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주향숙 시집 『너는 야구를 좋아하는 걸까 야구공을 좋아하는 걸까』가 시인동네 시인선 252로 출간되었다. 주향숙의 이 시집은 기억의 이면과 개성 있는 시적 이미지의 차용을 넘어서서 좀 더 근원적인 갈망과 막연한 노스탤지어의 정서가 느껴진다.
출판사 리뷰
사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 되기까지
주향숙 시집 『너는 야구를 좋아하는 걸까 야구공을 좋아하는 걸까』가 시인동네 시인선 252로 출간되었다. 주향숙의 이 시집은 기억의 이면과 개성 있는 시적 이미지의 차용을 넘어서서 좀 더 근원적인 갈망과 막연한 노스탤지어의 정서가 느껴진다. 이는 시적 욕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모르고 지나왔던 시간에 대한 시적 형상화 과정으로도 보인다. 이때 노스탤지어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뜻하기보다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열망, 염원, 바라봄에 가깝다. 하여, 주향숙 시집을 읽는다는 건 주향숙의 노스탤지어를 읽는다는 것이고, 그건 주향숙 시의 매력에 빠져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해설 엿보기]
시인은 자기가 창작한 시의 첫 독자이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시가 말하는 바를 자신이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깨닫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주변의 사물들을 혹은 자신 안에 있지만 불분명한 존재들을 그냥 흘려보내거나 무심히 대하지 않는다면 시인은 그들과 서로 주고받은 교류를 작품으로 남길 수 있고 그것 자체가 그가 보낸 시간의 기록물이자 내 고독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없는 풍경은/기대어 서고 앉아도 보고 말을 걸면/의미가 생기”듯 “열리지 않는 문고리”도 “말을 걸면 화분이 되”고 “풍경”(「구례」)으로 다시 태어난다. 여기에서 얻는 만족과 기쁨이 창작의 절박함 때문에 받는 괴로움을 상쇄한다면 시인은 어떤 식으로든 구원받는다. 이 시집에는 앙리 루소의 그림 〈잠자는 집시〉를 보고 영감을 받아 형상화한 「집시」라는 작품이 있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달빛에 이끌려 어디까지든 가는 집시는 창조가 우리에게 주는 자유를 의미한다. 하루 일과에 지쳐 단잠에 빠진 집시 여자를 해치지 않는 사자와 검은 집시 여인, 달빛, 만돌린, 지팡이, 꽃병을 사막 위에 배치하여 생성된 몽환적이고 낯선 이국적인 이미지는 이미 현실 질서 너머의 세계이다. 한 편의 시와 같은 이 그림에서 시인은 본인이 갈망하며 창조하고픈 자유와 구원이 실현된 세계를 마주했기에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사자를 보고
사막에 누워 있는 여자를 보고
눈물이 났다
(알 수 없는 일)
쏟아질 것 같은 하늘과
동그란 달빛 때문에
사막의 전갈이 나를 쏜다 해도
(이것은 슬픔이 아니다)
여자 곁에는 만돌린 손에는 지팡이
여자는 그을렸고
까만 맨발로 잠이 든 여자
냄새를 맡는 사자는 마치
여자를 구원하는 전사인 것만 같고
여자는 꿈결인 듯 미소를 짓고
어디까지든 가는 것이다 집시는, 달빛 때문에
― 「집시」 전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너는 야구를 좋아하는 걸까 야구공을 좋아하는 걸까』라는 질문으로. 처음엔 경기의 흐름, 전략, 선수들의 플레이를 즐기는 야구라는 스포츠를 좋아했지만 나중엔 야구공에 집착하게 된 건 아닌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의미부여는 다양하겠지만 굳이 본질과 본질이 아닌 것을 구별하며 어떤 쪽이어야 한다고 답할 필요는 없다. “완전한 것은 없”고 “처음은 변하기도”(「모자이크」) 하니까 말이다. 경계에서 외줄을 탔던 오랜 고독의 시간 덕분인지 그녀는 공중에서 지상으로 내려서는 세상에 대응하는 균형 감각을 갖추고 있다. 이는 살아가면서 하나를 지키느라 잃어버린 다른 것들에 대한 반성이자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나머지 것들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삶에 대한 태도로도 읽힌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향숙 시인의 ‘시적인 것’에 대한 고민과 회의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고도의 은유로 함축해서 독자의 현명함과 상상력을 활성화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보이는 것들에 대한 소박하고 성실한 탐색의 시선 또한 균형 있는 삶과 시 읽기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된다.
― 장예원(문학평론가)
[시인의 산문]
내가 사는 소읍 의령 서쪽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빗방울 화석이 있다.
떨어지는 각도 같은 것.
찰나의 몸짓을 음각하는 일 같은 것.
가여운 나의 마음을 화석에 가두었다.
구석이 오랜 그의 자리였죠
먼 곳에서 소식이 왔어요 부고가 왔어요
슬퍼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봐요
그러니까 슬퍼졌어요
우리가 아는 사이였던가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죽어요
우리는 모르는 사람 하지만,
너무 쉬워요 이별이
첫 배냇저고리 같은
죽어서 더 조용한
눈이 커다란 인형인 줄 알았어요 담벼락 아래
노란 민들레처럼
한쪽 눈은 감고 다른 쪽 눈은 떴어요
한밤중에 아버지가 사다 주신 인형도 그랬어요, 찡긋
별이 빛나는 푸른 밤에
세상의 모든 슬픔
하품을 해요
― 「요요」 전문
꿈같은 거 꾸지 말고 당신한테 가지 말고
그냥 살까 하다가도
여자는 아이를 낳고 사과는 사과를 낳고
누는 누를 낳고
아이를 낳는 동안 구름은 흩어졌고 여자는
첨탑 위의 시계처럼 늙어갔네
눈을 감았다 뜨면
사과밭의 사과는 익어가고
전선 위
참새는 떨고
노래를 잊은 기타 줄은 흔들리고
노래는 의자에서 미끄러지고
사과가 익어가는 마을에는
은하수가 내리고
사랑 같은 거 하지 말고 당신한테 가지 말고
그냥 살까 하다가도
나는 나를 낳고
누는 누를 낳고
― 「사과는 사과를」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주향숙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지금은 수학을 가르치며 살고 있다.
목차
제1부
요요13/사과는 사과를14/토마토16/스피카18/연필의 태도20/창살22/모자이크23/이재24/캘리포니아 학교26/페스츄리28/묘비명30/풍장31/사과나무 숲32/가좌동34/사월36/남극37/물거품처럼 나는 자꾸 말을38/그림자 일기40/솟대42/장마43/백야44
제2부
달맞이꽃47/평범하게 육교48/코스모스50/모메꽃51/침낭에 누워보기52/숨바꼭질하는 별을 보았니?54/시인55/자기나무56/개양벚꽃58/봄날59/지족60/수요일의 다큐62/교실63/푸에르토 라피세스64/첫눈66/벽조목67/스페인광장68/와디70/라디오71/통영72
제3부
밀양75/경사로76/구례78/안동79/훌륭한 식사80/조차(潮差)82/무동83/독립영화84/집시86/무밥87/국경의 밤88/몽골(夢骨)90/종이집91/남성동(南城洞)92/집으로 가는 길94/사진의 힘95/오타루96/꽃다발97/매물도98
해설 장예원(문학평론가)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