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요한복음》은 신과 인간, 삶과 죽음, 법과 자유 등 놀라운 깨달음으로 가득한 《요한복음》을 소설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신약성서의 복음서 중 한 권인 ‘요한복음’을 역사 속 인물 기록이 아닌 소설의 형식으로 재탄생시켰다. 화자인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시작하면서 함께 겪고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을 철저히 1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 요한복음》은 신약성서의 복음서 중 한 권인 《요한복음》을 역사 속 인물 기록이 아닌 소설의 형식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이는 단순히 등장인물의 관계나 여러 사건들을 긴장감 있는 소설 구도로 만들어서가 아니다. 화자인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시작하면서 함께 겪고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을 철저히 1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성서의 기록적 느낌을 배제한 채, 철저히 예수의 삶의 현장 속에 함께 서 있던 사도 요한의 관찰과 서술로써 이어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속의 예수는 믿음에 대한 강조를 넘어, ‘있는 그대로의 나’ ‘지금 여기 있는 나’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하나님의 자녀라면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기본임을 역설한다.
출판사 리뷰
《소설 요한복음》은 신약성서의 복음서 중 한 권인 ‘요한복음’을
역사 속 인물 기록이 아닌 소설의 형식으로 재탄생시킨 작품!
《요한복음》은 신과 인간, 삶과 죽음, 법과 자유 등 놀라운 깨달음으로 가득한 《요한복음》을 소설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신약성서의 복음서 중 한 권인 ‘요한복음’을 역사 속 인물 기록이 아닌 소설의 형식으로 재탄생시켰다. 화자인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시작하면서 함께 겪고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을 철저히 1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 요한복음》은 신약성서의 복음서 중 한 권인 《요한복음》을 역사 속 인물 기록이 아닌 소설의 형식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이는 단순히 등장인물의 관계나 여러 사건들을 긴장감 있는 소설 구도로 만들어서가 아니다. 화자인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시작하면서 함께 겪고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을 철저히 1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성서의 기록적 느낌을 배제한 채, 철저히 예수의 삶의 현장 속에 함께 서 있던 사도 요한의 관찰과 서술로써 이어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속의 예수는 믿음에 대한 강조를 넘어, ‘있는 그대로의 나’ ‘지금 여기 있는 나’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하나님의 자녀라면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기본임을 역설한다.
■ 신과 인간, 삶과 죽음, 법과 자유……
놀라운 깨달음으로 가득한 요한복음을 소설로 읽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믿고 있음을 기억하라
신약성서 네 권의 복음서 중 하나인 《요한복음》은 여러 가지로 타 복음서와 구별되는 점이 있다. 다른 복음서들은 내용 속 사건들이 많이들 중복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전체 내용의 90퍼센트가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증거들이며, 특히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나 십자가 죽음 및 부활에 대한 기나긴 상황 설명 등은 《요한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무엇으로 유추할 수 있을까? 바로 스스로를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고 자신 있게 일컫는 제자 요한이 이 복음서의 기록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의 시선과 마음속 정리를 거쳐 토해져 나온 것이 《요한복음》이요,
또한 《소설 요한복음》이 된 것이다.
이 소설 전반에서 보이듯 요한은 그 어떤 제자보다도 예수로부터 가장 가까이, 거의 항상 곁에 서 있던 인물이다. 바로 그 사도 요한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철저히 서술되는 이 작품은, 실제 사실의 기록물인 《요한복음》을 소설화 할 수 있었던 최적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요한의 시선에 잡힌 모든 물리적 영적 현상들과, 이 책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표정과 사소한 사소한 몸짓까지…… 이 모두가 요한의 시선과 마음속 정리를 거쳐 토해져 나온 것이 《요한복음》이요, 또한 《소설 요한복음》이 된 것이다.
독자가 직접 요한과 같은 최측근의 제자 입장이 되어 가르침을 받는 경험,
더불어 평소 헤매던 삶과 존재의 문제까지 깨닫게 되는 놀라운 체험으로 이어질 것이다.
내용의 강약과 완급도 철저히 요한의 주관적 시선에 의해 움직인다. 고기 잡는 어부인 그가 예수를 만나 그물을 던져놓고 무작정 따르게 되는 사건은 흔히 생각할 때 예수를 처음 만나는 계기로서 무척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지 않을까 여겨지지만, 그는 짧은 한두 줄의 묘사로 끝내버린다. 그에게 있어 예수를 만난 계기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공식적인 모임에서의 가르침이든, 사소한 상황에서의 한마디 내뱉는 말씀이든 예수의 표현은 무섭도록 기억하여, 혹은 기록하여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예수가 언급했던 모든 말들을 일반적으로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붙이는 겹따옴표(“ ” ) 안에 모두 넣어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겹따옴표 속 예수의 말보다는, 관찰자이자 묘사자이자 서술자인 요한이 예수의 말을 자신의 서사에 녹여 대신 전달해주는 방식을 쓰고 있다.
