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한국 핵의학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연구자, 행정가이자 임상의인 화순전남대학교병원 원장 민정준 교수의 첫 번째 에세이집. 핵의학과 분자영상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학자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음악 신동이었다. 평생 의학의 길을 추구하면서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고 국내외 학계의 발전에 기여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꺼뜨린 적은 없었다. 음악가와 결혼하고 자녀를 연주자로 키워 음악 가족을 이루었고, 정신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도 늘 음악회를 찾아 삶의 에너지를 얻었다.
전남의대 관현악반 지도교수로서 학생들과 음악이 주는 기쁨과 감동을 함께 하며, 병원 소식지의 고정 칼럼을 맡아 7년 넘게 음악 이야기를 연재했다. 스스로 ‘60년 인생을 음악과 함께 걸어온 사유의 여정’이라고 정의한 이 책에서 그는 평생 음악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잔잔한 목소리로 풀어낸다.
때로는 악곡에 관해, 때로는 작곡가나 연주자에 관해, 때로는 대중가요나 개인적 인연에 관해 들려주는 서른두 편의 에세이는 첼리스트 박경옥이 말하듯 정확한 고증과 인문학적,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지만, 무엇보다 음악과 삶에 대한 겸손하고 따스한 시선이 빛을 발한다.
출판사 리뷰
평생 음악을 벗삼아 살아온 세계적인 의학자의 음악 에세이
한국 핵의학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연구자, 행정가이자 임상의인 화순전남대학교병원 원장 민정준 교수의 첫 번째 에세이집.
핵의학과 분자영상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학자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음악 신동이었다. 평생 의학의 길을 추구하면서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고 국내외 학계의 발전에 기여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꺼뜨린 적은 없었다. 음악가와 결혼하고 자녀를 연주자로 키워 음악 가족을 이루었고, 정신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도 늘 음악회를 찾아 삶의 에너지를 얻었다. 전남의대 관현악반 지도교수로서 학생들과 음악이 주는 기쁨과 감동을 함께 하며, 병원 소식지의 고정 칼럼을 맡아 7년 넘게 음악 이야기를 연재했다. 스스로 ‘60년 인생을 음악과 함께 걸어온 사유의 여정’이라고 정의한 이 책에서 그는 평생 음악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잔잔한 목소리로 풀어낸다.
때로는 악곡에 관해, 때로는 작곡가나 연주자에 관해, 때로는 대중가요나 개인적 인연에 관해 들려주는 서른두 편의 에세이는 첼리스트 박경옥이 말하듯 정확한 고증과 인문학적,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지만, 무엇보다 음악과 삶에 대한 겸손하고 따스한 시선이 빛을 발한다.
음악을 사랑하던 소년은 자라서 의사가 되었다.
그의 모태 신앙은 바이올린이었다. 일곱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한 소년은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호남 지역 콩쿠르를 석권하고, 초등학생 때 광주실내악단과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다. 그러나 삶은 그를 의사의 길로 이끌었다. 핵의학을 전공한 그는 200여 편의 SCI급 논문을 발표해 약 12,000회 이상 인용되는 등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한국인 최초로 세계분자영상학회 석학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내외 학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학계의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살아있는 박테리아를 암 치료제로 활용하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해 국제적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핵의학교실 주임교수를 거쳐 화순전남대학교병원 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음악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의대관현악반과 광주실내악단에서 연주하던 그는 첼리스트와 사랑에 빠졌다.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큰딸은 엄마를 따라 첼리스트가 되어 음악가 족을 이루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늘 음악회를 찾아 삶의 에너지를 얻었다. 음악을 통해 삶을 배우고, 다양한 사람을 포용하고, 역사와 시대를 성찰했다. 전남의대 관현악반 지도교수로서 학생들과 음악이 주는 기쁨과 감동을 함께 하며, 병원 소식지에 음악 이야기를 연재했다.
60년 인생을 음악과 함께 걸어온 사유의 여정
7년 넘게 연재한 음악 칼럼을 한데 묶은 이 책에서 그는 평생 음악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잔잔한 목소리로 풀어낸다. 악곡에 관해, 작곡가나 연주자에 관해, 때로는 대중가요나 개인적 인연에 관해 들려주는 서른두 편의 에세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쉽게 움트지 않는 시대에 음악이 어떻게 인간을 일으켜 세우고, 위로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지 보여준다.
