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경쟁사회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 흘러다니는 액체인간들의 서글픈 초상. 정진경의 평론집 『액체인간의 자화상』이 푸른사상 평론선 44로 출간되었다. 전자기술의 발달로 가속화되는 사회의 변화 속에서 시인들이 자기의 정체성과 실존적 공간을 고민하는 문제의식을 평론집에 담았다. 실존적 공간의 변화는 오랫동안 인간의 가치관을 지배해온 이분법적인 사유를 해체한 것은 물론 인간의 정체성을 기호화, 물질화하는 데에 한몫하였다.
출판사 리뷰
IT의 발달로 누구나 자유롭고 유동적으로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상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반대로는 생각하면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며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거나 도태되면서 스스로의 실존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진경의 평론집 『액체인간의 자화상』은 이렇게 전자기술의 발달로 가속화되는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정체성과 실존적 공간을 고민하는 시인들의 문제의식을 비평의 재료로 삼았다. 저자는 격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속성을 가진 시인들을 액체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제1부에서는 기술적 환경에 대응하거나 영향을 받은 시인들, 일상을 양식화하거나 시적 정서를 다른 예술 장르와 융합하거나 혼성 모방하는 등 과학기술문명에 변화되어가는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정체성에 주목하고 있는 시인들의 시를 담론화하였다. 제2부에서는 사회 속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상속되어온 개인의 정서나 성향 체계를 여전히 시적 화두로 삼은 시인들, 상처를 품은 응콘데 형상의 여성적 자아나 사회적 약자의 실존 공간을 의미화하는 등 사회적 타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시인들의 시를 대상으로 비평을 전개했다. 제3부는 기술적 환경으로 인한 실존적 공간의 변화는 세계의 구조는 물론 인간의 정체성이나 관계 맺기 현상, 뇌와 감정적 유전자, 신경계의 물활론적인 성향까지 변화시키고 있는 현실에 주목하고 있는 시인들 시를 담론화하였다.
‘책머리에’ 중에서
인간다운 집단이란 정서가 유동적으로 흐르면서 한 덩이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액체사회이다. 전자기술과의 상호작용으로 실존적 공간의 입구가 여러 개인 ‘웜홀환경(wormhole environment)’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정체성은 분열되고, 파괴되면서 확고한 뿌리를 가지지 못한다. 전자기술의 발전은 사회적 관계망을 재배치하고, 사회적 실존성을 재편성하면서 자유롭고 유동적인 접속이 가능한 세계가 되었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떠돌아야 하는 피곤함에 처해 있다. 여기저기 흘러 다니면서 적응하거나 도태되면서 스스로 실존성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번 평론집은 전자기술의 발달로 가속화되는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정체성과 실존적 공간을 고민하는 시인들의 문제의식을 비평한 것들이 많다. 이런 글들이 많은 것은 세계질서를 변화시키는 실존적 공간과 삶에 대한 필자의 관심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시인들의 시에도 이것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자기술 발달로 인한 실존적 공간의 변화는 오랫동안 인간의 가치관을 지배해온 현실과 내세라는 이분법적인 사유를 해체한 것은 물론 인간의 정체성을 기호화, 물질화하는 데에 한몫하였다.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이미지를 어떤 새로운 기술에 의해 인간사(人間事)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의식화라고 하였다. 인간이 만든 기술적 환경이 공간과 시간을 변화시키면서 우리 몸의 중추신경을 확장해나간다는 그의 논리는 무서울 만큼 미래의 현실을 정확히 예견한 말이다. 최근 시인들의 자아나 시적 존재들이 물질화나 기호화로 많이 형상화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평론집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시인들의 문제의식들은 가속화되어가는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속성을 가진 액체인간의 서글픈 한 단면이다.
현대인에게 이미지와 의식은 한 몸뚱이에 두 개의 주체가 사는 샴쌍둥이와 같다.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이 이미지의 역사를 만들어온 것과는 달리 요즘은 이미지가 인간의 상상을 만들고, 실존의 양상을 만들어간다. 인간을 철저히 연구하여 만든 욕망의 창조물,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음흉한 가면이 이미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 현대인은 이미지의 감옥에 갇혀 자본주의가 만든 욕망을 좇으면서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나간다.