주인공은 예수요, 관찰자이자 서술자는 요한이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느새 주인공보다 관찰자인 요한의 입장이 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예수의 발자취를 뒤쫓기보다는, 독자가 직접 요한과 같은 최측근의 제자 입장이 되어 가르침을 받는 경험, 더불어 평소 헤매던 삶과 존재의 문제까지 깨닫게 되는 놀라운 체험으로 이어질 것이다
《요한복음》이 보여주고자 하는 삶과 신앙의 속뜻을 오롯이 펼쳐 보여준다.
기독교와 성서를 이야기할 때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그리 자주 쓰이지 않는 표현이었다. 성서가 보여주는 증거의 기록들, 그리고 성서 속 수많은 가르침들은 그저 배우고 받아들이고 뉘우치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믿음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탐독할수록 이 복음서야말로 전 구절 모두 깨달음의 코드로 중무장한 책이 아닐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 장길섭 목사는 이 책에서처럼 성서를 픽션화하여 재탄생시키게 된 계기가 바로 이 깨달음의 코드를 독자들에게 집중하여 전하고자 함이다.
이는 착하게 살고, 하나님을 믿고, 남을 사랑하라는 당연시되는 깨달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 ‘존재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 신과 인간의 관계, 율법과 자유함의 상충을 수시로 다루면서 우리 삶 전반에 문제를 던진다. 이 책의 저자는 메신저가 된 요한을 다시 체화하는 제2의 메신저가 되었다. 그리하여 독자들에게 《요한복음》이 보여주고자 하는 삶과 신앙의 속뜻을 오롯이 펼쳐 보여준다.
깨달음으로 읽는 성서, 삶의 철학으로 읽는 《요한복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욕심에 빠져 자기 뜻을 실현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기 뜻이 실현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은혜 중의 은혜다. ……나를 배우는 것이 지혜다. 나를 알면 너를 알 수 있다. 왜? 나와 너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기록이 아니다. 인류의 족보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로 읽는 한 아직도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그 안에 영생이 있음을 보고, 그 영생이 바로 ‘지금 여기 있는 나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는 배웠지만 왜 사랑해야 하는지 쉽게 대답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신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사이의 놀라운 비밀을 풀어준다. 하나님을 믿으라고만 가르쳐주었던 《성경》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태어나고 온갖 고초를 겪고 살다 결국 죽고야 마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지구에 오기 위해 입은 옷 즉, 육체라는 껍데기를 잠시 입고 왔을 뿐이지 ‘원래부터 존재했던,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나’에 대해 요한복음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설파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 곧 공식적인 집회에서의 설교는 물론이고 사적인 자리에서의 간단한 조언과 지나가는 한마디조차도 모두 자기 체화의 과정을 거쳐 후대들에게 그대로 전해주는 메신저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생생하게 살아나는 예수의 육성, 요한의 놀라운 깨달음들!
책의 제목에 ‘소설’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 책이 《요한복음》 배경에 허구의 스토리를 집어넣었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기록된 사건의 순서와 내용, 설교와 가르침으로 표현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주변 인물들의 반응과 시대적 상황 등은 《성경》 속 《요한복음》 원문과 완전히 동일하다. 다만 앞서 이야기했듯 예수의 최측근에 자리했던 제자 요한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적 경향이 다분히 짙으며, 요한의 가슴 속으로 체화된 고백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소설적 요소는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감정변화와, 《성경》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사건 전후로 충분히 도입설명을 하기 위해 저자가 설정한 장면들이다. 가령 요한과 아내인 나라 사이에 태어난 세 자녀에게 ‘자유, 독립, 통일’이란 이름을 지어주거나,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큰 듯하여 은근히 시샘하는 요한의 인간적인 면모, 그리고 훗날 예수를 바리새인들에게 팔아넘긴 제자 가롯 유다의 심리 변화를 소설 전반에 수시로 드러내주는 것 등등이 그러하다.
유다는 우리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이미 그 각본을 실행 중에 있었다. 유다는 분명 화가 나 있었다. 며칠 전부터 말이 없었고 얼굴도 잔뜩 굳어진 데다, 좀 전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심각해진 얼굴, 무거워진 어깨…… 예수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유다는 선생님이 주시는 빵조각을 받고서 휙 나가버렸다. 그때의 서늘함, 섬뜩함. 때는 밤이었다.
-본문 중에서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 삶이나 자신의 문제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히 통합된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요한이 아내 나라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과정, 다혈질적 성격이 다분했던 베드로, 점점 변해가는 유다를 탐탁지 않게 보던 요한의 감정, 예수를 완전한 스승으로 받아들이기 직전까지는 ‘예수 형’이라 표현하는 등, 책의 부분부분마다 비록 큰 줄기를 차지하진 않아도 등장인물들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내용은 이 책의 소설적 재미를 느끼게끔 해준다.
