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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꽃이 피네
열두 개의 달 시화집 플러스 四月
저녁달 | 부모님 |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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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최고의 명화와 시가 만나, 계절을 이야기한 큐레이션 시집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시리즈가 ‘열두 개의 달 시화집 플러스’ 시리즈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시리즈는 한국인이 오랫동안 사랑하고 간직해온 시와 명화 그리고 열두 달 계절의 느낌이 결합된 시화집으로, 출간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저녁달의 스테디셀러다. 새롭게 출간된 ‘열두 개의 달 시화집 플러스’ 시리즈는 화가의 작품을 더 풍부하게 수록하고, 화가와 시인들의 뜨거운 삶과 영혼이 깃든 이야기를 더하여 더욱 짙어진 예술적 감성과 깊은 울림을 담은 특별판이다. 기존 시리즈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폰트 크기와 판형을 키워 시와 그림을 더욱 풍성히 음미할 수 있고, 표지에는 계절의 느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그림을 넣어 책 자체를 하나의 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시리즈의 4월 편인 『산에는 꽃이 피네』는 봄을 주제로, 윤동주, 김영랑 등 총 19명의 봄 시를 한데 모아, 스위스의 유명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으로 시상을 표현했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과 문학에도 재능이 뛰어났던 파울 클레의 작품은 어린아이 같은 시선으로 직관적이고 천진난만하다. 새싹이 돋는 봄처럼 파릇하면서도 파스텔톤의 그림들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만들기도 한다. 봄 새싹처럼 파릇한 감성은 윤동주, 김영랑 등의 시와 어우러져 4월의 봄을 감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명화와 시가 만나 만들어낸
독특한 큐레이션 시집


최고의 명화와 시가 만나, 계절을 이야기한 큐레이션 시집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시리즈가 ‘열두 개의 달 시화집 플러스’ 시리즈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시리즈는 한국인이 오랫동안 사랑하고 간직해온 시와 명화 그리고 열두 달 계절의 느낌이 결합된 시화집으로, 출간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저녁달의 스테디셀러다. 새롭게 출간된 ‘열두 개의 달 시화집 플러스’ 시리즈는 화가의 작품을 더 풍부하게 수록하고, 화가와 시인들의 뜨거운 삶과 영혼이 깃든 이야기를 더하여 더욱 짙어진 예술적 감성과 깊은 울림을 담은 특별판이다. 기존 시리즈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폰트 크기와 판형을 키워 시와 그림을 더욱 풍성히 음미할 수 있고, 표지에는 계절의 느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그림을 넣어 책 자체를 하나의 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

‘열두 개의 달 시화집 플러스’ 시리즈는 하루 한 편의 시, 그리고 시와 어울리는 명화들을 통해 바쁜 일상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돕는다. 시를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잠시 따듯함과 안정감을 담은 선물이 될 것이다.

스위스 대표적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으로 4월의 시를 읽는다


시리즈의 4월 편인 『산에는 꽃이 피네』는 봄을 주제로, 윤동주, 김영랑 등 총 19명의 봄 시를 한데 모아, 스위스의 유명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으로 시상을 표현했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과 문학에도 재능이 뛰어났던 파울 클레의 작품은 어린아이 같은 시선으로 직관적이고 천진난만하다. 새싹이 돋는 봄처럼 파릇하면서도 파스텔톤의 그림들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만들기도 한다. 봄 새싹처럼 파릇한 감성은 윤동주, 김영랑 등의 시와 어우러져 4월의 봄을 감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4월의 화가와 시인 이야기’를 통해 기존에 수록된 그림 외에도 파울 클레의 명화 28점과 화가로서 그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다루며, 파울 클레의 작품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더불어 윤동주, 백석, 김소월 등 19명의 시인에 대한 소개도 자세하게 추가하여 명시와 명화를 더욱 깊이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소월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지은이 : 김영랑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저서로는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지은이 : 방정환
일제강점기에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아동문학가다.1899년 11월 9일 서울의 야주개(지금의 당주동)에서 태어나, 1913년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선린학교에 들어갔지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그만두고 천도교에 입교했다. 1917년 독립운동가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한 뒤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청소년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보성전문학교에 공부하던 중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이후 일본 도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했으며, 유학 중에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를 조직했다.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해 아동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고, 1923년 소년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국내 최초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색동회를 조직했다. 1928년 세계 20여 개 나라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어린이날 제정과 함께 소년 운동을 주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가중된 탄압과 스트레스로 1931년 7월 17일에 쓰러진 뒤 그 달 23일에 숨졌다.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현재 서울시 망우리공원에 묘소가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지은이 : 백석
