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이따금 천변으로 오시는
유정한 말이 무정한 표정이 되고 무정한 표정이 유정한 손길이 된다 냇물에 담가 놓은 얼굴을 꺼내 보면 너는 있으나 나만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손숫물에 둥둥 죽어 투명한 것들 주먹을 조용히 쥐었다 펴 본다 비록 내 손에 당신 몸 조각 하나 남지 않았으나 아침에 나선 길이 저녁이 되고 저녁이 된 당신이 나의 아침이 될 날들을 생각한다 저 천변 한 아름도 못 되는 둘레를 같이 돌아주는 사람이 없겠는가 물가 고인 듯 보이나 옛것은 이미 풍화되어버린 유적 그 둥근 곁에 하릴없이 피고 지는 풍경으로 나는 살다 간다 환영이라도 꿈길이라도 다시 오신다면 반듯한 옷 한 벌 해 드리고 환한 꽃비 흠뻑 젖어보시라 여쭙겠는데
물빛 도서관
애먼 느낌으로부터 멀리 왔다 달무리가 예뻤다
산마루는 바람을 앉히고 어스름을 입는다
물살은 점자로 읽어야 한다 흐르는 서가엔 흰 돌이 있고
북방의 겨울이 있다 백 년 전 모던 보이는 필체가 선명하고
MZ들은 액정으로 모던을 읽지만
모든은 물살이고 모던은 여울이니까 서기 여울엔 잔돌이
많다 문장이 굽어지면 사람이 읽힌다 젖은 편지를 쓴 사람은
물의 나라로 떠났다
시원의 첫울음이 있고 광야의 모래바람 불고 물의 낱장은
자꾸만 뜯겨나가도 기어코 한 획인데
백 년 후를 먼저 살다 간 시인은 물에 녹은 메아리 그 부서진
소리에 산야는 화답하고 깊은 계곡을 안고 흘렀지
애먼 느낌으로부터 멀리 왔다 차가운 물살 때문에 가슴이 시렸다
물빛 도서관엔 호롱불 가늘게 흔들리는 문장이 많다
모든 문장은 심해로 가기 위해 발목을 씻는다
오래된 시문은 물속에서도 횃불인데 가슴을 녹이는 화톳불인데
물속에서 불타는 문장의 노을을 보려고
물빛 서가를 뒤적인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신재화
충남 보령 출생. 현재 경남에서 거주. 호미문학상(2021년), 제24회 여수해양문학상 대상 수상(2022년). 오륙도신춘문예 당선(2024년). 시집 『핑크, 펑크』. 현 (주)상동페이퍼 대표, (주)다나마스크 이사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