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2024년 12월 3일,
이날은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아무 일도 없을 것만 같았던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3분. 별안간 대통령이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했다. 상기된 얼굴을 한 그는 빠르게 준비한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된 그 짧은 담화는 야당을 비롯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자신이 만들어낸 ‘비상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대통령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평범한 일상에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 1980년 오월 광주를 끝으로 역사에서 지워버렸던 계엄령, 그러나 박근혜 정권과 윤석열 정권의 물밑에서 자꾸만 꿈틀거리던 바로 그 비상계엄이 별안간 현실에서 되살아났다.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닥쳤을 때 국가와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남겨놓은 권한은 이번에도 오로지 대통령 개인의 안전을 위해 발동되었다.
이어지는 장면을 이번에는 거의 모든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국회에 나타난 장갑차와 헬리콥터, 무장한 병력들의 본관 침입, 이들을 막기 위해 이불을 걷어차고 뛰어나온 시민들. 평범한 사람들의 강력한 저항은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로 이어졌고, 이튿날 새벽 4시 27분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거쳐 계엄령을 해제했다는 속보가 보도되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 새로운 의무가 부여됐다. 어제의 계엄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가? 12·3을 계엄으로 권력을 찬탈한 5·16과 12·12 옆에 놓을 것인가, 아니면 민주시민이 힘을 합쳐 독재권력에 맞선 4·19, 5·18과 나란히 기록할 것인가. 계엄령이 발효되었던 6시간보다 훨씬 더 길고 힘들 시간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에게 주어졌다.
심용환 역사 상상력 아카이브 제3권
『민주공화국의 적은 누구인가』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역사학자 심용환은 이후 새로운 관점으로 한국 현대사에 접근하는 [심용환 역사 상상력 아카이브] 시리즈를 발표했다. 제1권 『헌법의 상상력』은 제헌 및 아홉 번의 헌법 개정과 정치적 민주화 과정을 병렬하여 분석한 책으로, 지금도 ‘한국 헌정사 입문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그다음 제2권 『리더의 상상력』은 1987년 현행 헌법 수립 이후 비로소 ‘문민정부’가 실현된 1990년대의 두 대통령 김영삼·김대중을 주제로 삼고, 어떻게 정치적 리더가 사회변혁을 이끌 수 있었는지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변화를 바탕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이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제도와 산업, 기술과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었음을 밝혔다.
심용환은 이 시리즈의 세 번째 책으로 『공동체의 상상력』을 집필할 계획이었다. 때로는 국가폭력에 저항하고 때로는 사회발전을 이끌어온 ‘시민사회’의 역사야말로 ‘헌정사’, ‘정치적 리더십’ 다음에 와야 하는 한국 현대사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의 확대, 차별과 혐오를 차단하는 건강한 시민의식, 무엇보다 돌봄과 연대가 확산되는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날 밤의 계엄령과 포고령은 그의 계획을 바꾸어놓았다. 그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이 느낀 불안과 분노, 기시감을 내버려둔 채로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선배 시민들이 흘린 피와 땀의 가치는 왜곡하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나라를 강제했던 선배 독재자의 길을 따라가려 한 윤석열의 계엄 시도를 역사에 분명히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계엄의 그림자 속에 웅크려 있던 민주공화국의 적들의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국민에게 상소上疏를 바치는 사관의 심정으로 12·3내란사태와 그 전후의 사정들을 차례차례 되짚기 시작했다.
민주공화국의 적은 누구인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좀먹은 괴물들의 현대사”『민주공화국의 적은 누구인가』는 그 적들의 정체를 열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비상계엄’이다. 지은이는 그 이름과 달리 한국 현대사에서 이 제도는 “대통령이 자기 주도적으로 조장한 비상상황”이었다고 규정한다. 박정희는 5·16을 성공시키고 6·3항쟁을 진압할 때, 그리고 유신을 통해 영원권력에 도달할 때 계엄을 동원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계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두환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유고로 인한 비상계엄 확대가 그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들은 전쟁과 사변이라는 계엄의 조건을 무시한 채 스스로 내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했다. 심용환은 12·3내란은 이들을 모방한 또 한 번의 친위 쿠데타 시도였음을 밝힌다.
두 번째 적은 대통령. 2000년대에 부활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부국 대통령 박정희’ 신화를 추적하고 대통령에게 집중된 비대한 행정권력 문제를 분석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적은 군부다. 5·16과 12·12의 성공 열쇠였던 군부는 이번에도 서울 한복판으로 탱크와 장갑차를 끌고 왔다. 그러나 이번 결과는 달랐다. 결과가 바뀐 이유와, 그들의 행동이 달라진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한다.