(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지은이 : 윤동주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폐교 조치되자,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연길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그 외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도 시를 발표하였으며,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대학 시절 틈틈이 쓴 시 19편을 골라 시집을 발간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신변을 염려한 스승과 벗들의 만류로 뜻을 보류하였다.1943년 독립운동을 모의한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여 고향 용정에 묻혔다. 일제의 생체 실험 주사에 따른 희생으로 추정될 뿐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1948년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 내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지은이 : 정지용
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으로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시단 활동은 김영랑과 박용철을 만나 시문학 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搖籃同人)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유학 시절 『학조』, 『조선지광』, 『문예시대』 등과 교토의 도시샤대학 내 동인지 『가(街)』와 일본시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이런 작품 활동이 박용철과 김영랑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시문학동인을 결성하게 되었다. 첫 시집이 간행되자 문단의 반향은 대단했고, 정지용을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아 ‘지용의 에피고넨(아류자)’이 형성되어 그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이런 시적 재능과 활발한 시작 활동을 기반으로 상허 이태준과 함께 『문장(文章)』 지의 시부문의 고선위원이 되어 많은 역량 있는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유작으로는 『정지용시집』(1935), 『백록담(白鹿潭)』(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文學讀本)』(1948), 『산문(散文)』(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지은이 : 한용운
1879년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卍(萬)海)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에 수년간 머무르며 불경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독서를 통해 서양 근대사상을 접했다. 이 무렵 서구 문물과 세계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를 거쳐 돌아왔다. 1901년 고향에 돌아와 2년간 은신한 후 다시 집을 나와 방황하다가 1905년 백담사에서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08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조동종 대학림에서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이를 계기로 1913년 당시 조선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 비판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선언 준비 과정에서 최린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검사의 취조에 대한 답변서로서 세칭 「조선 독립의 서」를 집필했다. 1922년 출옥 후에는 각지를 전전하며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내설악 백담사에서 은거하면서 쓴 시집 『님의 침묵』을 1926년 간행하여 문단에 큰 파문을 던졌다. 50세를 전후하여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 은거하면서 불교 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였으며 『흑풍』 『후회』 『박명』 등의 장편소설과 상당수의 한시, 시조를 남겼다. 일제의 강요로 많은 지식인이 변절했을 때에도 끝까지 민족의 지조를 지켜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학병 출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두고 중풍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지은이 : 김억
1896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고 호는 안서(岸曙)다. 필명으로 ‘안서(岸曙)’, ‘안서생(岸曙生)’, 안서의 머리글자를 딴 ‘A. S.’, 에스페란토 이름인 ‘Verda E. Kim’ 등이 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 수업을 받았으며 1907년 정주 오산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1913년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1914년 부친의 사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으며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부임했다.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기자, 문예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직후까지 경성 중앙방송국에 근무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등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했다. 해방 후, 출판사인 수선사(首善社)의 주간을 맡았고 1946년부터 한국 전쟁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서 납북되어 북한 국영출판사의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납북 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철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김억은 1914년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잡지인 ≪학지광≫에 <이별>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작품으로 <야반>, <나의 적은 새야>, <내의 가슴>, <밤과 나> 등이 있다. 이후 개인적 감정을 중시하고 감각적인 시어와 개성적 리듬을 강조한 시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편, 1916년 9월 ≪학지광≫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베를렌의 시를 번역한 <내 가?에 내리는 비>를 발표한 이래, 꾸준히 서구의 시와 시론을 번역·발표했다. 특히, 1918년 9월 창간된 ≪태서문예신보≫에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해 소개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에 상징주의 시풍을 정착시켰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 ≪개벽≫, ≪동광≫, ≪영대≫, ≪조선문단≫, ≪학생계≫ 등에 참여했다. 1925년 이후, 민요시 운동의 중심에 서서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민요시 창작에 주력했으며 한시 번역에도 힘을 쏟았다.김억은 한국 현대시 최초의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를 위시해 ≪봄의 노래≫(1925), ≪금모래≫(1925), ≪안서 시집≫(1929), ≪지새는 밤≫(1930), ≪안서 시초≫(1941), ≪먼동이 틀 제≫(1947), ≪민요 시집≫(1948) 등을 상재했다. 그리고 베를렌, 구르몽, 보들레르, 예이츠 등의 시가 수록된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필두로, 타고르의 시를 번역한 ≪기탄자리≫(1923), ≪원정≫(1924), ≪신월≫(1924), 아서 시먼스(Arthur Symons)의 시를 번역한 ≪잃어진 진주≫(1924), 한시를 번역한 ≪망양초≫(1934), ≪동심초≫(1943), ≪꽃다발≫(1944), ≪야광주≫(1944), ≪지나 명시선≫(1944) 등을 남겼다.

