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여덟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윤석원의 소설집 『쑥맥들』은 윤석원의 장편소설 『광주에 가고 싶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민주를 되새겨 보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즉 자아와 세계 사이의 심연과 같은 균열을 『광주에 가고 싶다』에서 보여주면서 마무리했다면, 이번의 소설집은 간극이 원환적 고리를 이루면서 하나가 되어 행복한 시대를 펼쳐 보여줄 것인가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쑥맥들‘역사와 전통이 찬란한 룡대龍大중학교’는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모교다. 나이도 불문, 때와 장소도 없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문 누구나 꼭 그렇게 힘주어 모교를 소개했다. 큰 용과 용대가리 중 뭘 더 선호했는지 아직도 결론에 이르지 못했으나, 하여튼지 자나 깨나 모교를 사랑하는 마음들은 한결같았다. 뭔 허풍이고, 개 뻥이냐 따져도 어림없고 어쩔 수 없다 했다. 언제부터 누가 먼저 그랬는지 알 수도 없었다. 하여간 졸업생 모두는 흑룡이든 백룡이든 청룡이든 승천하는 용처럼 되라는 염원이 그냥저냥 전통으로 전해졌으리라. 덕분인지 이름만으로도 알만한 훌륭하고 또 출중한 선후배들도 다방면에 여럿 있다. 도시의 명문학교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아무튼 그들 모교는 잘라도道 목살군郡 심두면面 죽수리里에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인구절벽을 일찌감치 극복할 수 없었기에 몇 해 전 폐교가 되었고, 군 소재지 학교로 통합되었다.오늘 27회 재경모임이 있는 날이다. 한때 육십여 명 넘게 참석하기도 해서 열정이 넘쳤다. 그리고 더 잘나갈 때는 재경 총동문회를 좌지우지할 만큼 힘을 과시했지만 오늘은 스물셋이 모였다. 이만하면 그래도 그 열의가 아직 살아있다는 그들만의 자긍심이요, 증표였다. 몇 놈이 늦게라도 참석한다고 설레발이지만 나타나 봐야 알 일이고. 여자는 달랑 둘 나왔다. 졸업 당시 다섯 학급 중 여학생은 한 반이었다. 지역적 특성도 조금 있었겠고, 복잡한 생각 아니라도 여러 불균형한 모습에서 비롯된 그 시절의 결과물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랬는지 여자 동창들 존재감이 덜한 것도 사실이고, 총동문회도 여성 참여는 귀했다. 무엇보다 오늘 참석자가 적은 이유는 그 뜬금없던 코로나19 여파가 크다. 나라 안팎으로 무섭게 감염되고, 사망자가 늘어날 때는 예측이 불가능할 만큼 공포였다. 나라마다 방역에 대한 차이는 있겠지만 현재 우리는 한고비를 넘은 것 같다고 마스크 착용의무를 완화했다. 했는데도 마스크를 쓴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은 그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나이 탓도 있으리라. 그들 스스로가 ‘그새’와 ‘어느새’라는 말을 편안하게 나불대고 있고, 또 그럴 것이 이제는 만 나이를 사용하기로 했어도 어차피 노인으로 포함되었으며, 지하철 무임승차를 하네마네, 노인 나이를 더 올려야 한다는 등등의 중심에 선, 그래 저래 말도 탈도 많은 ‘58 개띠’ 그들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서둘러 소풍 끝내고 돌아간 놈들도 여럿 있다. 일찍 도착해 몇 순배가 돌았는지 벌써 거나해진 놈들이 저 안쪽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썩하다. 내 집처럼 편안하라고, 또 동창들을 위해서 통 크게 저녁 장사도 접었단다. 요강인지 호강인지 모처럼 대접받는 기분, 오랜만일 것이다. 공식적으로 딱 3년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썩 괜찮은 친구였고, 검은 호랑이처럼 살고자 했던, 죽는 날까지 그들의 회장을 할 것 같았던 공달수가 임인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그냥 웃자고 했던 말인데, 공교롭게도 달수는 소원대로 죽을 때까지 회장 자리를 지켰던 셈이다. 오늘 급하게 모임을 주선한 이유도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해서다. 뭐 그리 대단한 직職이라고 이미 두 놈이 물밑작업을 하고 있었다. 달수를 최고라 믿고 의지했으며, 많은 것이 비슷했던 현 총무인 모병식이 벌써부터 회장되겠다고 준비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어느 조직이든 리더가 달수처럼 오래 버티면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라던, 국가공무원을 퇴직한 고복만도 후보로 나왔다. 면 소재지에 살았던 둘은 어려서부터 서로가 못난 놈이라 꼬집고 싸웠으며, 오늘날까지도 들었다 놨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사이다.드디어 총무가 식당 출입구에서 마이크에 바람을 ‘후후’ 넣었다. 우선 느닷없게 세상을 뜬, 우리들 친구 공달수 회장의 명복을 한 번만 더 빌자며, 술잔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잔을 들었지만 이건 또 뭐지!? 하는 표정들이 많다. 그 막간을 이용해 오늘 논의하고 결정할 용건을 꺼냈다. 그리고 촌놈들이 서울에 올라와 계묘년, 이 봄날까지 무탈하게 살았고, 또 코로나를 잘 견디고 요렇게 참석해줘서 고맙고 감사하단다. ‘역사와 전통이 찬란한 룡대중학교’ 졸업생 우리는 사는 날까지 명문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우리들 모임을 더 발전시키잔다. 공감하는 놈도 있고, 서두가 너무 길다 불평하는 놈도 있어서 총무 모병식 사설은 더 진행되지 않았다. 누군가 고복만도 한마디 하라 부추겼다. 기다렸다는 듯, 복만이 일어나 역사와 전통 타령은 그만 우려먹고, 우리도 실속을 차리잔다. 이제부터는 누가 먼저 갈지 모르고, 다음 모임 때 누가 또 빠지게 될지 알 수 없다. 회비도 현실화시키고, 더 자주 만나서 자유롭게 놀아보잔다. 둘 다 옳은 말을 했는데, 벌써부터 병식이 의견에 반대하는 놈도 있고, 복만이 의견을 견제하는 놈도 있다. 지지와 견제만으로도 금세 분위기가 썰렁하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럼 노망 전조증상들인가? 물론 민주국가에서 의견조정이나 타협과 협력은 당연하다고 했다. 막무가내, 고집불통으로 몰아붙이는 게 문제지. 시작부터 놈들의 눈치코치가 뜨거워져 회장선출 끝이 기대되는 바이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식탁 한쪽은 병식을, 또 한쪽은 복만을 좋아하는 놈들 끼리끼리 앉아있다. 서로 웃고 떠들고 있지만 속내를 숨기고 있는 꼴들이 꼴같잖게 그럴듯해 보인다. 요즘은 동문회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모임에서도 감투를 서로 쓰지 않겠다고 난리들인데, 참 별일인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윤석원
명지대학교 대학원(문예창작 전공) 졸업.건국대학교 법학과 졸업.1993년 단편소설 「춤」으로 등단.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장편소설집> 『환생유혹』(上下권, 태성출판사, 1997)『어머니 품 안에는』(그림글자, 2006)『광주에 가고 싶다』(새미, 2011)<단편소설집> 『남자가 사는 법』(정은문화사, 2004) 『우리 고향』(도화, 2017)『쑥맥들』(청어,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