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철학자 이태곤 선생이 한국 사회의 자유 담론을 다시 성찰하는 책 『왜 다시 자유인가』(열린서원)를 펴냈다. 이 책은 자유라는 개념이 어떻게 왜곡·남용되어 왔는지를 비판하면서, 자유의 본래 의미와 그 실천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저자는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자유의 철학적 계보를 추적한다.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적극적 자유 구분, 악셀 호네트의 사회적 자유, 아마르티아 센의 역량 개념 등 현대 자유론을 소개하며, 그것을 동양의 사유와 연결시킨다. 불교의 무상(無常)과 연기(緣起), 참여불교의 실천적 지혜가 새로운 자유론과 접점을 이루는 대목이 돋보인다.
출판사 리뷰
왜곡된 자유 담론 속, 진정한 자유를 다시 묻다.
“자유는 과연 무엇인가?”
철학자 이태곤 선생이 한국 사회의 자유 담론을 다시 성찰하는 책 『왜 다시 자유인가』(열린서원)를 펴냈다. 이 책은 자유라는 개념이 어떻게 왜곡·남용되어 왔는지를 비판하면서, 자유의 본래 의미와 그 실천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저자는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자유의 철학적 계보를 추적한다.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적극적 자유 구분, 악셀 호네트의 사회적 자유, 아마르티아 센의 역량 개념 등 현대 자유론을 소개하며, 그것을 동양의 사유와 연결시킨다. 불교의 무상(無常)과 연기(緣起), 참여불교의 실천적 지혜가 새로운 자유론과 접점을 이루는 대목이 돋보인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자유주의의 역사와 이론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일상적 삶 속에서 마주치는 자유의 단상을 풀어냈다. 3부는 저자가 기고한 시평과 사설들을 묶었으며, 4부에서는 불교 사상과 현대 과학을 엮어 자유의 의미를 새롭게 확장했다.
서울대 명예교수 우희종은 추천사에서 “자유라는 문제의식을 대중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글로 풀어냈다”며 이 책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 것이라 평했다. 철학박사 이종철은 “학문과 현실을 넘나드는 에세이 철학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고 말했다. 동양철학자 이명권 역시 “‘협력 위의 자유’라는 제안은 한국 자유 담론의 빈자리를 메우는 정직한 사유”라고 강조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자유는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나침판”이라며, 오염된 자유를 경계하고 “다시 자유를 묻게 되었다”고 밝힌다.
『왜 다시 자유인가』는 자유와 평등, 개인과 공동체, 권리와 책임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제기하며, 치열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자유의 본질을 다시 묻다 ― 자유와 평등, 개인과 공동체의 새로운 좌표
이 책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자주 오용되고 왜곡된 “자유” 개념을 다시 성찰하고, 고전적 자유주의부터 현대 사회철학과 불교 사유까지 폭넓게 아우르며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묻는다.
저자는 고대·근대 자유주의의 전개와 한국 사회의 특수한 자유 담론을 검토하며, 왜 오늘 우리가 다시 자유를 물어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자유와 평등, 권리와 책임의 긴장을 치열하게 분석한다.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적극적 자유, 악셀 호네트의 사회적 자유, 아마르티아 센의 역량 개념을 일상 사례와 연결시켜 독자들의 사유를 구체적인 삶으로 끌어온다. ‘역지사지’, ‘상호인정’, ‘협력 위의 자유’가 책 전반을 관통한다.
자유의 철학을 불교의 무상(無常), 연기(緣起), 참여불교 사상과 연결하며, 현대 과학(양자·복잡계·생명과학)과의 대화를 통해 생명 감수성의 철학을 제안한다. 이는 인류세 위기의 시대에 자유를 새롭게 사유하는 길을 열어준다. 『왜 다시 자유인가』는 한국 사회의 뒤틀린 자유 담론을 바로잡고,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진정한 자유의 길을 모색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독서가 될 것이다.
