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장석은 ‘불의 시인’이다. 등단 후 사십 년을 침묵한 그는 영원히 타오르는 저 시원의 불 속에서 방금 꺼낸 ‘그을린 시’들을 폭발적으로 세상에 내놓고 있다. 장석의 시에 그을음을 남기는 불의 핵심 연료는 ‘사랑’이다.
네번째 시집 『그을린 고백』에서 장석은 사랑의 불속을 계속 통과하는 그을린 존재들과 시간과 장소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아침밥 안치는 냄새를 따라 포구로 끌려가/사랑으로 다시 지어지고 싶네”(「빛의 그물질」). 나에게서 당신에게로, 오늘에서 다른 오늘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일”인 ‘사랑’은 지금 “승리와 다름없는 패배”(「그날이 왔다, 새가 노래하려면 - 노회찬에게」)의 그을음으로 얼룩져 빛난다.
이 얼룩짐과 빛남은 동의어이자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눈같이 흰” “더러운 시/더러운 사랑”(「더러움의 시」)의 수호자인 장석은 사랑하고 시 쓰고 살아가는 일이 모두 ‘건너가다’라는 서술어를 공유한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위임을 새 시집에서 보여준다.
출판사 리뷰
장석은 ‘불의 시인’이다. 등단 후 사십 년을 침묵한 그는 영원히 타오르는 저 시원의 불 속에서 방금 꺼낸 ‘그을린 시’들을 폭발적으로 세상에 내놓고 있다. 장석의 시에 그을음을 남기는 불의 핵심 연료는 ‘사랑’이다.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작 「풍경의 꿈」에서 장석은 “한없이 힘센 세력”이자 “숨 쉬는 따뜻한 열”인 “사랑의 열들”을 노래했다. “한국 현대시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아름답고 격조 있는 언어의 조직”(남진우)과 “유다른 형이상학적 깊이”(정홍수)로 극찬받은 문제의 그 작품이다. 이 시에서 빛과 계절과 풀과 새 등과 어우러져 한없는 깊이와 높이로 “부풀어가”는 ‘나’는, 그러나 사랑의 장엄한 우주와 “지상의 어두운 골목” 사이에서 분열한다. “차갑게 불타”는 ‘새’와 “슬픔의 첨탑”으로 이미지화된 내적 모순 속에서 장석이 묵언시행(默言詩行)으로 일관한 사십 년의 세월은,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되, 결과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삶과 시에 부여한 “신성한 정지”의 시간이 되었다. “이제 삶은 신성한 정지이며,/그의/그림자인 풍경만이 변모한다,/그의/입김인 바람은 흩어진다. 소리의 철책 사이에서.”(「풍경의 꿈」).
네번째 시집 『그을린 고백』에서 장석은 사랑의 불속을 계속 통과하는 그을린 존재들과 시간과 장소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아침밥 안치는 냄새를 따라 포구로 끌려가/사랑으로 다시 지어지고 싶네”(「빛의 그물질」). 나에게서 당신에게로, 오늘에서 다른 오늘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일”인 ‘사랑’은 지금 “승리와 다름없는 패배”(「그날이 왔다, 새가 노래하려면—노회찬에게」)의 그을음으로 얼룩져 빛난다. 이 얼룩짐과 빛남은 동의어이자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눈같이 흰” “더러운 시/더러운 사랑”(「더러움의 시」)의 수호자인 장석은 사랑하고 시 쓰고 살아가는 일이 모두 ‘건너가다’라는 서술어를 공유한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위임을 새 시집에서 보여준다.