지은이 : 마쓰오 바쇼
하이쿠의 완성자이며 하이쿠의 성인이라 불리는 마쓰오 바쇼는 에도 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1644년 일본 남동부 교토 부근의 이가우에노에서 하급 무사 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쓰오 무네후사이고, 어렸을 때 이름은 긴사쿠였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자 곤궁한 살림으로 인해 바쇼는 열아홉 살에 지역의 권세 있는 무사 집에 들어가 그 집 아들 요시타다를 시봉하며 지냈다. 두 살 연상인 요시타다는 하이쿠에 취미가 있어서 교토의 하이쿠 지도자 기타무라 기긴에게 사사하는 중이었다. 친동생처럼 요시타다의 총애를 받은 바쇼도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하이쿠의 세계를 접하고 기긴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요시타다가 25세에 갑자기 병사하자 충격을 받은 바쇼는 고향을 떠나 교토로 갔다. 이후 20대 후반까지의 행적은 밝혀진 바가 없다. 교토의 절에 머물며 불교 공부와 참선 수행을 했다는 설도 있다. 31세에 바쇼는 스승 기긴에게서 하이쿠 작법서를 전수받음으로써 독립된 하이쿠 지도자가 될 자격을 인정받았으며, 이해에 교토 생활을 접고 걸어서 지금의 도쿄인 에도로 향했다. 에도의 번화가 니혼바시에 도착한 그는 상점의 서기 일을 하거나 다른 시인의 하이쿠 문집을 필사해 주며 생계를 이었다. 에도 시내의 상수도 공사장에서 4년간 일하기도 했다. 이 사이에 하이쿠 습작생들이 하나둘 그의 밑에 모이기 시작했다. 언어유희에 치우친 기존의 하이쿠에서 탈피해 문학적인 하이쿠를 갈망하던 이들이 바쇼에게서 진정한 하이쿠 시인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산푸, 기카쿠, 란세쓰, 보쿠세키, 란란 등 수십 명의 뛰어난 젊은 시인들이 바쇼의 문하생으로 모임으로써 에도의 하이쿠 문단은 일대 전기를 맞이했다. 이 무렵 시가 궁정의 귀족들 사이를 떠나 무사와 상인들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에 바쇼의 문하생들은 다양했다. 왕실의 일원이나 의사들도 있었으며, 전직 무사, 화가, 쌀장수, 감옥에 갇혔다 나온 이들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하이쿠 지도자의 삶을 시작한 바쇼는 에도의 하이쿠 문단에서 나날이 명성이 높아 갔다. 부유한 문하생들의 후원으로 더 이상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고, 문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었다. 서른일곱 살에 '옹'이라는 경칭을 들을 정도로 하이쿠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삶을 누렸다. 그러나 37세에 바쇼는 돌연 모든 지위와 명예를 내려놓고 한겨울에 에도 접경을 흐르는 스미다가와 강 건너 후카가와의 작은 오두막으로 은둔해 들어갔다. 그곳은 해수면과 높이가 같은 저지대로 도쿄 만에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거친 물결에 노출된 지역이었다. 심한 태풍이 불 때는 대피해야 하고, 식수도 배로 실어다 주는 물에 의지하는 거칠고 척박한 땅이었다. 성공의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변두리로 은둔해 들어간 것은 하이쿠 지도자로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문하생 한 명이 파초 한 포기를 마당에 선물함으로써 오두막은 '파초암(바쇼안)'으로 불리게 되었고, 바람에 잘 꺾이는 파초를 무척 사랑해 바쇼는 자신의 호를 그때까지의 '도세이'에서 '바쇼(파초)'로 바꾸었다. 해학의 재치와 능란한 언어유희를 겨루는 작품들만 인기가 높던 시대에 바쇼가 목표로 한 것은 정적 속에서 느껴지는 감성, 인생의 고독과 허무,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시 속에 담는 일이었다. 웃음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탐구하는 시였다. 그래서 에도의 번화가를 떠나 오직 진정한 문학에 대한 갈구만을 가슴에 품고 파초암으로 들어간 것이다. 다른 하이쿠 지도자들의 눈에는 ‘패배’로 보였지만 바쇼의 문하생들은 후카가와로의 이사를 크게 환영하며 힘을 합쳐 스승의 생활을 지원했다. 바쇼가 문하생들로부터 존경받은 것은 단순히 시적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스승으로서의 실천적 자세 때문이었다. 