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줄거리로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이 있다. 인물은 안개에 가려진 듯 모호하고, 뚜렷한 사건 없이 이야기가 흐르고, 시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소설. 어떤 내용인지 선뜻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심연에서 여러 길을 내어 흐르는,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가 귀가 아닌 마음에서 들려오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올해로 데뷔 15년을 넘긴 윤해서의 소설이 그러하다.
시적인 문체와 깊은 사유를 요하는 소설적 실험으로 한국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작가 윤해서의 두번째 소설집 『물은 끓고, 영원에 가까워진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데뷔하고 7년 만에 “엄청난 독립성이 느껴지는” 첫 소설집 『코러스크로노스』를 출간한 이후, 다시 8년이 흘러 독자들 앞에 선보이는 두번째 소설집이라는 점에서 더욱 기대를 일으키는 이 책에는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실렸다. 500페이지에 육박했던 첫 소설집과 달리 200페이지 중반으로 가벼워진 분량은 그간의 작품을 고심하여 덜어낸 결과이다.
‘미지의 어둠’이라는 뜻의 「테 포케레케레」를 시간의 순서를 바꿔 들어가는 문과 나가는 문처럼 책의 처음과 끝에 배치하여 마치 “다른 시간대에서 동시에 불리는 미지의 합창”과도 같았던 첫 소설집 『코러스크로노스』에 비해, 얇아진 분량만큼 윤해서의 작품 세계로 진입하는 벽이 조금 낮아진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첫 책에 싣지 않았던, 첫 책 출간 전 발표했던 두 작품을 이번 책에서 시간적 거리감 없이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흔들림 없는 윤해서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씌어진 지 10년 안팎의 두 작품 「8분의 9박 드로잉―무화無化하는 무無로서」와 「우리의 눈이 마주친다면」은 비교적 최근에 씌어진 작품들과 나란히 놓여도 시간의 격차가 느껴지지 않기도 하거니와 작가가 얼마나 공들여, 한 권의 책을 치밀하게 구성하는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소설집 출간에 유독 시간을 더 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출판사 리뷰
“연통을 통과하는 기체는 연통을 울려.
당신을 통과하는 언어는 기체도 액체도 아니지만.
당신을 울리지.”
무언의 진동을 기록하며
강렬한 문장으로 불러들이는 무수한 목소리
윤해서의 소설을 얼핏 현실과 무관해 보이는, 혹은 현실적인 것들에 반하는 배경과 사건과 인물을 통해서 씌어지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반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구성의 조건들이 결국에는 지금 여기, 독자의 현실에 관한 가장 노골적인 질문이 된다.
―김나영 해설, 「다른 서사」에서
줄거리로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이 있다. 인물은 안개에 가려진 듯 모호하고, 뚜렷한 사건 없이 이야기가 흐르고, 시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소설. 어떤 내용인지 선뜻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심연에서 여러 길을 내어 흐르는,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가 귀가 아닌 마음에서 들려오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올해로 데뷔 15년을 넘긴 윤해서의 소설이 그러하다.
시적인 문체와 깊은 사유를 요하는 소설적 실험으로 한국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작가 윤해서의 두번째 소설집 『물은 끓고, 영원에 가까워진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데뷔하고 7년 만에 “엄청난 독립성이 느껴지는” 첫 소설집 『코러스크로노스』를 출간한 이후, 다시 8년이 흘러 독자들 앞에 선보이는 두번째 소설집이라는 점에서 더욱 기대를 일으키는 이 책에는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실렸다. 500페이지에 육박했던 첫 소설집과 달리 200페이지 중반으로 가벼워진 분량은 그간의 작품을 고심하여 덜어낸 결과이다. ‘미지의 어둠’이라는 뜻의 「테 포케레케레」를 시간의 순서를 바꿔 들어가는 문과 나가는 문처럼 책의 처음과 끝에 배치하여 마치 “다른 시간대에서 동시에 불리는 미지의 합창”과도 같았던 첫 소설집 『코러스크로노스』에 비해, 얇아진 분량만큼 윤해서의 작품 세계로 진입하는 벽이 조금 낮아진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첫 책에 싣지 않았던, 첫 책 출간 전 발표했던 두 작품을 이번 책에서 시간적 거리감 없이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흔들림 없는 윤해서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씌어진 지 10년 안팎의 두 작품 「8분의 9박 드로잉―무화無化하는 무無로서」와 「우리의 눈이 마주친다면」은 비교적 최근에 씌어진 작품들과 나란히 놓여도 시간의 격차가 느껴지지 않기도 하거니와 작가가 얼마나 공들여, 한 권의 책을 치밀하게 구성하는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소설집 출간에 유독 시간을 더 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첫 소설집 출간 이후 두번째 소설집이 나오기까지, 두 권의 중편소설과 두 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하며 성실하게 작품을 써온 작가는 15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펼쳐놓는다. 그것은 또한 15년 동안 변치 않고 지켜온 윤해서만의 소설 쓰기 방식이기도 하다. 더 이상 ‘난해함’이나 ‘어려움’으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이’와 ‘울림’의 세계가 다시 한번 독자들을 향해 문을 연다.
“그곳에서 우리는 망각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으려는 언어의 심연을,
그리고 언어를 넘어서는 생의 울림을 만나게 된다.”