그날 루체른 공연이 끝났을 때, 청중과 음악가들은 한동안 정지해 있었다. 화면이 정지해 버린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비올라와 바이올린의 통렬한 마지막 울림의 여운이 남아 있는 동안 아바도의 지휘봉은 그의 목 근처에서 멈추고, 왼손이 그린 작은 원이 사라진다. 그 순간 동작을 멈춘 아바도는 1시간 반의 사투에 지친 듯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그가 서서히 지휘봉을 내리고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있는 동안에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여전히 악기를 내리지 않고 한참을 정지해 있었다. 단원 모두가 악기를 내린 후에도 한동안 침묵과 정지는 계속되고, 이윽고 아바도의 온몸을 감싸던 긴장감이 풀리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침묵은 마지막 음이 끝나고 약 3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순간은 마치 관객과 연주자가 함께 죽음의 세계로 떠났다가 다시 소생한 듯했다. 소생한 관객들은 전원 기립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우는 사람도 있었다. 아바도는 시종일관 무대를 드나들며 빗발치는 커튼 콜에 화답을 했고,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며 감동을 나누었다. 연주자들이 모두 퇴장하고 텅 빈 무대를 향해 계속 박수 세례를 퍼붓는 관객들에게 아바도 혼자 무대에 나와 손을 흔드는 장면까지 보면서 이 음악홀에서 만큼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무너진 도시의 폐허 속에서 음악으로 독일군에 저항한 것이다. 당시 레닌그라드의 음악가들은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하여 오케스트라를 꾸리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단원들이 사망해 처음 모인 사람은 15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지휘자를 비롯한 단원들은 거의 아사 직전의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연습을 이어갔다. 죽은 아내를 묻고 곧바로 연습장소에 나타난 단원도 있었고, 연습 중에 굶어 죽은 단원도 있었다.
이윽고 연주회 당일, 필하모니아 홀은 시민과 병사들로 가득 찼다. 절망 속에서도 음악을 갈망한 시민들은 식량 배급표를 모아서 입장권을 구입했다. 공연은 라디오 확성기를 통해 도시 전역에 울려 퍼졌다. 공연이 끝난 뒤, 한 소녀가 지휘자에게 꽃다발을 전했다. 폭격과 봉쇄로 폐허가 된 도시 어딘가에 꽃이 피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레닌그라드 남부에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파블롭스크 연구소(Pavlovsk Research Station)이다. 이곳은 세계적인 식물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1887-1943)가 설립한 세계 최초의 식물 종자은행이다. 바빌로프는 식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이용해서 작물의 생산성을 높이는 육종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유용한 품종들의 원산지에서 종자를 수집하고, 유전 변이별로 분류하여 보존했다. 1929년에는 한국도 방문하여 호박씨 등을 수집해갔다고 한다. 그의 집념 덕분에 파블롭스크 연구소는 농업을 시작한 인류가 물려받은 유산을 보존하는,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유전자 자원 저장소가 되었다.
전쟁 중 이 연구소는 소련 당국의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바빌로프의 동료들이 연구소와 종자들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폭격과 혼란으로 엉망이 된 씨앗과 견과류, 곡물들을 다시 완벽히 분류하며 괴로운 재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히틀러는 이 연구소의 가치를 알고, 점령 축하 파티를 열 호텔과 이 연구소만은 절대 파괴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봉쇄가 이어지는 동안, 바빌로프의 보물을 지키던 동료들은 굶주림 속에 한 사람씩 목숨을 잃어갔다. 그들은 차디 찬 연구소의 책상 앞에서 죽음을 맞았지만, 눈앞에 있던 땅콩, 귀리, 완두콩, 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들의 곁에는 식량으로 쓸 표본이 가득했지만, 단 하나도 사라진 것이 없었다.
