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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풍선의 수화
한국문연 | 부모님 |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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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인생을 책, 하루를 페이지로 비유하자면 시인은 지독한 난독증을 앓고 있다고 봐야 한다. “어떻게 읽어도” 의미를 알 길이 막막했을 것이고, 비문들이 곳곳에 뿌리내린 일상의 행간들은 어느덧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읽어야만 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수평선을 부여잡으면서 다시금 고개를 내밀어도 삶은 그 자체만으로 끊임없이 표류하는 듯하다. 눈물에 젖은 하루, 그 페이지에 새겨진 통증은 유년 시절의 아픔을 환상통처럼 되살린다. 물기를 머금은 비문들이 종이 위로 퍼진다. “살아남기 위해 책을 드는 날이 잦았”던 그때 그 시절에 어떤 비문은 삶에 대해 각성하게 만든 ‘쓴 약’과도 같다.

  출판사 리뷰

인생을 책, 하루를 페이지로 비유하자면 시인은 지독한 난독증을 앓고 있다고 봐야 한다. “어떻게 읽어도” 의미를 알 길이 막막했을 것이고, 비문들이 곳곳에 뿌리내린 일상의 행간들은 어느덧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읽어야만 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수평선을 부여잡으면서 다시금 고개를 내밀어도 삶은 그 자체만으로 끊임없이 표류하는 듯하다. 눈물에 젖은 하루, 그 페이지에 새겨진 통증은 유년 시절의 아픔을 환상통처럼 되살린다. 물기를 머금은 비문들이 종이 위로 퍼진다. “살아남기 위해 책을 드는 날이 잦았”던 그때 그 시절에 어떤 비문은 삶에 대해 각성하게 만든 ‘쓴 약’과도 같다.
한편, 마음을 헤집었던 비문들의 운명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쓰디쓴 약은 필연적으로 어떤 저항을 동반한다. “약국 서너 곳을 지나칠 때까지/ 두고 온 마음이 낫질 않는” 것처럼 시인의 손끝에서 시작된 글자들이 일상 곳곳에 흘러내린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누군가의 마음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통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일상에 자리 잡아 견고하기만 했던 행간을 비집고 들어갔을 시인의 문장들, 저 “생지옥에 뛰어든 글자들”은 “어제의 기억을 가지고 사는 오늘”의 사투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시로 인해서 조금씩 “통증으로 면역력을 키운 가슴”은 그렇게 계속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것이다.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그것은 곧 누군가의 “마음 하나 밝히는 일”이자, “한 사람을 밝히는 길”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자 하려는 또 다른 마음에서 나오는 울림이다. 당장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저기가 “마음 둘 곳이라고 말하는 가슴”으로 가만히 누군가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것을 하나하나 수첩에 받아 적는 일을 시인은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기억에게 구걸하고 다니는” 것이라고 세상이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결국 “거기엔, 내가 가보지 않은 내가 있었다”라는 쓰디쓴 진리가 시인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할 것이다. 찢긴 페이지의 틈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마음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시인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한파주의보

갈 곳 정해진 하루는
오라는 곳 없는 오늘과 기억이 같을까

국밥집에서 허겁지겁 베어 먹은 뜨거운 김이
줄이 엉킨 정류장에서 입김으로 줄줄 새어 나왔다
수은주가 웅크릴수록 남해로 가는 버스는
건조한 허공끼리 부딪치는 어깨처럼 투덜댔다
코를 풀지 않은 맹맹한 공기와
흐리멍덩한 풍경이 마주치는 동안
누가 없앤 마음인지 모르는 가슴이
김 서린 차창에 하트를 찍던 손과의 악수를 꺼렸다

살얼음 같던 사람의 체감온도를 기록해 둔 수첩을 꺼내
하루치 감정의 절댓값과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뀌는 마음의 기울기를
체온계 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재어본다
늘 그랬듯 새롭지 않은 방식으로 돌아올 것이었지만
늘 그랬듯 이번에도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적어두었다

네가 나라면,
돌아오지 않을 듯 돌아오는 내가 더 미울까
돌아올 듯 돌아오지 않는 내가 더 미울까
아니면, 나에게 묻지 않는 네 질문이 더 차가울까

부동항을 찾아가고 있다
푸른 이끼 찾아 툰드라를 맨발로 뒤적이는 순록처럼
바다가 많은 바다에 가서
제 가슴 깊이보다 깊이 얼어본 적 없는 바다가
가슴 언 사람보다 더 가슴 치며
격랑의 몸부림을 치는 연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다

