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송연숙은 언어의 빈 공간과 아직 시작하지 않은 언어의 내부를 사유하며, 그리움이 언어화되기 이전의 시간을 배회한다. “허공 가득 말풍선 같은 시의 등불”과 “밤안개처럼 스며드는 감정”은 그리움을 호명하는 순간 드러나는 시간 의식으로, 시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표식이 된다.
시인이 그리움을 통해 마주하는 이미지는 자연의 경이이자 인간 성찰의 비유다. 벚나무에 내려앉은 눈꽃과 구름, 빗방울을 통해 비상의 욕망과 순정을 포착하며, “벚나무에는 눈꽃의 DNA”가 있다는 시적 개안에 이른다. 자연의 이치는 감동적인 은유로 확장된다.
출판사 리뷰
송연숙은 언어의 빈 공간과 아직 시작하지 않은 언어의 내부를 사유한다. 그리움의 정서가 언어화되기 전의 시간을 이리저리 배회한다. “허공 가득 말풍선 같은 시의 등불을 내 걸어야” 하는 시인은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통해 “밤안개처럼 스며드는 감정”을 잘 전달한다. 그러나 그리움을 호명하는 순간 언어가 가진 과거의 신산한 삶으로 채색되는 시간 의식은 시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바코드이다.
시인이 그리움을 호명할 때 보게 되는 이미지는 자연의 경이이다. 시인의 자연은 인간을 성찰하는 비유의 대상이다. 송연숙은 언어의 회귀와 벚나무에 내려앉은 눈꽃과 하늘의 구름과 내리는 빗방울을 통해 “나뭇가지들은 하늘로 뛰어오르”고 싶다는 비상의 욕망을 마주한다. 또한 “어깨를 펴고 곧게 서고 싶은 꿈”과 “눈이 꽃으로 태어나길” 기다리는 순정을 바라보며 “벚나무에는 눈꽃의 DNA”가 존재한다는 시적 개안을 한다. 눈꽃이 앉았던 자리에 벚꽃이 핀다는 자연의 이치는 시인의 비유를 통해 감동적으로 전달된다.
말풍선 속에 그대 이름을 적었어요
다 타지 않은 말 하나
불씨처럼 쥐고 서 있습니다
바닥에 엎질러진 말들 사이로
흘러내린 커피의 체온이 식고 있어요
나는 건조대에 널린 하루를 털어 말리고
바다가 보이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다 읽지 못한 메시지를 열어봅니다
비워 놓은 말풍선처럼
견디는 자의 하루에는 박수가 없습니다
버스 창에 비친 내 얼굴을
수평선이 자르며 지나갑니다
유리컵에 남은 마지막 물기처럼
나는 흐리고 작아지다 사라집니다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는 건
어쩌면 그 하루에 다 넣지 못한 말들 때문일지 몰라요
말은 불입니다
꺼내지 않으면 내 속을 태우고
함부로 꺼내면, 타인의 속을 태웁니다
그대를 태운 말의 씨앗이 무엇인지 몰라
뾰족해진 그대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돌 듯
그대의 마음 곁을 돌고 또 돕니다
꺼내 놓지 못해서
비어 있는 말풍선에 매달린 나의 하루가
젖은 구름이 되기도 하고 빗방울이 되기도 합니다
부엌의 역사서
깜박할 사이에 타버린 사골국
급하게 뚜껑을 열어젖히자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어둠이 쏟아진다
밤새워 핏물을 빼고, 뽀얀 국물이 우러나는 동안
알지 못했다
국물이 심장처럼 졸아들고
구멍 난 뼈가 까맣게 타들어 가는
엄마의 시간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이 세상에 부엌이 없다면
어디서 엄마를 만날까
어떻게 여자를 이해할까
섬처럼 젖은 맨발의 엄마
왕이 나오고, 전쟁이 나오고, 포로가 나오는 부엌의 역사
아일랜드 식탁에 앉으면 섬이 된다 나는
바다도 뭍도 아니어서
바다가 되고 싶었고, 뭍이 되고 싶었다