이 무렵 오니쓰라, 라이잔, 신토쿠, 곤스이 등 뛰어난 시인들이 바쇼의 새로운 하이쿠 운동에 합류했다. 그리하여 바쇼를 통해 본격적인 하이쿠 문학이 탄생하고, 단순한 경구나 번뜩이는 재치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에 깃들인 깊은 시상을 17자의 제한된 형식 안에 응축해 표현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문학에서 바쇼는 '방랑 미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의 근본 사상은 안주의 거부였다. 문하생들의 후원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 한적한 거처를 마련하고 시인으로서의 명성도 얻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것이 불행으로 작용했다. 화재로 전소된 첫 번째 파초암 자리에 두 번째 파초암이 지어졌을 때가 40세, 그 이듬해부터 바쇼는 오두막을 거점으로 '인생은 곧 여행'이라는 사상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방랑은 생을 마칠 때까지 10년 동안 수천 킬로미터나 반복되었으며, 이 기간에 대표 하이쿠 대부분이 탄생했다. 41세의 가을, 바쇼는 은둔 생활을 박차고 방랑에 나섰다. 42세 여름까지 아홉 달이나 걸린 긴 도보 여행이었다. 이 여행의 핵심만을 기록한 짧은 기행문이 『노자라시 기행』이다. ‘노자라시’, 즉 ‘들판에 버려진 해골’이라고 제목이 붙은 까닭은 여행기 서두에 실린 하이쿠에 있다. '들판의 해골 되리라/ 마음먹으니/ 몸에 스미는 바람'. 44세의 늦가을에 바쇼는 또다시 6개월 동안의 『오이노코부미』 여행을 떠났다. 이제 바쇼의 이름은 일본 전역에 알려졌고, 가는 곳마다 문인들과 습작생들이 모여 그를 중심으로 하이쿠 모임을 열었다. 그리고 46세의 봄, 바쇼는 또다시 긴 방랑을 계획했다. 오쿠, 즉 일본 동북부의 깊숙한 지역들을 도는 대장정이었다. 지난번 여행들에서 가 보지 않은 내륙 오지들을 가기로 한 것이다. 바쇼를 바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여행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400킬로미터에 이르는 150일간의 여정을 기록한 『오쿠노호소미치』는 일본 기행문학의 꽃이라 일컬어지며 바쇼의 저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시와 마음의 여정 『오쿠노호소미치』 여행은 바쇼의 문학 인생의 정점이었다. 여러 대표 시가 이 여행 중에 탄생했으며, 자연과 합일된 순간들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건강은 나빠졌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속세의 소유와 이름을 버리고 운명을 바람에 맡긴 채 출가자처럼 떠돈 방랑이었다. 여행을 마친 바쇼는 고향과 교토 부근의 여러 장소에서 여행기를 수정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행의 구체적인 기록이 아니라 시와 산문이 어우러진 독특한 장르의 탄생이었다. 여행기에 실린 하이쿠들은 5·7·5 열일곱 자의 하이쿠가 독립된 시로 훌륭하게 자리 잡는 역사적인 출발이 되었다. 교토 부근의 여러 장소를 전전하던 바쇼는 여행을 떠난 2년 후인 48세의 겨울, 에도로 돌아왔다. 이 무렵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문하생들의 세력 다툼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으로 지친 그는 오두막 문을 닫아걸고 한동안 세상과 절연했다. 51세의 여름, 다시 오두막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 바쇼는 여행 도중 오사카의 길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생전에 좋아하던 비와코 호수 부근의 절 기추지 마당에 묻혔다.

지은이 : 고바야시 잇사
일본 에도 시대 활약했던 하이카이시(俳諧師, 일본 고유의 시형식인 하이카이, 즉 유머러스한 내용의 시를 짓던 사람)이다. 15세 때 고향 시나노를 떠나 에도를 향해 유랑 길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소바야시 지쿠아로부터 하이쿠(俳句) 등의 하이카이를 배웠다. 잇사는 39세에 아버지를 여윈 뒤, 계모와 유산을 놓고 다투는 등 어려서부터 역경을 겪은 탓에 속어와 방언을 섞어 생활감정을 표현한 구절을 많이 남겼다.