그다음으로 공무원과 검찰, 사법부와 국회 등 다양한 국가기관의 행동 양태를 파악한다. 이 대목에서 해병대 박정훈 수사단장의 항명과 최상목 권한대행의 변명이 비교되고, 5·18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면죄부를 준 검찰과 그것을 ‘국헌문란’으로 판결하고 단죄한 사법부가 대비된다. 여전히 대통령의 권력이 막강한 상황에서, 입법부는 법을 만들고 행정부는 법을 집행하며 사법부는 그 법에 근거하여 옮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공화주의의 이상은 멀어 보인다. 그러나 지은이의 안내에 따라 민주공화국의 짧은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분명 그 이상을 향해 가고 있음이 명확해진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그 밖의 여러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다루는데, 특히 기독교와 뉴라이트에 대한 분석이 중요하다. 한국 기독교는 오랫동안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매번 우익적, 보수적 입장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교인들의 사고를 그쪽으로 유도했다. 이것은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남한으로 온 피난민들이 이후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표방하고 청년단 등 남한 내 좌익 탄압의 선봉대가 되었던 역사적 경험에서 기인한다. 여기에 전광훈을 위시한 이들이 ‘장로 대통령’ 이승만을 추앙하며 세력을 키우면서, 이제 한국 교회는 뉴라이트의 배양지가 되었다. 심용환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대한 뉴라이트의 재신화화 과정을, 이른바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을 복기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박정희는 이승만을 독재로 규정하며 부정부패 해소를 이유로 권력을 장악했고, 전두환을 박정희의 유신과 장기집권으로 쌓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정권을 찬탈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뉴라이트 역사관은 왜곡보다는 환상에 가까우며, 심지어 영원히 자기부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들의 목소리가 시민들의 광장과 거리를 둘로 쪼개놓은 이유를 설명한다.
끝으로 12·3내란사태 국면에서 자취를 감춘 북한과 무엇보다 중요해진 국민의 역할을 탐구한다. 북한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국가의 최우선 목표일 수밖에 없다. 지은이는 분단의 고착화와 남북한 두 나라의 정상국가화 사이에서 어느 길을 택하든 ‘냉전적 사고’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한다. 또한 이번 내란사태를 통해 ‘정치적 인간’으로 거듭난 우리에게 정치투쟁을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축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음을 상기시킨다.
탄핵 이후 다시 시작될 오늘
“우리의 민주주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12·3내란사태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 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계엄 시도를 막아낸 것이 성과이고, 이후 둘로 쪼개진 광장은 지금 우리가 마주한 한계이다. 성과 위에서 국가의 여러 구조와 요소들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후퇴를 튼튼하게 방어할 것이다. 한계 안에서 공동체는 치열하게 갈등하고 토의하여 다음 걸음의 방향을 찾아낼 것이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헌법 전문에서)하여 이어진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 증거다.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헌법 전문에서)하겠다는 다짐은 내일도 변함없을 것이다.
지은이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이렇게 끝맺는다. “이번 내란사태의 종결과 더불어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공고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어디를 향할 것인가. 사회는 충분히 고도화되었고, 경제와 사회는 정치 이상으로 복잡하고 섬세하다. 우리는 내란사태를 통해 정치적 인간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조만간 우리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거와 똑같은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만들어갈 것인가. 문제의식의 구체화, 사회적 연대와 실천, 특정 분야에서의 성취와 지속적인 진보, 사회경제적 변화를 향한 교두보의 확보, 기존의 정치투쟁과는 전혀 다른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역사는 계속되지만 개인은 매번 새로운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현재이다.” 이 말처럼 우리의 민주주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미래는 없다.

12월 3일 밤 10시 23분,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기자회견은 차마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가짜뉴스 같은 사건이었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군대가 이동했다. 거리에는 장갑차, 하늘에는 헬기. 병력은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를 향했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타고 온 차량에는 탄약이 실려 있었다. 경찰이 국회 출입을 통제했고 공수부대는 국회 본관 유리창을 깬 후 안으로 진입하였다. 이 끔찍하고 위험한 행동에 사람들이 움직였다. 국회의장과 의원들은 담장을 넘었고, 시민들은 원근각처에서 몰려와 군인들을 막고 경찰들에 항의하며 민주주의의 위협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 강력한 저항은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로 빛을 발했고, 이튿날 새벽 4시 27분 윤석열은 계엄 해제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_ 「1. 비상계엄」
윤석열은 특별한 방식으로 박정희의 부활을 기도했다. 비상계엄. 이 무모하고 신박한 방법을 통해 그는 1979년의 전두환을, 1961년의 박정희를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냈다. 그렇다. 박정희야말로 ‘군사쿠데타’의 악몽을 자유대한민국에 선사한 인물 아니었던가. ‘비상계엄’을 형식적 측면이 아닌 정치적 측면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일종의 ‘대통령이 조장한 비상상황’을 의미할 것이다. 박정희는 이런 방식의 ‘자기 주도적 비상상황’을 일으키는 데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_ 「1. 비상계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