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박정애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이다. 1993년 등단 이래 30여 년 넘은 시력을 지닌 시인의 깊은 내공이 엿보이는 시편들이다. 오랫동안 시와 시조를 함께 써 온 시인의 시는 전통적이면서 옛스러움이 묻어나는 독특한 문향을 지니고 있다. 자연과 인간 삶의 모습에서 존재의 이치를 일깨우는 시편들이 있는가 하면 이 땅의 많은 울음을 대신하여 울어주는 역사적 시편들도 함께 한다. 묵직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1.靑대밭 이슬만 먹고 자랐다아침 참새 조잘조잘 입 싼 부리 쏙쏙 뽑아낸 초롱초롱 눈빛 맑은 연둣빛 작설 화개 십리벚꽃 향기와 섬진 청류 물소리 은인자중 발효 숙성시킨八백리 지리산역 바람 햇살 한 몸에 담고 은익銀翼의 달빛은 은의恩義로 아로새기라고 가마솥 찌고 덖은 구증구포 열탕냉탕 사지백체 주리를 틀다 체반 얼러 달래면서쓴맛도 단맛이 되라 유념留念, 또 유념하라 두견이 동박새가 울었다2.정좌한 산역도 새뽀얀 입김을 불고 골골 양칫물 게우는 아침 한나절생면부지에도 매초롬히 웃어주는 차 꽃 앞에서고요한 산 냄샌가 한 오백 섬진강물에 묻어둔 향나무 침향목이던가 흰 달빛 황금햇살 솔향기 체 걸러 갈앉힌 향기의 앙금이로 빚은 경단3.참판 댁 별당아씨는태초의 사과를 깎는지찻물을 끓이는지수밀도껍질 벗기는지은쟁반 녹두알 구르는 소리로숨 닫는 것만으로 오관오감이 피어나는화개동천 십리벚꽃 줄무지장 혓바닥이 타도록 잔향을 핥는 바람의 빛깔까지 온전히 드러낼 전모의 내력으로 입안을 맴돌다 혀끝에서 피어나는 피안의 꽃―「잔향殘香」
초록지뢰, 풀은 밟아도 풀의 정신은 짓밟지 않았다 길은 저 홀로 빛나는 길이 되지 않는 것처럼지금 여기까지 아무도 혼자 걸어오지 않았다나보다 먼저 앞서 세상을 걸어간 사람들이 열어 준 길을 따라길을 걷는 고요한 맨발들코끼리는 바닥에 발이 닫지 않으면 걸음을 옮기지 않는다는 철저徹底가 철칙 바다를 건너지 않고 숲으로 갔다걸어서 죽음으로 갔다누구나 무엇이거나 그 길로 걸어갔다 사람의 발 냄새가 밴 사람의 길은 그리운 쪽으로 나 있고 위로만 치어다본 나무 땅속 제 뿌리의 길을 찾아 한순간도 가만있지 못하는 나무는 나무의 길로46억 년 이 나이 되도록 늘 그 자리인 지구를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걸어왔고 또 그렇게 맨 처음부터 맨 마지막까지 가벼워지기 위해 험난한 산을 올랐으나내려올 때는 등에 산을 지고 돌아왔다무거운 산을 등에 지고 온 맨발이 아직도 뜨겁다 ―「나무가 걸어온 길」
새파랗게 질린 하늘이 기일게 울었다 초록 나무에서 초록 소나기가 내리고 제면기는 하얀 작달비 국수발을 뽑았다양수겸장 두물머리 수런대는 물길을 틀어쥐고 내리달리다 솟구치는 용천수 줄기차게 대세를 몰아간 질주는 결사적, 신열에 들뜬 숲 속에서 고라니로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에도 물가에 내려놓은 목숨이 떠내려갈까 들고 내리뛰는데낯선 추녀마루 비 피하는 길손처럼 어른 앞에서 맞는 야단은 순간만 모면하면 지나갈 소나기, 호란왜란 외세침략 세마치장단이 한바탕 소나기로 지나가고 일시정지 볼모로 잡힌 나무들 수족을 풀고 슬슬 기지개 틀면 쫓거나 쫓기거나 일단의 환란은 두들겨 맞는 것보다 피하는 게 상책 글귀 밝은 사람 귀에는 경전으로 허기진 사람에게는 쌀 씻는 소리로 제면기 국수발로 길게 목을 뽑는초록공후인들―「초록 소나기」
작가 소개
지은이 : 박정애
기장 월평 출생. 199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시 「개운포에서」가 당선됨. 19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겨울 판화」가 당선됨. 시집 『개운포에서』 외 8권. 한국작가회의 회원.부산작가회의 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