지은이 : 윤곤강
1911년 9월 24일에 충남 서산군 서산읍 동문리 777번지에서 부친 윤병규(尹炳奎)와 모친 김안수(金安洙)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아호 ‘곤강(崑崗)’은 천자문의 “금생려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崑崗)”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930년에 일본 센슈(專修)대학에 입학해 ≪시인춘추(詩人春秋)≫로 활동하던 그는 1931년 11월에 종합지인 ≪비판(批判)≫(7호)에 < 성터에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이 ≪비판≫을 비롯해서 ≪조선일보≫, ≪우리들≫, ≪중앙≫, ≪조선중앙일보≫ 등에 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1933년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신계단(新階段)≫(8호)에 평론 <반종교문학의 기본적 문제>를 발표해 시뿐만 아니라 비평 활동도 같이 한다. 1934년 2월 10일 현실 비판적인 작품 활동을 해 오던 윤곤강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인 ‘카프(KAPF)’에 가입한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7월에 전북 경찰부로 송환되었다가 장수(長水)에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12월에 석방된다. 당시 수감 생활의 모습은 그의 시 <향수 1>, <향수 2>, <향수 3>, <창공>, <일기초>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처음으로 소설 <이순신>을 ≪형상≫(1호)에 발표한다. 이후 그는 충남 당진읍 유곡리로 낙향했다가 1936년에 상경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다.1937년에 서울의 사립학교인 화산(華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그의 첫 시집 ≪대지(大地)≫(풍림사)를 발간하게 된다. 이듬해에 제2시집 ≪만가(輓歌)≫(동광당서점)를 펴낸다. 그리고 1939년에는 제3시집 ≪동물 시집≫(한성도서주식회사)을 발간하게 되고, 다음해에 제4시집 ≪빙화(氷華)≫를 출간하는 등 4년에 걸쳐 시집 네 권을 펴내는 왕성한 모습을 보여 준다. 1943년에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학교 전신)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그는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 시부회(詩部會) 간사로 임명되기도 한다. 1944년 동거하던 김원자와 사별하게 된 그는 충남 당진읍 읍내리 368번지로 낙향한다. 이 시기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면 서기로 근무한다.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상경한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카프에 가담해 식민지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출하던 작품 세계가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모교인 보성고보 교사로 근무하게 되고, 이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을 탈퇴한다. 이 시기 문우들과 함께 해방 기념 시집인 ≪횃불≫을 발간한다. 1947년 그는 성균관대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편주서인 ≪근고조선가요찬주(近古朝鮮歌謠撰註)≫(생활사)를 펴낸다. 1948년에 중앙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고독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 준다. 제5시집 ≪피리≫(정음사)와 제6시집 ≪살어리≫(정음사)를 펴냈으며, 김기림의 ≪시론≫에 이어 두 번째로 시론집 ≪시와 진실≫(정음사)과 찬주서 ≪고산가집(孤山歌集)≫(정음사)을 발간한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50년 1월 7일 서울 종로구 화동 138-113번지에서 작고하게 되고, 충남 당진군 순성면 갈산리에 안장된다. 제주 조각공원과 보성고교, 그리고 충남 서산시 서산문화회관과 그의 묘소 입구 등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지은이 : 오일도
1901년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영양의 천석 거부 오익휴의 차남으로 본명은 희병(熙秉)이었다. 일도는 아명이었는데, 후에 필명으로 사용했다. 한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집안이라 8세부터 14세까지 한학을 공부했다. 이때 공부한 한학의 영향으로 한시를 창작했으며 한시 78수를 남겼다.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굉장히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한다.17세에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면서 근대 교육 체계 속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학습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1922년 18세 때에 경성제일고보에 진학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철학과에 진학했다. 유학 중이던 1925년 ≪조선문단≫을 통해 <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초기 시들은 비극적인 낭만성과 압축미가 있어 높은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 주었다는 평을 받았다.