무엇이 되고 싶었다
나처럼 살지 말아라, 엄마의 당부에도
섬처럼 엎드려
파도가 왕처럼 던져주는 상처를 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오전 7시가, 정오가, 오후 6시의 돌덩이가
생일이, 명절이, 제사라는 바위가
멱살을 잡고 굴러내려 온다
집게발로 바다를 자르던 꽃게
그 다리를 뚝뚝 분질러 넣고 찌개를 끓인다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
딸들에게 전하는 부엌의 역사서 같은 말 휘저으며
간을 맞춘다
리을의 노래
ㄹ을 써놓고
나는 모서리를 생각해
막다른 골목을 생각하고
터널을 생각하고
미로를 생각해
리을이라 발음하면
노을이 퍼지는 것 같고
물결이 흐르는 것 같은데
철근처럼 딱딱하게 굳은 몸을 가진 리을
막다른 골목이라 할지라도
앞길을 예측하기 어려운 미로라 할지라도
풀어놓은 실타래 따라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여기가 터널이어도
나는 여기, 지금이 좋아
그냥 앞으로 가고 싶어
막혔다고 생각했던 길도
막상 달려가 보면 이어져 있었어
꺾이면서 익어 가는 게 삶이라면
기꺼이 꺾여서 모서리를 돌아가겠어
기꺼이 꺾여서 낮아지겠어
ㄹ은 자기 자신이야
입구도 출구도 내 안에 있어
문제도 정답도 다 내 안에 있듯이 말이야
무릎 꿇고 마루를 닦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리을
리을에는 패배가 아니라 경건이 들어 있었던 거야
이 가을
풀벌레처럼 쓸쓸한 리을의 노래를 숨죽이고 들어 봐
자신을 찾아가는 리을의 노래
작가 소개
지은이 : 송연숙
강원도 춘천 출생. 강원대학교와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시와표현』과 강원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단에 나왔다. 2025년 월간 『모던포엠』 평론 부문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측백나무 울타리』와 『사람들은 해변에 와서 발자국을 버리고 간다』 『봄의 건축가』가 있다. 2023년 제9회 한국서정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내촌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구름 붕대
말풍선 속에 그대 이름을 적었어요 10
시간 세탁소 12
떡갈나무 ISBN 14
맘과 몸 16
비누 18
나를 스캔하다 20
양파의 계절 22
주사위 놀이 24
빗방울 초상화 26
아에이오우 28
로젠다리 30
콜콘다의 남자들 32
구름 붕대 34
제2부 수박 박수
나비 포옹법 38
원래 41
번호들이 문을 잠그다 44
부엌의 역사서 46
선택지가 없는 봄 48
저녁의 효과 50
눈꽃의 DNA 52
사과나무와 속도 54
구름족 운동회 56
나 홀로 입학식 58
수박 박수 60
깃털의 추락 62
황금빛 사자 64
제3부 모래밥
엄마 생각 68
계절의 잔고 69
가시고기 70
모래밥 72
백학의 귀향 1 74
강촌상상역 76
오늘은 폭풍이 없어서 가장 좋은 날 80
굴러라, 바위 82
숲 테라피 84
죽음의 얼굴 만나기 86
모자람의 행복론 88
내 마음에 건너와 가라앉는 시계 90
달의 이력 92
제4부 리을의 노래
샘물의 감정 96
우수수, 그 말 없는 무게 98
봄, 2025 100
사막에 달빛이 새다 103
파도가 쓰고 간 편지 106
시간장터 108
우린 고도 안에 갇힌 거야 111
물의 음표 114
너를 바라보는 법을 아직 배우는 중이다 116
대 118
리을의 노래 120
별의 씨앗 122
▨ 송연숙의 시세계 | 이재훈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