책을 덮은 뒤에도, 그의 문장은 우리 안에서 모종의 질문으로 부풀어 오른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이미 지나간 듯 스며들고, 이미 잊힌 과거가 다시 되살아나며, 현재는 늘 의심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응시한다. 윤해서의 소설은 그 날카로운 응시의 시선으로 현재의 균열을 끝내 외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문학이다.
―이제니 발문, 「기억과 망각 사이를 떠도는 존재를 ‘ㅤㅇㅣㄷ는’ 문장들」에서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나영은 윤해서 소설 속 배경과 인물과 사건 들이 어딘가 닮아 있다고 지적하며 첫 소설집에서 보여주었던 인물들의 움직임이 중요한 모티프가 되어 두번째 소설집에서도 드러나고 있다고 설파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데뷔작 「최초의 자살」이 있다. 출근길에 느닷없이 미지의 시공간으로 이동한 세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계속해서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본능적인 욕구에만 충실한 사람들이 있는 태초의 세계에 닿지만,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걷는다. 이렇게 ‘한 방향’으로 어떤 힘이나 운동을 계속 작용시키면서 끝까지 가보는 것은 이후 윤해서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고,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러한 움직임의 과정에서 독자에게 깊은 사유를 요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윤해서 소설의 역할이며, 『물은 끓고, 영원에 가까워진다』에 이르러 이 질문은 삶과 죽음에 필요한 조건에 관한 것으로 좀더 확장된다. 그렇게 이번 소설집의 수록작에서 “말과 글과 비언어적 형식으로 떠도는 삶과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고 답해보려는 시도를 발견할 때마나 윤해서 소설 속에서 ‘최초의 자살’은 여전히 살아 있는 형식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그것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반복할 수밖에 없는 ‘끼니’로 나타나기도 하고(「8분의 9박 드로잉―무화無化하는 무無로서」), 풀을 베고 자루에 담는 묘 관리원들의 반복되는 노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변성」). 또한 넛이라는 가상의 대상을 계속해서 부수는 일과도 겹쳐지며(「재현과 현시」), 행위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의 반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리듬」). 한편 「두 발 움직이면 세 발 따라붙는」에서는 매일 비슷한 일과를 반복하는 행위와 거듭 들려오는 소리가 함께 반복되기도 한다. 이러한 반복은 윤해서의 소설에서 무의미와 허무를 낳는데, 작가는 소설 속에서 거듭하여 반복을 드러내며 경계를 무화시키고 허무와 무의미를 길어 올리면서 역설적으로 허무와 무의미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여기 없는 존재를 기억으로 불러들여 그 의미를 확인하는 것처럼(「우리의 눈이 마주친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 이번 책의 발문을 쓴 시인 이제니는 이번 소설집이 윤해서 문학의 근원적 물음을 다시 불러낸다고 보았다. “잊는 것과 잇는 것 사이에서 언어와 존재는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윤해서의 문장은 기존의 언어에 기대지 않고, 의미의 결락을 품어 안는 말들을 고안해냄으로써 기억과 상실,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뒤흔든다”고 설파한 이제니는 “윤해서는 언어의 경계에서 생성되는 의미의 파편을 더듬고, 시간과 감각 속에 남겨진 삶의 불확실한 층위를 탐색한다. 그렇게 ‘잊는 것과 잇는 것’ 사이의 불완전한 간극을 자기만의 문체로 재구성한다”는 말로 작가가 근원적 물음에 다가가고 있음을 역설한다.
강렬하게 끓는 물은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되어 연통을 통과하며 연통을 울린다. 그리고 『물은 끓고, 영원에 가까워진다』에서 윤해서의 강렬한 언어는 독자들의 심연에서 무수한 목소리로 질문을 남기며 마음을 울린다. 그것은 영원에 가까운 진동으로 저마다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내가 감당할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매일 찾아오는 아침을 감당해.
가족을 감당해.
나를 감당해.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을 감당해.
도무지 우리를 감당할 수 없어.
모든 것들을 감당하고 있다고.
누군가 노란 우울에 대해 말할 때.
나는 계속 밥과 밥. 밥과 박자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8분의 9박 드로잉―무화無化하는 무無로서」
당신의 꿈은 아니지만. 앞 건물의 은빛 연통이 울고 있어. 연통을 통과하는 기체는 연통을 울려. 당신을 통과하는 언어는 기체도 액체도 아니지만. 당신을 울리지. 해는 지고 여명이 남아서 하늘은 검푸른색인데. 곧 어두워지겠다. 물소리가 들려. 책 한 권 크기의 창문이 열려 있어. 당신은 조금 전 하나의 단어를 포기했어. 그것은 단지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당신은 그것을 포기하기로 갑자기, 결정했지. 결정의 순간. 단어가 바뀌었나. 「가장 오래된 포털」
그는 여자가 누워 있던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의 시절은 단 하나의 빛나는 가치로 흘러들었다. 모든 것은 사라졌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 그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흰 산은 이미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두 발 움직이면 세 발 따라붙는」
작가 소개
지은이 : 윤해서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코러스크로노스』, 중편소설 『암송』 『그』, 장편소설 『0인칭의 자리』 『움푹한』 등이 있다. 2021년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목차
재현과 현시
8분의 9박 드로잉―무화하는 무로서
리듬
가장 오래된 포털
두 발움직이면 세 발 따라붙는
우리의 눈이 마주친다면
변성
해설 | 다른 서사_김나영
발문 | 가억과 망각 사이를 떠도는 존재를 ‘ㅤㅇㅣㄷ는’ 문장들_이제니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