릿쿄대학(立敎大學)을 졸업하고 1929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 중앙, 휘문 등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전하나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오일도가 집안이 부유해서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3년 ≪현대시학≫에 그의 유고가 발표되면서 함께 실린 김해성(金海星)의 <오일도의 시>에 그가 교편을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 유고 시집 ≪저녁놀≫에도 그러한 기록이 실린 것으로 보아 한동안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것이 사실로 보인다.귀국 후 여러 시인들과 교우를 쌓았다. 특히 이하윤과는 절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는 오일도가 시인으로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다. 이는 특히 그가 1935년 시 전문 문예지 ≪시원≫을 창간한 것과 관련이 깊다. ≪시원≫은 범시단적 잡지로 출범하면서 여러 시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카프 계열의 시인들 작품을 싣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오일도는 ≪시원≫을 발간하면서 잡지 발행인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지만 안타깝게도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채 1년이 못 되는 기간 동안 총 5호 정도만 발간했지만 ≪시원≫은 1930년대 한국 문단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그 외에 1936년에 ≪을해 명시 선집(乙亥明詩選集)≫과 1938년에 조동진의 유고 시집 ≪세림 시집≫을 발간하는 등 편집자로서의 재능도 발휘했다. 이들 시집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료들로 평가되고 있다.≪시원≫의 종간은 오일도의 심신에 큰 충격을 남겼다. 그는 이후 폭음 등으로 건강을 상했으며 결국 1942년 고향으로 낙향해 요양하게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해 서울로 올라가 ≪시원≫을 복간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심화되어 ≪시원≫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대해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게다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오일도는 귀향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결국 1946년 고향 영양에서 투병 중에 병세가 악화되면서 여의전병원에서 운명했다. 사인은 과도한 폭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추정된다.오일도 시인의 대표작으로는 <내 소녀>, <도요새>, <지하실(地下室)의 달> 등이 있다.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오일도 시인은 ≪시원≫을 창간함으로써 1930년대 문단에 다양성을 가져오고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과 함께 문학사적으로 조명받고 있다. 1973년 ≪현대시학≫을 통해 유고 시들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년 뒤엔 1976년 유고 시집 ≪저녁놀≫이 근역서재에서 발간되었다. 이들 유고는 오일도 시인이 생전에 조지훈 선생에게 맡겨 두었던 것인데, 조지훈 선생 사후 조지훈 선생의 고모인 시조 시인 조애영 선생이 묶었다. 이후에 ≪지하실의 달≫이 문화공론사에서 출간되었으며 1988년에는 영양 출신 시인 이병각, 조지훈, 조동진, 오일도 네 사람의 시를 묶어 낸 ≪영양 시선집≫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 경북 영양에는 오일도 생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그 인근에 오일도 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지은이 : 이장희
1900년 11월9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에서 당대 손꼽히는 부호이자 전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과 박금련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박금련은 이병학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이장희의 처음 이름은 양희였으나 그가 20세 되던 해인 1920년 4월에 개명한 호적에는 장희(樟熙)로 고친 바 있고 뒤에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23∼1924년 사이에는 장희(章熙)로 줄곧 썼는데 이것이 필명이 되었다. 아호는 고월(古月. 혹 근자에 ‘孤月’·‘苦月’ 등을 그의 아호의 하나로 보고자 하는 일이 있으나 그는 아호로서 ‘古月’만을 썼을 뿐이다)이다. 아버지 이병학은 장희의 생모 박금련이 1905년 사망한 이래 박강자, 조명희 등을 맞아들여 슬하에 12남 9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 유아 때 사망한 7남매(3남 4녀)를 제외하면 모두 9남 5녀의 14남매가 된다. 