저자가 재구성해낸 이러한 가상의 설정은 이 책이 단순히 예수의 발자취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는 간접체험을 하도록 만든다. 또한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 삶이나 자신의 문제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히 통합된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일까? 이 세상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다. 사람 없는 지구, 사람 없는 자연, 사람 없는 하늘, 나 없는 너, 너 없는 나, 나 없는 나라, 나라 없는 나…… 무슨 의미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을까? 얼마나 삭막할까? 아기 없는 가정이라고나 할까, 아이들 없는 학교라고나 할까, 신자가 없는 예배당이라고나 할까, 짠맛을 잃은 소금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나를 지구에 보낸 것은 하나님이고, 목적은 세상을 사랑하셔서다. 나는 사랑으로 왔고 사랑하기 위해 왔다. 사랑만이 나를 나 되게 한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고, 나는 하나님의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나의 본성도 사랑이다. 사랑하게 되어 있는 존재가 나요, 너와 우리다. 그런 사랑의 본성을 회복하자는 것이 선생님과 우리가 펼치는 운동이요 바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을 제대로 다 못해 상처받고 아파한다. 사람은 결국 사랑을 먹을 때 비로소 허기가 채워진다. 부모의 사랑을 먹고, 친구의 사랑을 마시고, 이성의 사랑을 구하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영생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 사람이 가는 길이다.
요한 선생님이 물이라면 예수 선생님은 불이다. 그 사이에서 나오는 우리 제자들. 정말 멋진 조화 중의 조화가 아닐까? 이것을 깨달은 순간 내 가슴은 정말 터질 것 같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나라도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내가 나 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는 뭐니 뭐니 해도 나에게 이 물과 불을 만나게 해준 것이다. 예수님도 엊그제 니고데모 위원이 찾아오셨을 때 그러셨다. 물과 불로 거듭나라고. 즉 상극을 만나고 그 조화 속에 거듭남의 비밀이 있다는 말로 들리니 오늘은 참 신기하기만 하다.
사람도 그렇지만 나무나 풀과 같은 모든 생명체가 다 그렇다. 물과 불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나무에 물만 주면 죽고 만다. 나무는 오직 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태양만 쬐면 또 말라죽고 만다. 나무는 햇빛이라는 불로만 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과 불의 조화 속에서만 나무는 나무가 될 수 있다.
예수는 인생의 문제를 풀어준 그리스도다. 인생의 문제란 누구에게 나 다 같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사는 문제가 다 인생의 문제 아닌가. 예수는 그것을 초월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다. 먹는 것을 먹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경제학이다. 입는 것을 입는 것으로 풀어보겠다는 것이 정치다. 먹는 것을 먹는 것으로만 해결하려는 한 필히 싸울 수밖에 없다. 입는 것을 입는 것만으로 풀려고 대드는 한 필히 다툴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경제문제든 정치문제든 사회 혹은 문화문제든 뭐라도 좋다. 문제는 문제로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 넘어서는 길을 예수께서는 보신 것이다. 넘어서는 길을 예수는 들으신 것이다. 넘어서는 힘을 예수는 가지신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장길섭
충남 금산에서 나고 자랐다.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서른 되던 해에 목사가 되었다. ‘전원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교회 운동을 하다가, 1991년에 고향인 금산에 영성수련 단체 ‘전원 살림마을’을 열었다. 세상을 사는 삶의 지혜와 근본적 깨달음에 대한 관심으로, 《성경》은 물론이고 불교 경전, 심리학, 과학, 예술을 두루두루 공부했다. 지금은 집단상담 치유 프로그램에 기반을 둔 평생학습 공동체 ‘삶을 예술로 가꾸는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삶을 예술로 가꾸는 사람들’은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인간 의식변화 프로그램’에 기반에 수련을 통해 일상에서 깨달음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원리와 방법을 세상에 전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이 책 《삶으로 깨어나기》는 목회자들과 함께 먹고, 자고, 청소하고, 《성경》 읽고, 내적 치유를 위한 수련을 하면서 안내했던 테마들을 기록해 정리한 책이다.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1992년부터 ‘청소년 심성 프로그램’을 지도해왔고, 2010년 청소년 대안학교 ‘레드 스쿨’을 설립해 교육자로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삶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입니다》《깨달음으로 읽는 장자》《깨달음으로 읽는 반야심경》《몸과 마음을 정돈하는 명상의 기술》 《소설 요한복음》《눈 뜨면 이리도 좋은 세상》《가족은 선물입니다》 등이 있다.
목차
1. 강물에서 바다로
2. 열쇠 하나면 족하리
3. 마당 한가운데 감나무
4.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성전
5.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6. 물을 주러 온 불
7. 참된 예배, 참된 삶
8. 낫고 싶은가?
9. 아버지와 아들
10. 나는 생명의 밥
11. 생수가 강물처럼
1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13.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다
14. 나는 문이다
1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17.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때에 왔다
18. 마지막 저녁식사
19. 길과 진리와 생명
20. 보혜사(保惠師)
21. 근심이 기쁨으로 변하다
22. 예수님의 기도
23. 배반
24. 다 이루었다
25. 부활
26. 또 다른 시작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