달 위주의 다이제스트에서 벗어나, 시대정신을 읽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진정한 역사서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10년간의 구상과 5년간의 집필이라는 그의 끈질긴 노력 덕에 전 세계 어느 국가도 갖지 못한 방대한 기록 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마침내 그 빛을 제대로 보게 됐다.

  목차

들어가는 말 《조선왕조실록》을 읽는다는 것
1부 연산군, 절대왕권을 꿈꾸었던 고독한 군주
◆ 《연산군일기》 가 만든 이미지
사관이 본 성종과 연산군
《연산군일기》의 편찬 원칙
수륙재를 둘러싼 충돌
◆ 생모 콤플렉스
축복받은 출생의 딜레마
연산군은 언제 폐비 윤씨에 대해 알았는가?
모후 추존
◆ 무오사화
성종의 국상과 겹친 공신 유자광의 모친상
유자광의 모친상에 대한 대간의 논박
비사를 상주하는 공신들
세조 집권을 부인한 사초들
옥사를 확대시킨 〈조의제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비난한 〈술주시〉
초토화되는 김종직의 제자들
◆ 무인 군주의 꿈과 갑자사화
사냥과 군사훈련
군사력 강화와 여진족 정벌 좌절
이세좌의 부인과 허침의 누이
태풍이 몰아치다
◆ 중종반정과 몰락하는 왕권
안에서 싹트는 모반 음모
사대부의 인심을 잃은 군주의 말로
두 달 만에 죽은 군주
◆ 연산군을 위한 변명
연산군이 예언한 《연산군일기》의 내용
백성들에게도 폭군이었나?
황음무도한 군주였나?

2부 중종, 공신들과 사림 사이를 배회한 군주
◆ 왕이 되는지도 모르고
쫓겨나는 진성대군 부인 신씨
무더기 공신 책봉
경연에 열심인 새 임금
국왕 위의 신하들, 반정 3대장
◆ 나는 허수아비 임금이 아니다
제거당하는 1등 공신, 박영문과 신윤무
사림의 재등장과 조광조
중종의 첫 부인 신씨 복위를 주장하다
판을 바꾸는 조광조
◆ 중종과 사림의 동상이몽
목적지가 달랐던 중종과 사림
현량과 실시
토지개혁
돌아올 수 없는 강, 위훈 삭제
◆ 기묘사화, 훈구들의 반격과 중종의 돌변
조씨가 왕이 된다?
간당으로 제거되는 사림
◆ 삼포왜란과 군적수포제
삼포왜란과 임신약조
돈으로 병역을 대신하는 군적수포제
◆ 외척들의 세상, 대윤과 소윤
혼란스러운 조정
세자 저주 사건
불에 탄 동궁과 중종의 죽음

3부 인종, 피기도 전에 진 군주
◆ 선왕과 사림 사이
조광조 신원과 현량과 복설

나가는 말 좋은 여건을 실정으로 망친 두 군주, 연산군과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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