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섣불리 무대 앞을 장식할 표어를 규정하기보다 그 무대의 넓이와 깊이가 굳어버리지 않도록 말의 힘을 키우는 장소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필자들에게 계엄이 선포된 12월 3일부터 이후 두 달 동안의 기록을 요청했다. 그 기록이 일기여도 좋고 에세이여도 좋고 비평이어도 좋으나, 가능한 한 밀려오는 사태와 동시적으로 호흡하며 당신이 서 있는 시간과 장소를 기록으로 남겨달라는 당부를 했다.그렇게 말을 다루는 사람들의 고민이 고이고 부글대다 끓어넘치는 역동적인 과정이 15편의 글이 되어 이곳에 도착했다. 김기태, 김멜라, 김복희, 김이설, 김형중, 문보영, 박솔뫼, 서효인, 소영현, 손보미, 송희지, 이미상, 이장욱, 임유영, 황정은의 글은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감정들, 그러나 글을 읽는 순간 이미 내 안에서도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발견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말로 빚어 건네주었다.낯선 기획에 기꺼이 참여해준 동료 문인이자 무엇보다 동료 시민인 저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보내며, 글을 통해 서로의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는 이 소중한 경험을 독자들과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다.
출판사 리뷰
탄핵-일지
“참으로 오래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영”
―김기태 김멜라 김복희 김이설 김형중 문보영 박솔뫼 서효인 소영현 손보미 송희지 이미상
이장욱 임유영 황정은―
■ 서문:
봄호를 펴내며
우리, 그럼에도 함께할 수밖에 없는
하루 만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해제되었다. 그리고 탄핵의 절차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45년 만에 선포된 비상계엄과 이후 탄핵 정국을 바라보며,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만큼 어처구니없는 이 사태에 대해 정확히 조준하고 명중하는 말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나 붙들고 밤새도록 떠들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정작 누군가를 만나면 별달리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상대의 말이 뻔하게 느껴졌고 나의 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아채는 일이 반복되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말의 무게는 가벼워졌고 말의 가치는 휘발되었다. 그래도 나는 말을 다루는 사람인데. 이 사태를 말로 풀어낼 수 없다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텐데. 그러나 나의 조바심과는 별개로, 사태를 둘러싼 말의 세계는 텅 비어 있거나 꽉 포화된 듯 보였다. 말로 구성된 상징질서가 무너져버렸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재의 침입’이 반드시 참혹하거나 숭고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실재가 막대하고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하거나 치명적인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잔인한 진실이었다. 오랫동안 많은 이의 손을 빌려 가까스로 구축해온 ‘사회적인 것’이 이토록 볼품없고 방정맞은 타격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다는 건 무언가 근본적인 자존심을 훼손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금으로선 이 보잘것없는 진실을 인정하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어 보인다. 말하자면, 실재는 빈약하고도 우스꽝스럽게 등장할 수 있다. 특정한 희망과 믿음하에 구축된 공간, 그러니까 신앙에 견줄 만한 신념을 전제 삼아 사회적 행위를 교육하고 유지하고 평가해온 ‘대의민주주의’라는 상징계는 돌연 순식간에 뚫려버릴 수 있다. 그것도 위대한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천박한 소동극에 의해.
오물로 등장한 실재의 흔적을 온몸에 뒤집어쓴 기분이다. 물론, 윤석열을 비롯한 내란 세력의 현실 인식은 상징계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지극히 퇴행적이고 상상적인 종류의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에, 그토록 허접한 난도질로도 대한민국의 상징계가 한 장의 종이처럼 손쉽게 찢길 수 있다는 사실은 더욱 비참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도 상징계는 찢기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도 ‘사건’은 등장한다. 경박한 소동극 역시 사건이긴 사건일 것이고, 이렇게 희극이라고도 비극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사건 앞에도 충실한 주체는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문학에서 그간 주목해온 ‘사건의 주체’, 그러니까 압도적인 사건 앞에서 사건이 요구하는 바를 겸허하고 충실하게 수용하는 주체의 형상은 이 경우에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난잡한 가설무대에서 끝까지 내려오지 않고 버티기 위해서는 역할을 자임하고 자리를 사수하는 지극히 의도적인 선택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최소한 나의 경우에는 그래 보인다. 나에게 결핍된 것은 과몰입을 방지하기 위한 비판 의식이 아닌, 냉소에 빠지지 않기 위한 가면과 연기력이니까.
여하튼 추하게 너덜거리는 실재의 균열 앞에 가설무대는 세워졌다. 이 임시 무대에 올라온 이들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전부 쓸어버리고 싶다는, 어떤 종류의 목소리들은 모조리 소거하고 싶다는,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나의 어두운 감정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감정 자체를 억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애당초 “진정한 의무의 신호는 동정심보다는 짜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 짜증과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야말로 내가 사회적 의무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일 테니까.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은, 만원 버스에 새로운 승객이 탑승할 때 기존의 승객들이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여 자리를 내어주는 것처럼, 누군가의 ‘현존’에 의해 부여되는 강제성과 그로 인한 포기야말로 ‘의무’의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구제 불능인 동생이 마약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말도 없이 나타나 나의 소파를 토사물로 더럽힌다면, 나는 공감과 동정의 감정 대신 짜증과 체념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어쩌면 이리도 짜증나게 굴 수 있을까? 근데 어쩌겠어, 내 동생인데……” 제임스 퍼거슨,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분배에 관한 인류학적 사유』, 이동구 옮김, 여문책, 2024, p. 71.