이장희는 아호 고월 이외에 어렸을 적에 ‘꿀돼지’, ‘꿀봉’, ‘박쥐’와 같은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으며 1905년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박금련이 사망한 후 들어온 계모 박강자는 1923년 8월 사망하기까지 이병학과의 사이에 11남매를 두었다. 1906년 이장희는 6세로 대구보통학교에 입학해 1912년 졸업했으며, 1913년 13세로 일본에 건너가 경도중학교에 입학한다(하나 근자 조사해 확인한 결과 이장희가 경도중학에 입학 내지 졸업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1918년 18세로 귀국했는데 일설에는 일본 청산학원을 지망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근거는 극히 희박하다.1924년 24세 때 5월 문예 동인지 ≪금성≫ 3호에 이장희라는 필명으로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머리>, <불노리>,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가운데 <봄은 고양이로다>는 그가 첫 번째로 발표한 시 작품 중에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잡지에 톨스토이의 소설 <장구한 귀양>을 번역해 실었다. 12월 여성 전문지 ≪신여성≫(2권 12호)에 시 <동경>을 발표했는데 혹 일설에는 이 작품의 모티프는 이장희가 일본 경도에 체류했을 때 알고 지냈던 소녀 에이코에게서 찾은 것이라고 한다. 1925년 25세가 된 그는 ≪신여성≫(3권 2호, 1월호)에 시 <석양구>를 ,종합 문예지 ≪생장≫(5호, 5월호)에 <고양이의 꿈>, <가을밤>을 발표하고 시사 종합지인 ≪여명≫(1호, 6월호)에 <청천의 유방>과 <비 오는 날>을, ≪신민≫(5호, 9월)에 <사상(沙上)>, <비인 집>을 발표한다. 계속해서 ≪신민≫(6호, 10월호)에 <달밤 모래 우에서>와 <연> 등을 발표한다.1926년 26세로 ≪신민≫(9호, 1월호)에 시 <겨울의 모경>을, ≪여명≫(7호, 6월호)에 <봄 하눌에 눈물이 돌다>와 ≪신민≫(16호, 8월호)에 <하일 소경>을, ≪신민≫(19호,11월호)에 <들에서>와 <눈>을 발표한다.1927년에는 ≪조선문단≫ 20호, 4월호)에 시 <가을ㅅ밤>을, ≪신민≫(26호, 6월)에 <눈은 나리네>, <봄철의 바다>를, ≪신민≫(28호, 8월)에 <저녁>을 발표했으며, 이듬해에는 ≪여시≫(45호, 6월호)에 시 <저녁>, <녀름ㅅ밤 공원에서>를 발표한다.1929년에는 ≪신민≫(45호, 1월호)에 <버레 우는 소리>, <귓드람이>를, ≪문예공론≫ (1호, 5월호)에 <적은 노래>, <봉선화>, <눈 나리는 날>을, ≪중외일보≫(11월 14일)에 <어느 밤>을 발표한다. 그리고 발표연대 및 게재지 미상의 <여름밤>, <쓸쓸한 시절>을 남겼다. 11월 3일 오후 3시경, 이장희는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 본가의 머슴이 거처하던 작은 방에서 극약을 복용하고 유서 한 장,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두 계모와 배다른 형제와의 갈등,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해 항상 일본인의 통역을 종용하던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 버린 자식 취급과 냉대로 인해 자존심 강하고 섬세하던 그는 죽기 2, 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살하기 몇 달 전,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외출도 않고 거의 두문불출이었다. 다만 죽기 3, 4일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초 오상순의 거처를 찾아갔다. 공초가 머물던 여관집 주인이 한 달 전에 동래에 가고 없다고 말하니, 안색이 돌연 창백해지며 어깨를 툭 떨어트리고 멍하니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서서 있다가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곤 힘없이 발길을 돌리더란 것이다. 주인은 하도 이상하기에 문 밖에 서서 황혼 가운데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양을 멀리 바라본즉 곧 쓰러질 듯해서 마음이 몹시 안됐더라고 했다는 것이다(공초의 술회). 그 후 그는 2, 3일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수없이 금붕어를 방바닥에 그려 놓고 1929년 11월 3일 오후에 극약을 마셨다고 전해진다.장지는 선산인 대구부 신암정으로 정해져 유해가 안치되었으나 지금 현재 그의 묘소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지은이 : 장정심
시인. 1898년 개성출생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유치사범과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시작(詩作)은 1927년경부터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잡지 《청년(靑年)》에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등단했다. 그녀의 시는 서정시, 시조, 동시로 구성되며 조국과 자연, 동심을 어우르는 시를 썼다. 신앙을 바탕으로 섬세한 내면세계를 담백하고 담담하게 표현하는 시를 씀으로써 선구자적 소임을 다한 여성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지은이 : 가가노 지요니
加賀千代尼. 1703~1775. 여성 시인. 원래 이름은 ‘지요조(千代女)’이나 불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지요니’라고 불린다. 나팔꽃 하이쿠로 친숙하다. 바쇼의 제자 시코가 어린 지요니의 재능을 발견하고 문단에 소개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지은이 : 사이교
西行. 1118~1190. 헤이안 시대의 승려 시인이며 와카 작가(歌人)이다. 속명은 사토 노리키요(佐藤義淸). 무사의 신분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일본을 노래했다. 그의 가문은 무사 집안으로 사이교 역시 천황이 거처하는 곳(황거)의 북면을 호위하는 무사였다. 하지만 그는 1140년에 돌연 출가하여 불법 수행과 더불어 일본의 전통 시가인 와카 수련에 힘썼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와카를 남겼는데, 《신고금와카집(新古今和歌集)》에는 그의 작품 94편이 실려 있다. 와카(和歌)와 고시쓰(故?)에 능통하였던 사이교는 스토쿠 천황의 와카 상대를 맡기도 했으나, 호엔 6년(1140년) 23세로 출가해 엔기(円位)라 이름하였다가 뒤에 사이교(西行)로도 칭하였다. 승려로 은둔하게 된 뒤 사이교는 구라마 산 등, 히가시야마와 사가 근교에 초막을 짓고 살며 전에 일한 적 있는 다이켄몬인의 뇨보들과도 교류하였고, 요시노와 구마노, 무쓰, 사누키 등 일본 곳곳을 돌며 불도를 수행하거나 우타마쿠라(歌枕)를 찾기도 하고, 때로 와카를 지었다.