그 연주회에서도 그는 두 시간이 넘게 다른 성악가들의 반주를 맡았다. 예정된 공연이 끝난 후, 40년간 반주만 해 온 68세의 피아니스트는 기립한 청중 앞에서 난생처음 독주를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곡은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는 곡도, 마음껏 음악을 펼칠 수 있는 긴 곡도 아니었다. "부디 앉아주세요.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밤 제가 반주자로서 겸손하지 못했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저는 때때로 '내 반주가 너무 크지 않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오늘 이 멋진 밤을 마련해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의 작별을 고하며,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는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 마지막 앵콜 곡을 연주했다. 바로 슈베르트의 <음악에(An die Musik)>, 평생 피셔 디스카우의 목소리를 반주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
너 축복받은 예술아, 얼마나 자주 참으로 음울한 시간에,
인생의 잔인한 현실이 나를 조일 때,
너는 나의 마음에 온화한 사랑을 불 붙였고,
나를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인도하였던가!
종종 한숨이 너의 하프에서 흘러나왔고,
달콤하고 신성한 너의 화음은
보다 나은 시절의 천국을 나에게 열어주었지,
너 축복받은 예술아, 나는 너에게 감사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민정준
핵의학 전문의이자 현재 화순전남대학교병원 원장.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전남대학교병원에서 핵의학과 전문의 과정을 마친 뒤, 서울대학교병원과 미국 UCLA,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분자영상학을 연구하였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핵의학교실 주임교수, 연구처장, 산학협력단장, 연구부총장을 역임하며 학문과 교육, 연구행정 전반에 걸쳐 활발히 활동해왔다. 핵의학과 분자영상학 분야의 국내 대표 학자로서, 200여 편의 SCI급 논문을 발표하여 약 12,000회 이상 인용되는 등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한국인 최초로 세계분자영상학회 석학회원(Fellow)으로 선출되었다. 대한핵의학회와 분자영상학회 회장, 세계분자영상학회 및 아시아 핵의학회 이사를 역임하며 국내외 학계의 발전에 기여해왔다. 특히 살아있는 박테리아를 암 치료제로 활용하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여, 이 분야의 국제적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음악과의 인연도 깊다. 일곱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973년 조선대학교 콩쿠르 2위, 1974년과 1977년에 호남예술제 초등부 1위를 수상했으며, 1977년에는 광주실내악단과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을 협연하였다. 전남의대 재학 시절부터 광주실내악단과 전남의대 관현악반에서 활동했고, 1988~1989년에는 관현악반 악장을 맡았으며, 이후 수차례 지휘자로 무대에 섰다. 현재 전남의대 관현악반 지도교수로서, 음악이 주는 기쁨과 감동, 그리고 고된 연습이 전하는 가르침을 학생들과 함께 경험하고 있다.
목차
추천사와 축하의 글 6
프롤로그 18
음악으로의 초대
나의 바이올린 선생님 29
박수는 언제 쳐야 하나요? 34
공연이 끝난 뒤 41
최고의 교향곡 46
한국인의 음악 DNA 53
음악과 마음의 공명
혹독한 위기에 피어나는 꽃제2차 세계대전 중 레닌그라드 63
음악이 주는 형이상학적 공명 7 1
고래의 노래 77
왕을 비웃은 음악가 82
쇼스타코비치를 위한 변명 90
말러를 생각하며
우주의 탄생과 인간의 구원말러 교향곡 3번 99
천년의 교향곡말러 교향곡 8번 107
버디가 남기고 간 사랑과 음악1 15
말러의 무덤가에서 122
음악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위대한 조역, 제럴드 무어 1 33
50대에 시작한 새로운 도전, 레너드 번스타인1 4 0
평생에 걸친 노력, 파블로 카잘스1 45
“아름답게,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게” 모차르트의 미소1 5 3
베토벤을 성장시킨 독일의 도시 본1 59
늙은 세상에 너무 젊게 태어난 음악가에릭 사티 166
위대한 유산
음악을 들을 줄 안다는 것1 75
송창식의 미소 183
노래로 시대를 새긴 거인, 김민기1 91
임윤찬과 연결된 세상 197
천재의 고립된 인생 208
안녕 Sam! 219
내 인생 최고의 음악회
내 인생 최고의 음악회 2 33
노(老) 지휘자의 마지막 콘서트 2 44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 250
하델리히와 보낸 3박 4일 258
빈 필, 그 보수적인 자유로움2 67
의대음악회 277
에필로그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