퍼거슨에 따르면, 바로 이 불쾌와 체념의 감정이야말로 진짜 의무의 감정이고 , 사회는 이러한 “의무라는 개념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 같은 책, p. 47.
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니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유효한 건 힘뿐이다’라고 외치는 이들을 향해 같은 말로 대거리할 수는 없다. 도무지 공감도 이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을 대상으로도 성가시고 괴로운 ‘현존의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유토피아는 없을 것이다. 온갖 문제점을 포함한 채로 시끄럽게 웅성대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섣불리 디스토피아를 승인하지 않는 인내심과 ‘이러한’ 방식의 사회가 문제라면 어떠한 방식의 사회가 도래해야 할지 사유하고 실천하고 연대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러니 말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할 것이다. 진술문의 형태로 수행문의 의미를 담아 말하자면, 문학은 인류가 말로 빚어온 소중한 것들을 지키되 더는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말을 대신해 유효한 말을 상상하고 발명하는 의무를 지닌다.
그런 의무를 이어받아, 이번 『문학과사회 하이픈』은 열린 장소가 되고자 했다. 섣불리 무대 앞을 장식할 표어를 규정하기보다 그 무대의 넓이와 깊이가 굳어버리지 않도록 말의 힘을 키우는 장소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다양한 필자들에게 계엄이 선포된 12월 3일부터 이후 두 달 동안의 기록을 요청했다. 그 기록이 일기여도 좋고 에세이여도 좋고 비평이어도 좋으나, 가능한 한 밀려오는 사태와 동시적으로 호흡하며 당신이 서 있는 시간과 장소를 기록으로 남겨달라는 당부를 했다. 그렇게 말을 다루는 사람들의 고민이 고이고 부글대다 끓어넘치는 역동적인 과정이 15편의 글이 되어 이곳에 도착했다. 김기태, 김멜라, 김복희, 김이설, 김형중, 문보영, 박솔뫼, 서효인, 소영현, 손보미, 송희지, 이미상, 이장욱, 임유영, 황정은의 글은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감정들, 그러나 글을 읽는 순간 이미 내 안에서도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발견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말로 빚어 건네주었다. 낯선 기획에 기꺼이 참여해준 동료 문인이자 무엇보다 동료 시민인 저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보내며, 글을 통해 서로의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는 이 소중한 경험을 독자들과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다.
본권의 창작란에는 이번 계절에도 다채로운 작품들이 마련되어 있다. 황동규, 이문재, 심보선, 진은영, 김현, 백은선, 여세실, 윤혜지, 봉주연, 구윤재의 시와 조경란, 염승숙, 신종원의 소설을 만나볼 수 있다. 리뷰 코너에서는 박신현, 선우은실, 정원, 최다영, 황사랑, 김다솔, 안세진, 이성민, 이지은 평론가가 지난 계절에 출간된 시·소설 단행본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섬세하게 읽어주었다. 이 또한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끝으로 , 제21회를 맞은 마해송문학상 수상작으로 조은주의 『비로와 호랑할배』가 선정되었음을 기쁜 마음으로 전한다. 수상작에 대한 심사평과 수상 소감은 본권 지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진심으로 수상자에게 축하와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수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나날이지만, 독자들과 함께 읽고 쓰고 생각하며 이 시절을 통과하고 싶다. 문학은 모든 순간에 가능하며 문학을 통한 우정은 결코 협소해질 수 없음을 기꺼이 믿어보고 싶다.
편집동인 이소
「완벽하지 못한 날들」 _김기태
서울 서부지법에 침입했던 이십대 청년이 유치장에서 작성한 수기가 1월 21일에 보도되었다. 그는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다시 시민으로 거듭나고자’ 담벼락을 넘었다고 주장했다. 1월 26일에는 누적 수강생 백만 명이 넘는 한국사 강사 전한길 씨가 부정선거 가능성과 거야 폭정을 지적하며,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하는 입장문을 게시했다. 글의 말미에서 그는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네크라소프의 시구를 인용했다. 이 시구는 40년 전에도 인용된 적 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유시민 씨는 전두환 정권의 사법부에 제출한 ‘항소이유서’를 같은 인용으로 끝맺었다. 이른바 ‘서울대 민간인 감금 촉행 고문 사건’과 관련해서다. 그 오류와 업보에도 불구하고 항소이유서 자체는 군부독재에 대한 고발로서 널리 회자되었고, 네크라소프의 시구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그리고 40년 후, 이는 군부를 동원해 국회 해산을 꽤했던 계엄령을 계몽령으로 윤색하는 데에 재인용된다. 혼란하다.