지은이 : 다이구 료칸
1758~1831. 에도시대의 승려이자 시인. 무욕의 화신, 거지 성자로 불리는 일본의 시승이다. 시승이란 문학에 밝아, 특히 시 창작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불교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섯 줌의 식량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말이 뜻하듯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무욕과 무소유의 최고 경지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료칸은 살아가는 방도로 탁발, 곧 걸식유행(乞食遊行)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일본 곳곳에 세워진 그의 동상 역시 대개 탁발을 하는 형상이다. 료칸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시를 써가며 내면의 행복을 유지하며 청빈을 실천했고, 그의 철학관은 시에 그대로 담겨 있다.

지은이 : 다카이 기토
高井?%董. 1741~1789. 30세 때 요사 부손에 입문했다. 입문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내 부손을 보좌하여 일가를 묶어 냈다. 1779년에는 부손과 둘이서 오사카 · 셋츠 · 하리마 · 세토 우치 방면으로 음행의 여행에 나섰다. 온후한 성격으로 부손의 제자 모두와 친교를 가졌다. 부손 모음집을 편집하는 등 하이쿠의 중흥에 진력했다.

지은이 :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在原業平. 825~880. 헤이안 시대의 귀족. 시인.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825년 헤이제이 천황의 첫째 황자인 아보 친왕과 간무 천황의 딸인 이토 내친왕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나리히라는 헤이제이 천황의 손자이자 간무 천황의 손자이기 때문에 천황 가문의 적통이었다. 그러나 구스코의 난에서 헤이제이 천황 세력이 패하면서 그의 후손들은 황위 계승과 멀어지고 황통은 사가 천황의 후손에게 이어졌다. 826년 사가 천황은 헤이제이 천황의 후손들에게 아리와라노아소미(在原朝臣)라는 성을 내려 황족이었으나 신민의 신분으로 강하시켰다. 《삼대실록(三代實錄)》에 의하면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수려한 외모와 자유분방하고 정열적인 삶을 살며, 당시 관료에게 필요한 한문학보다는 사적인 연애 감정 등을 읊는 와카(和歌)에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한다.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에 그가 읊은 와카 30수가 실려 있고, 이 작품의 가나(假名, 일본 고유의 글자)로 된 서문에는 그의 정열적 가풍에 대한 평이 실려 있다. 와카 명인으로서 6가선, 36가선 중 한 사람인 그는 설화집 《이세 모노가타리(伊勢物語)》의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목차

一日 하이쿠 _나리히라
二日 청양사 _장정심
三日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_김영랑
四日 산유화 _김소월
五日 사랑의 전당 _윤동주
六日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_김영랑
七日 산골물 _윤동주
八日 꿈밭에 봄 마음 _김영랑
九日 하이쿠 _잇사
十日 그 노래 _장정심
十一日 하이쿠 _지요니
十二日 돌팔매 _오일도
十三日 공상 _윤동주
十四日 봄은 간다 _김억
十五日 하이쿠 _기토
十六日 양지쪽 _윤동주
十七日 고양이의 꿈 _이장희
十八日 울적 _윤동주
十九日 해바라기씨 _정지용
二十日 위로 _윤동주
二十一日 오줌싸개 지도 _윤동주
二十二日 애기의 새벽 _윤동주
二十三日 형제별 _방정환
二十四日 도요새 _오일도
二十五日 하이쿠 _바쇼
二十六日 꽃이 먼저 알아 _한용운
二十七日 봄2 _윤동주
二十八日 새 봄 _조명희
二十九日 달밤 _윤곤강
三十日 저녁 _이장희

4월의 화가와 시인 이야기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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