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인은 무게감 있는 관념어를 거듭 사용하지만, 그것들은 구체적 감각의 뒷받침 없이 공중에 머무르는 말로 제시된다. 오히려 감각적 표현들이 시 전체의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작동한다. 이처럼 의미상 무거운 말들이 가볍게 흘러가고, 감각적인 장면이 시의 뼈대를 이루는 방식은 김영애 시의 전복적 언어 전략을 잘 보여준다. 그의 시는 사유가 아닌 감정의 진동을 감지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며, 부유하는 언어를 통해 감정의 유동성과 불확실성을 재현한다. 관념어가 무게를 잃고 감각어가 중심이 되는 이 전도된 위계 속에서 독자는 감정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게 된다.나의 정물화정물을 펼치면 작은 꽃밭이 있고 방은 벽의 뒤쪽과 텃밭 사이에 있다 루드베키아 붉음 속으로 대문 센서 등이 각진 눈을 떴다 목에 두른 긴 머플러 끝으로 창이 붉다 방문을 열면 어제 내려놓은 감정이 발목을 잡는다사람의 소리일까 바쁘게 덜컹이는 빨강 골목을 흔들었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발바닥엔 어제가 묶여 있을까 소리, 노랗다 혼자 열리고 닫히는 계절의 창 너머로 가끔은 달리아가 창을 두드렸다아직 나는 잠에서 걸어 나오지 못했다 소리를 끌어다 어제를 덮는 밤의 이스트처럼 누군가 골목을 일으켜 세우고 담장을 흔들었다산다는 것은 소리를 견뎌내는 것일까 가끔씩 찾아오는 나의 정물이 소리를 덮는 것처럼 머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는 아이러니, 물의 내면처럼 흐르는 생각이 어제를 끌어당긴다감정을 엿듣는 습관으로 나는 새벽 거미줄에 걸려 있는 이슬이지만 모래성을 쌓곤 했다 영혼을 퍼먹듯 겨울과 여름을 넘나들며 나는 나를 걸었다나의 정물을 펼치면 왜, 모딜리아니의 긴 목이 창에 걸려 있는 걸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안단테의 리듬으로 걸어오는 여름 한낮 사계가 강물처럼 흐른다면 현에 기대어 잠들었고 꿈속에서 자일리톨 껌을 씹어요 우리의 연주가 될까 구부정하게 휘어 있는 내 안의 이분쉼표는 중심을 잃고 내일은 사랑스럽게 아플 거예요 만남은 바깥에 있고 난 생각을 껴안고 건반 속으로 들어가고 계절이 오래 떠나지 않아도 우리의 연주를 물들일 거야안단테와 라르고 사이의 아다지오로 흐르지만 아래는 절벽 같았다 내 안의 침묵으로 변해버린 브람스의 자장가, 일어서며 옥타브를 높였다 넌 침묵이 묘약이라 말했지 그 생각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같았지건반을 열면 세 번째 꿈을 쏟아낼 것 같은 열정은 기억 아래 잠기고 완전히 다른 물결 위에 음률과 불안을 끼얹으며 밤새도록 꿈속을 헤매는 우리의 세레나데 무덤처럼 깊게 팬 창 너머로 모든 날의 음을 모아 우리의 세계가 될 수 있을까교향곡 4번에서 기다릴게 자장가는 우리의 설렘을 덮었지만 그때의 생각만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 즉흥곡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연주를 할까 흰 건반에서 멈추면 우린 백허그하는 거야
포이즌바다 위를 걷고 있는 나는 무모할까 위악적일까 혐의를 벗지 못한 계절과 담장이 없으면 나의 이름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계절을 지나온 행성의 궤도와 같이 내면의 암흑과 밤 11시 같은 관성에 몰두했다길은 부서지기 위한 질주일까 무모한 걸음은 얼마나 힘이 들까 오늘도 결연하게 나는 바다 위를 걸었다 여긴 세상에 없는 바다에 발을 얹어보는 게 전부이다 걸음은 처음 후각을 가진 물의 수심에 맞추었다 신발을 벗어 놓고 걷는 여정은 어디쯤일까 목적지가 없는 생각은 메아리만을 불러냈다 명징의 법칙에 대하여 라는 말을 뱉었다 늘어나는 웅덩이를 채우는 사물은, 최초의 탄식 마른 기억에 나를 매달고 손을 저어보는 것 생각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뒤섞인 착란과 윤곽에 맞물린 시제들이 겹친 계절이 그렇듯 길은 보이지 않고 다시 바다 위를 걸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영애
부산 출생. 2019년 『시와사상』으로 등단했다.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