시나브로 장석 시의 제1서술어로 부상한 ‘건너가다’는 이번 시집 전체에 걸쳐 옮겨가다(이행), 나아가다(지향, 도약, 성장), 돌아가다(회귀하다, 죽다), 흘러가다, 찾아가다, 지나가다, 가로질러 가다, 떠나다, 흩어지다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사랑하고 시 쓰고 살아가는 일이란 처음과 끝이 하나인 궁극의 경지를 향해 하염없이 가는[行] 일이다. 장석의 시에서, 더불어 그의 내부에서 순수한 원형의 이미지들이 태초의 ‘첫’ 형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일렁이며 불타오를 때, 이 내면의 불에 우주 본연의 ‘적멸’과 존재의 진면목인 ‘열반’이 얼비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인 「그을린 고백」은 1980년의 「풍경의 꿈」만큼 빼어난 작품이거니와, 이 시는 장석이 자신의 첫 시에 보내는 헌시이자 답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장석은 신성한 불에 휩싸였던 자신의 청춘을 애도하면서 가져보지도 못한 채 잃어버린 삶의 환희를, 흩어져버린 “사랑의 열들”을 회복하기를 꿈꾼다. 삶의 그림자인 풍경의 꿈이 아닌 꿈의 풍경을, “우리의 유일한 밑천”인 “진짜 꿈”(「그날이 왔다, 새가 노래하려면」)을 품은 ‘삶’을 다시 살아가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이 시에 네 번이나 등장하는 ‘다시’라는 부사에 주목하자. 회복, 복원, 반복, 계속 등을 의미하는 ‘다시’야말로 이 시의 진정한 주어일 수 있다. 그러니까 장석의 ‘그을린 고백’은 ‘다시’에 대한, ‘다시’를 위한, ‘다시’를 처음과 같으면서도 다르게 선포하는 고백이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시 쓰고 다시 살아가겠다는 고백. 우리가 매일 “그 겨울의 첫 불”을 피우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할 고백. 이 오래된 처음의 순간, “내가 집어넣어 태워버린 기억/겨우내 노변에서 한 장씩 한 장씩 불사른 지난 꿈”은 어느새 “다시 난로 안에 둥지를 틀”고 ‘불길’로 타오르고 불길 속 ‘불새’가 되어 춤춘다. 장석이 시화하는 ‘불’은 신성한 근원의 에너지로서 ‘생명과 탄생의 불’이며, 또 한편으로 파괴적인 현대문명에 의한 생명 말살의 폭력으로서 ‘죽음과 멸망의 불’이기도 하다. 전자는 젊은 시절부터 장석이 열망한 세계의 진리와 존재 본연의 생명력, 이를 저지하는 현실에 대한 거역의 정신과 상통하며, 건너가다, 흐르다 등 ‘통류(通流)’의 뜻을 지닌 서술어와 합일한다. 후자는 그가 침묵하던 사십 년 사이 극에 달한 기후 위기가 재앙의 불이 되어 지구를 강타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통함을 역설하며, 끊기다, 헤매다, 부수다, 붕괴하다 등 ‘단절’의 서술어와 결합한다. 장석은 인류가 처한 멸망의 위기 속에서, 이 무도(無道)하고 심악한 현재야말로 우리가 다시 “그 겨울의 첫 불” 앞에서 “그날에 이르”는 머나먼 여정을 시작해야 할 이유이며 필연이라고 말한다. 새가 다시 노래하고 우리가 다시 사랑하는 기적을, 현실을 꿈꾸는 것이 장석이 2020년대에 다시 시를 쓰는 이유인 것처럼.
장석은 우리의 내면에서 영원히 타오르고 있는 ‘첫 불’의 연료가 ‘사랑’임을 이미 오래전에 설파한 바 있다. 이번 시집 『그을린 고백』은 장석이 독자들께 권하는 ‘사랑의 야단법석’이기도 하다. “달빛처럼 꽃은 바다에 내리고/그는 삼매에 들고/모든 계절과 사랑이 앉아 있는/법석 한 장”(「색종이의 봄」). 이 법석에 앉는 순간, 당신은 사랑의 새로운 시간으로, 시절로, 시대로 “벅차게 드세게” 통하여 흐르는 ‘불’의 열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단, 그을릴 수 있음에 유의하시기를.
작가 소개
지은이 : 장석
1957년 부산생. 평북 영변 출신으로 함흥과 부산에서 성장하고 수학한 아버지와 전남 순천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의 2남 1녀 중 둘째다. 서울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 『우리 별의 봄』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를 펴냈다.
목차
그을린 고백
빛의 그물질
시절인연—입춘
시절인연—처서
시절인연—추분
시절인연—한가위
시월 편지
시월 편지 2
가을의 연등
십이월 첫날
시절인연—대설
시절인연—동지
시절인연—대한
시절인연—섣달그믐날
고라니의 시평
숲에서—문병
맹지의 집
숲에서—노을
숲에서—귀가와 출가
숲에서—나뭇잎 우표
숲에서—종소리
숲에서—끌림
숲에서—수화
나이테
강의 필법
맞이함의 춤
기마민족 농게
널빤지 위에서
젊은 별 회의
뒷걸음질 치는 배를 보며
더러움의 시
파르티아 활쏘기
수수께끼
순천 외가 7—냇가 나무의 햇가지
통영
우주인
태풍
국밥을 먹는 시간
부채질
꼬리지느러미에 뺨을 맞다
짝
혼례 준비
접촉
술의 노래
그 집
잊지 않기 위하여
눈사람
북행 열차
초서
연어의 길
여행
여생
월식
기찻길
개심사
동백 아가씨
봄 바다 1
봄 편지
봄 바다 2
봄의 깨달음
색종이의 봄
봄의 발굴
진달래꽃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꽃길의 난민
손가락뼈의 시—정수일 선생께
의전방기(醫傳房記)—유정호에게
그날이 왔다, 새가 노래하려면—노회찬에게
한 오라기 통신
약속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숲에서—불빛
해설 | 김수이 사랑의 그을음과 통류(通流)의 사랑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