자연의 가공으로 존재는 인간의 반복적인 기억과 경험, 시간성을 이어가면서 상징이나 기호로 남게 되었다. 이미지는 상징적 가치 분야로, 그 의미가 사회적 수용 가능성에 의해 정의된다. 아방가르드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 속에서 언어가 해체되고, 주체가 해체되는 현상 속에서 시가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특히 인간이 만든 모든 질서를 해체하고 분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은 표면적으로 주체가 소멸된 후기자본주의의 논리를 좇아가는 것 같지만 무의식의 논리가 작용한다는 점에서 숭고미를 지향한다. 가장 순수한 세계, 타락하지 않은 세계를 추구하는 이 의식은 질주와 물질만능주의로 나아가는 현대인의 실존적 속성에 제동을 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의식, 환경은 존재론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어서 서로 간의 영향과 변화는 필연적이다. 현재 시단에서 시적 신체가 부품화되고, 시적 자아가 기호화되어 가는 현상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유기성을 가진 해체언어와 기계적 신체나 테크노피아(technology utopia)를 지향하는 의식은 이런 사회현상에 대한 직·간접적인 탐색일 것이다. 시인들의 시에서 보이는 상징적 주체나 기호적 자아는 또한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탄생된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진경
1962년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2012년 부경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2015년 평론집 『가면적 세계와의 불화』를 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했고,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된 뒤 시집으로 『알타미라 벽화』 『잔혹한 연애사』 『여우비 간다』 『사이버 페미니스트』가 있다. 연구서로 『후각의 시학』이 있다.
목차
■ 책머리에
제1부 디지털 자아와 감정의 양식화
세계를 전환시키는 장치, 꿈과 ‘언캐니’ 감정―김참의 시
자기과시 욕망과 수치심의 샴쌍둥이 실존론―박종인의 시
접속에의 욕망, 디지털 세대의 변형된 주체성―이경욱 신작시
위악적인 세계의 조롱과 자기주술성의 담화 양식―송진, 『복숭아빛 복숭아』
반(反)동일화의 실존과 디지털 자아―김지녀, 백은선의 시
해체된 몸의 언술과 존재의 기호성―채수옥, 『비대칭의 오후』
알 속의 아프락사스와 알 밖의 아프락사스―고영, 박영기의 시
혼성모방적 삶으로 전락한 무취(無臭)의 존재들―김경수, 『달리의 추억』
무시간적 실존의 도형화와 주체 은닉의 미세학―김미령, 『파도의 새로운 양상』,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
악극적 자아와 유령적 타자 사이의 암전―서화성, 『언제나 타인처럼』
생장(生長)의 존재감, 오벨리스크 주술성―전기웅, 『오벨리스크』
제2부 집단적 아비투스와 응콘데 형상
타자의 사회학과 시적 지성―김검수, 『겨울의 사회학』, 서화성, 『당신은 지니라고 부른다』
동시적 시간과 수평적 세계의 미세학―손음,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정박점 상실의 존재론과 디스토피아 세계―감정말, 『고래가 왔다』
개와 늑대의 숙명론을 인식하는 지점―권정일, 『어디에 화요일을 끼워 놓지』
미혹함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선문답 화법―천수호의 시
비움의 미학과 존재의 순환―류정희, 『사막냄새』
‘명령이라는 가시’와 응콘데 실존성―김순아, 『슬픈 늑대』
느린 민달팽이의 심리적 지형도―김중일, 『곰보 주전자』
만다라 형상의 공무도하가―정의태의 시
기화하는 욕망과 현실의 충돌, 바람의 생리학―정삼조, 『그리움을 위하여』
제3부 리좀 세계와 액체인간 자화상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인간의 감정적 유전자
시간 속 이벤트로서의 시, 시와 독자 사이의 회로들
후각, 현대인의 정신 병리와 불화 표지
시의 꿈, 소망 충족의 사회심리학
리좀 세계에서의 도태, 액체인간
자기방어 기제가 만드는 실존의 장벽
기억의 신경윤리와 실존적 메타포
느린 심리적 시계와 느린 실존적 시계
■ 발표지 목록
■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