자유주의의 역사와 우리의 자유
오늘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유를 외친다. 하지만 저마다 자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사야 벌린은 ‘~에로의 자유’를 의미하는 적극적 자유와 ‘~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를 구분하지만, 소극적 자유에 무게를 둔다. 적극적 자유는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변모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동양적인 사고에서의 자유에 대한 기준은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慾 勿施於人)’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자유의 기준이 된다. 유아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자유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그러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 역시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바탕에 깔고 있다. 소극적 자유는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모든 구속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서구 르네상스 시대의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인간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들로부터 자유주의가 싹텄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과도기적인 유럽 사회를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 시대의 주역은 부르주아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동방과의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이탈리아 지역에 생긴 상공업지역을 부르그(bourg)라고 하고, 그곳에 사는 상공인들을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이들이 자본주의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다. 부르주아의 주된 관심사는 부의 축적이었다. 또한 중세 시대를 지배했던 신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자리 잡게 되었고, 그로부터 내세와 천국에 대한 믿음을 대신하여 현실 세계에서 누리는 재산과 번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공동체 중심의 사회에서 개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게 되었고, 개인이 누리는 재산과 번영을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해방을 외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서구 자유주의의 뿌리였다. 그것을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르며, 그러한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르네상스 연구에 관심이 많았던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발견된 인간을 ‘자유로운 활동과 자유의지’를 갖춘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자’이자 ‘자기 의지에 따라 발전하고 성장’하는 존재로 표현했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절대군주제 타파에 앞장선 시민혁명을 이끈 부르주아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들은 자유를 부르짖기 위해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연법에 입각한 평등을 외쳤다.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귀족과도 신분적인 차이가 없어야 했다. 자유와 평등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러한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 그들은 비인간적이며 차별적이었던 절대군주제와 전통적 신분제 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축으로 하는 근대 서양의 평등한 시민사회를 건설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을 수탈하는 신분 차별을 반대했고, 절대군주의 횡포를 막기 위해 헌법과 법으로 국가권력을 명확히 제한하는 입헌주의와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자신들이 직접 국정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한편 그들은 그들의 부를 늘리기 위해 자유방임 경제체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발생하기 전이었다. 아무튼 근대의 자유주의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자본주의를 낳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외치는 자유에는 서구 사상에 뿌리를 둔 자유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즉 우리가 외치는 자유에는 평등과 법치와 민주가 없고,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유령만 어른거린다. 우리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민주주의를 말한다. 앞에서 살펴본 서구 근대의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자유이다. 최장집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는 좌우 양쪽 진영에서 부정되었다고 지적한다. 보수파들은 자유를 외치면서도 냉전 반공주의와 동일시하였지만 실제로는 자유를 실천하지 않았고, 진보파들은 자유주의를 친미적 부르주아 이념으로 경멸했다고 진단하였다. 결국 한국에서는 진정한 자유주의가 싹트지 못했고, 그 자리에 민족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로써 한국의 자유주의는 설 땅을 잃게 되었다. 70. 80년대 민주화 운동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었지, 자유주의의 심화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자유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 오늘날 자유주의가 경제적 자유주의와 동일한 것이 되어버림에 따라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가 되었고, 진보주의자들은 반자유주의자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적 정치인들은 결코 자유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평등을 무시한 자기만의 자유를 누리면서 새로운 귀족주의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보적 정치인들이 진정한 자유주의자라 볼 수도 없다. 그들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고사하고, 사법 권력의 견제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유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자유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바탕으로 평등과 인권, 관용, 그리고 정의라는 가치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의 모든 것이 아니다. 경제적 자유주의도 존중되어야 하고, 능력주의도 존중하여야 하지만, 진정한 자유주의에는 기회의 평등을 염두에 둔 상호 인정과 자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역량으로서의 자유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서울의 거리는 자유가 넘쳐흐른다. 나는 광화문에서 약속이 있을 때 지하철 시청역에 내려서 덕수궁을 옆에 두고 광화문까지의 길을 걷는다. 10분 정도 걸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활기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궁과 현대식 건물의 앙상블도 조화롭다. 덕수궁이 과거를 안고 있다면, 그 주변의 모든 건물은 현대를 상징한다. 과거와 현대의 공존 속에서 문명의 빠른 발전에 감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이 밝은 곳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둠도 함께 공존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덕수궁 근처 길모퉁이에 자리 잡은 사이비 종교단체의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이다. 기독교를 믿지는 않지만, 지옥을 운운하는 것은 협박에 가까운 말이다. 그곳뿐만 아니다. 서울역 광장 한구석에서는 매일같이 사이비 종교단체의 선교활동이 벌어진다. 지하철에서도 “하느님을 믿어라!”라고 외치면서 다니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저 모든 것들이 종교의 자유라면, 우리 사회는 자유가 넘치는 사회이다. 다만 각 개인은 자신이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자유! 누구나 꿈꾸는 단어이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만은 않다. 새처럼 하늘을 나는 것도 자유이고, 자연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도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의 자유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자유는 권력의 제한에 관한 논의이기에 낭만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치열하다. 인류의 역사를 자유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역사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권력 투쟁으로 보기 때문이다. 권력 투쟁의 역사가 곧 자유의 역사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예링의 말도 곧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날마다 자유와 생명을 쟁취하는 자만이 그것을 향유할 수 있다.” 똑같이 예링이 한 말이지만, 나는 후자의 말을 더 좋아한다. 잠자는 것은 수동적인 의미를 갖고,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적극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최근에 자유를 주제로 책을 출판할 계획을 가지고 있기에, 자유와 관련해서 다양한 독서를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200여 년 전에 출판한 『자유론』 서문에서 밀은 “사회가 법이나 여론을 무기로 개인을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그 책을 통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소중한 지혜를 얻었다. 자유는 나만이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평등을 전제로 하고, 상호존중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의 존재가 소중한 만큼 타인의 존재도 소중하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는 그러하지 못하다. 개인주의를 넘어서서 나만의 이익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팽배해져 있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찾아볼 수 없다. 참된 자유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바탕에 둔 결단이다.