「계엄 파편」 _김멜라
계엄이 선포되고 우여곡절 끝에 해제되었던 날, 늦은 새벽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그 소식을 듣고 곧장 국회 앞으로 가려 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또다시 그런 일이 생겨도 엄마가 가선 안 된다고 만류했다. 추운데 차도 없이 할머니 혼자 그 밤에 어디를 가느냐고. 엄마는 택시를 타고 가면 된다며 이번에도 빨리 국회로 달려갔던 사람들 덕분에 이만큼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과거 시위 때 내가 겪었던 크고 작은 폭력 사태가 떠오르며 순간 엄마가 곤봉에 맞아 피 흘리는 망상이 가득 찼다. 옅은 공황 상태에 빠진 나는 급기야 나 자신을 인질 삼아 엄마를 겁박했다. 그럼 내가 먼저 달려가겠다고, 내가 앞장서 담장을 넘고 저것들을 가만 안 돌 테니(실제로는 이보다 더 과격한 표현을 썼다) 엄마는 집에 계시라고 했다. 엄마는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중에 통화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산통 깨기(記)」 _김복희
2024. 12. 23. 월요일. 서울. 굉장히 추위.
아침 뉴스 보도로 트랙터가 남태령을 넘어 용산에 당도하였음을 보았다. 날이 무척 찼는데.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 소액을 후원하는 것으로 마음의 빚을 달랬다. 남태령에 모인 분들에게 큰 빚을 졌다. 코를 풀 때마다 코피가 나는 추위에. 그러나 물은 안 먹히고 커피만 들이켜는 중. 이 부담감을 불쾌하다고 감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헌재의 브리핑에서 윤이 서류를 받지 않아도 송달의 효력이 발생함으로 간주한단다. 그래, 열아홉 번이나 서류를 안 받는 건 말도 안 된다. 법 앞에 모두 평등함.
학기 말 성적 처리, 시와 산문 원고가 수 편. 모두 1월 중 마쳐야 하는데 완전히 손에 잡히지 않아 놓고 있었다. 미치겠네.하지만 안 미치겠지. 마음이 다급하다. 이 시국에 시를?이라는 질문은 이제 그만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국 혹은 국면, 뭐든 사태사, 세상이, 시에 어떻게 녹아 나올 것인가 이것이 문제. 내 한계가 드러나겠지. 그러나 이것이 시의 한계는 아닐 것이고. 시가 나보다 나은 존재임을 믿는 수밖에 없겠지. 뉴스를 끌 수가 없다. 김수영을 생각하자. 일단 한 과목 성적 처리를 마쳤다.
목차
| 본권 |
qha호를 펴내며
시
황동규 오늘 외 1편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외 1편
심보선 섬망 외 1편
진은영 자기소개 외 1편
김현 천사들의 합창 외 1편
백은선 세계의 배꼽 외 1편
여세실 예지의 말 외 1편
윤혜지 기도 놀이 하는 사람들 외 1편
봉주연 내일이 들어올 자리입니다 외 1편
구윤재 다녀왔어 외 1편
소설
조경란 빗방울 하나 마른 잎을 두드리네
염승숙 한낮의 정적
신종원 돌, 뱀, 노래
리뷰
박신현 죽음을 삼키는 에코섹슈얼리티
―김언희, 『호랑말코』
선우은실 상태로 말하는 방법
―신미나, 『백장미의 창백』
―최재원, 『백합의 지옥』
정원 깨진 조각이 비추는 것
―최하연, 『보헤미아 유리』
―박지일, 『물보라』
최다영 What is love
―유선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백인경, 『멸종이 확정된 동물』
황사랑 몫 없는 자들의 광장
―배수연,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윤은성, 『유리 광장에서』
김다솔 자주, 계속 실패해보겠습니다
―안윤, 『모린』
―김지연, 『조금 망한 사랑』
안세진 위생적인 삶을 위한 지침
―김의경, 『두리안의 맛』
―전지영, 『타운하우스』
이성민 비주체에 관하여 쓰기
―천선란, 『모우어』
―황모과, 『스위트 솔티』
이지은 대온실과 하숙집
―김금희, 『대온실 수리 보고서』
제21회 마해송문학상 발표
조은주 『비로와 호랑할배』
색인
정기 구독 안내
| 하이픈 | 탄핵 – 일지
김기태 완벽하지 못한 날들
김멜라 계엄 파편
김복희 산통 깨기(記)
김이설 2024년 12월, 2025년 1월의 메모
김형중 좌파적 우울
문보영 앤아버의 나무들과 우체국 그리고 실어증
박솔뫼 나는 뭔가 말을 할 거야
서효인 교차 기록
소영현 거울 방에서, 저항의 미러링
손보미 힘
송희지 계속 쓰기
이미상 ○○도 ○○도 없는 구멍 뚫린 문형과 캐치프레이즈
이장욱 계엄 일기
임유영 일기 모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
황정은 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