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며 현재 가장 믿음직한 SF를 써내는 소설가로 꼽히는 해도연 작가가 세 번째 소설집 《진공 붕괴》를 출간한다. 이 책을 가리켜 “개연성 있는 과학적 상상력에 푹 빠지기 좋은 기회”라고 평한 정보라 소설가의 말처럼 해도연 작가가 직조해낸 우주에는 우주선과 우주인, 미지의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건 물론 각 존재의 근거와 이유도 제시된다. 이는 우주를 수학의 대상으로, 또 사랑과 믿음과 배신과 광기가 펼쳐지는 삶의 형형한 무대로 바라보는 작가의 복합적이고도 치밀한 시선 덕에 가능하다. 많은 SF 작가가 ‘해도연’ 세 글자를 신뢰하는 배경이다.현직 우주과학 연구원이기도 한 해도연 작가는 장편소설 《베르티아》 《마지막 마법 사》, 소설집 《위그드라실의 여신들》에서 미래와 외계를 주제로 독창적인 세계관을 선보인 동시에 영미 SF소설 《라스트 휴먼》을 우리말로 옮기는 등 소설가와 번역가 양쪽을 오가며 다방면으로 활동해왔다. 《진공 붕괴》는 작가가 이토록 부지런히 다져온 문학적 감수성과 지적 상상력의 총체라 할 수 있는 여섯 편의 매력적인 단편들을 싣고 있다.지구도 달도 태양도 보이지 않는다. 기둥 반대편에 있는 걸까? 셋 다? 어지간히 멀리 나왔나 보다. 라미는 천천히 테라스 우측 가장자리로 기어가서 고개를 살짝 내민다. 여전히 기둥 너머를 보기에는 역부족이다. 라미는 다시 돌아와 주변 별들의 위치를 살핀다. 방향이라도 짐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별이 너무 많다. 밝은 별만 골라서 보여주는 지구의 탁한 대기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러브조이는 사람과의 대화 중에 일부러 약간의 공백을 넣는다. 실제 사람이 상대방의 말을 소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하지만 방금 러브조이는 라미의 목소리가 멈추기도 전에 대답했다. 라미는 이것이 인공지능의 긴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라미가 다시 한번 묻는다.
상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조슈를 향해 몸을 돌렸다. 블로그는 수십 년 전에 잠깐 유행하다가 자취를 감춘 낡은 매체였지만, 최근에 빈티지 웹이 유행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상미가 블로그에 이런저런 글을 쓰는 건 조슈가 떠난 이후로 전전하던 취미 중 그나마 오래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옛 연인, 아니 그저 그런 옛 연인도 아니었다. 약속을 깨고 사라진 옛 약혼자가 내 블로그를 혼자 들여다보며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니. 분노와 불쾌함, 그리고 약간의 설렘이 섞인 묘한 기분이 상미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해도연
소설을 쓰며 우주과학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편소설 《베르티아》 《마지막 마법사》 《라스트 사피엔스》, 소설집 《위대한 침묵》 《위그드라실의 여신들》, 과학 교양서 《외계행성: EXOPLANET》 등을 썼으며 장편소설 《라스트 휴먼》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