밀의 『자유론』에는 토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다수의 횡포에 의해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목도 있다. 소수의 천재가 사회의 소금 역할을 하기에 그렇다고 한다. 이 대목은 사실 우리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현실은 다수결의 원칙을 앞세우면서 소수의 의견을 무시한다. 다수결의 원칙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사실은 충분한 토론의 자유를 전제로 해야 한다. 토론의 자유가 생략된 다수결 원칙은 다양성을 없애고, 다수를 동원하여 획일화를 꾀하는 전체주의적인 발상이 깔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떤가? 철학이 사라진 사회에서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렇다고 배부른 돼지만이 들끓고 있는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괜한 일에 나서지 말라는 선인들의 충고이다. 자유를 억압당했던 식민지 시대와 군사 독재 시대에 모난 돌은 곧 죽음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배부른 돼지 같은 삶이 지혜로운 삶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소크라테스는 시장에서 정의를 전파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독배를 마셨다. ‘우리 함께’가 아닌 ‘나 홀로’ 사회에서 소크라테스는 광인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그래도 소크라테스가 좋다. 밀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본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같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고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 역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각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양성의 존중은 자기 생각이 잘못일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수용하는 자세이다. 밀의 『자유론』은 개방과 관용의 정신이다.
서울 도심의 사이비 종교단체의 포교 활동도 자유인가?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같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밀의 말을 적용하면, 저것도 개인의 소중한 의사 표현의 자유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저런 현상에 대해서 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인간은 어떤 틀에 본을 떠 만들어지는 기계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내면의 힘을 바탕으로 모든 면에서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나무와 같다.” 밀은 원숭이 흉내만 내는 삶을 자유의 진보를 가로막는 방해물로 보았다. 자기반성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노예의 삶에 불과하다. 사이비 종교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유의지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자유는 가끔 복종이라는 진짜 모습을 감추는 가면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자유를 외치지만, 때로는 그것이 복종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자유는 진실로 자신에게 “나는 자유로운가?”를 되묻는 자에게만 허락될지도 모른다. 그들만이 가짜 자유라는 독단의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이태곤
경북 김천 출생김천중학교, 김천고등학교 졸업충북대학교 철학과 졸업한독약품, 사노피 아벤티스 근무사회복지사, 평생교육사, 심리상담사『에세이스트』 등단(2017년)『더수필』 올해의 수필가 60선정『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수상(2021년)『에세이스트』 작가회의 이사<저널인뉴스> 컬럼니스트한국문화예술위원회 회원
목차
1부
추천사_ 8
머리말_ 11
자유주의의 역사와 우리의 자유_ 16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_ 20
당신은 어떤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_ 25
왜 다시 자유인가?_ 30
사회적 자유주의의 이해_ 34
자유의 두 얼굴, 해방인가 폭력인가?_ 39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_ 44
이사야 벌린의 이야기_ 49
악셀 호네트의 사회적 자유_ 53
아마르티아 센의 인간 이해_ 58
자유의 아이러니_ 62
자유의 역설, 평등의 그늘_ 68
자유! 버림의 미학_ 73
2부
새로운 사회적 자유_ 80
영화 ‘씨받이’에 담겨있는 자유_ 84
영혼의 자유인, 조르바_ 89
전작권 환수와 자유_ 94
역지사지와 자유_ 99
생활 속의 인정투쟁_ 104
앞으로 30년 후, 손자에게 보내는 편지_ 108
파이어족에 담겨있는 자유_ 113
상호인정이 사라진 사회_ 117
사적 자유와 공적 강제_ 122
분열을 넘어 공감으로_ 126
나만의 자유에서 우리의 자유로_ 131
3부
개념의 미라_ 136
니체, 시대를 앞서간 철학자의 현대적 의미_ 141
보살과 위버멘쉬_ 146
언어의 덫, 사고의 자유를 위하여_ 151
공동체 속의 자유_ 156
‘라떼’라는 유령은 사라져야 한다_ 161
민주주의 속에 떠도는 유령들_ 166
법 위의 자유, 그의 몰락_ 171
헌법에 담겨있는 자유_ 175
자유와 권위주의의 유혹_ 179
참된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_ 184
혼돈 속의 자유_ 188
훌리건 사회와 자유의 그림자_ 193
4부
노년의 철학 함과 불교의 지혜_ 200
벌거벗은 붓다_ 205
부처는 왜 벌거벗었는가?_ 210
기계적 세계관에서 생태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생명존중_ 214
부처님 오신 날 유마경을 읽다_ 219
생명과 연기, 그 속에서의 자유_ 224
생명과학과 불교적 의미_ 229
실존 이전의 삶의 역사성_ 344
십우도와 사교입선_ 239
언어의 한계와 선불교_ 243
왜 참여 불교이어야 하는가?_ 248
인류세와 불교_ 253
인류세와 생명 감수성_ 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