수평선이 움츠릴수록
남녘으로 가는 배가 몹시 흔들리고 있다

바람풍선의 수화

강변 대숲이 일렁일 때마다
덩치 큰 짐승이 어슬렁거리는 것 같다

한 걸음 멀어질 때마다 두 걸음을 헤매던 나는
푸른 밤 푸른 남해의 별고기 떼를 쫓아 짖어대던
금오도의 개였는지 모른다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남은 걸음을 숨차하던 나는
방울 소리 겨우 지나갈 비좁은 바람 기슭 지나
울음소리가 되돌아오지 않는 하늘 비탈 걷던
포카라의 짐 당나귀였을까

바래다줄 수 없는 곳까지 바래다준 날
해줄 수 있는 말이 침묵뿐이었던 그곳에서
길게 쓰러지던 뒷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는 창밖 내다보며
흔들리지 않으려고 흔들리는 눈동자
창 안에서 나는
단벌 구두처럼 걸음을 오래 신고 있었다

길이 먼 것은 오래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란 걸
길이 멀수록 뛰지 말아야 한다는 걸 나만 몰랐을까
스치는 바람 한 줄에도 널 지나치지 않으려고 발 동동
어쩌면 나는, 제자리걸음 걷는 나무였는지 모른다

잠든 골목을 깨우지 않고 몸을 빼낼 때
터럭 같은 댓잎에 반사된 별빛이
땀방울처럼 온몸에 흥건하다

돌아갈 길을 남겨두지 않은 쪽으로
짐승이 몸을 일으키고 있다

바람 그리고 바람

1.
바람이고 싶은 적 없었지만
옛날은 오늘에 이르러 돌풍이 되고
오늘은 그 옛날이 되어 질풍이 되고

바람이 되려 한 적 없었지만
너무 멀어져 버린 옛날과
너무 멀리 와버린 오늘

바람 같은 짤막한 윤회를 위하여
바람이 되어 숨어 지내는
나의 옛날이야기

바람, 다가서면 물러서고
물러서면 다가오고
한 번도 내 품에 가만있은 적 없었다
나의 옛날이야기처럼

2.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널 기다리며
문밖에 섰다가
네가 오면
함께 바다로 가서
실컷 울고 온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박기원
• 진주 출생• 2014년 《경남문학》 신인상 수상• 시집 『마리오네트가 사는 102동』 『마추픽추에서 온 엽서』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우주雨酒를 대하는 시의 자세 10
진양호晉陽湖·2 11
오래된 미래 12
반그림자 14
한파주의보 16
달 뒷면의 표류기 18
청명우淸明雨 20
집에 대한 사색 21
외계어外界語 24
스노볼snowball 26
가슴을 반으로 접으면 나비가 될까 28
나의 계절엔 봄이 오지 않는다 30
혼자 먹는 정오 뉴스 32
바다 그리고 바다 34
백련白蓮·1 35
백련白蓮·2 36

제2부

바람 풍선의 수화手話 38
소란騷亂은 주저흔躊躇痕이다 40
뽁뽁이 42
추가 목록 44
딱 그만큼 자란다 46
유모차 47
바짝 앉으니 반짝 빛난다 48
다섯 번째 방향 50
노동기勞動記·2 51
그해 겨울, 유독 추웠다 52
바다 사거리 54
카메라 샤워 56
강둑실록實錄 58
그림일기 60
목련·1 62
목련·2 63

제3부

남강 대숲 66
수평에서 멈추다·1 68
수평에서 멈추다·3 69
수평에서 멈추다·5 70
파양된 계절 72
밤길이 밤새 길을 지웠다 74
북해도행北海道行·1 76
북해도행北海道行·2 78
북해도행北海道行·3 79
키스, 그 독한 80
비봉산飛鳳山 81
나에게로 가는 여행 82
새들의 발자국·2 83
진양호晉陽湖·3 84
기구한 일상日常 85
나무 의자 86

제4부

바람 그리고 바람 88
몽유일기夢遊日記·4 90
진치령 터널 91
몽유일기夢遊日記·9 92
남강南江 94
유등별곡流燈別曲 96
선線·4 98
만보기萬步機 100
종기腫氣 102
비가 비에 젖을 때 103
무진정無盡亭 초고草稿 104
표정도 기댈 곳이 필요하다 106
가슴이 얼굴만 해졌다 108
일구육사·2 109
가을이 선물이라면 110
그날 이후 112

▨ 박기원의 시세계 | 정재훈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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