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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백명산
읽어서도 좋고 올라서도 좋은 산
글항아리 | 부모님 | 202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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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등산인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명저로 꼽혀온 『일본백명산』의 한국어판이 반세기 만에 초역되어 나왔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일본백명산’을 치면 731건의 검색 결과가 나온다. 그만큼 유명하며 ‘무슨 무슨 백명산’이란 이름을 붙이는 유행의 원조다. 이 책은 1964년 7월에 출판되었고 이제는 저자마저 누구였는지 희미해져서, 사람들 대부분은 백명산 투어를 기획하는 여행사가 사전에 나눠준 자료로만 대강의 정보를 얻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후카다 규야의 『일본백명산』이라고 불러야 한다.

많은 평론가의 붓을 빌려 일반적으로 ‘산의 바이블’로 표현되는 이 『일본백명산』은 저자가 산의 품격, 산의 역사, 산의 개성, 1500미터 이상의 높이 등을 기준으로 뽑은 일본 전역 100곳의 산에 대한 수필이다. 산명고山名考라는 형식 속에 일본의 등산사와 문학을 언급하면서 일본의 다양한 전통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묘사한 산은 발행으로부터 60년, 저자의 등산 활동으로부터는 100년이라는 시차가 있어서 오늘날 어지간한 산에는 로프웨이가 달려 있고, 산머리의 턱밑까지 자동차도로가 나 있어서 산의 영혼이 머물 곳이 사라진 듯한 모습도 보인다.

호황기를 누리던 당시 산록에 들어섰던 시설은 이제 폐허로 변한 곳도 많다. 다시 말해 당시에 그 산이 지녔던 경관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 이 책으로 한가했던 옛 일본백명산의 가이드북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그래도 실제로 이곳을 여행하거나 등산할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용한 참고가 될 것이며, 일본 문화에 호기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덤으로 접하게 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출판사 리뷰

전설의 명저 『일본백명산』
‘최고의 번역’으로 만나다

한국어판 『일본백명산』은 명저를 명역으로 살려낸 작업의 전범이 될
만하다. 말의 고유성과 쓰임새와 울림을 고심한 번역, 방대한 역주,
지도와 사진, 용어 설명, 충실한 색인, 한·일 자체字體 비교 등 끝 간 데까지
번역의 완벽성을 추구하면서 원저의 진액을 뽑아냈다.

모든 백명산의 시작 후카다 규야의 『일본백명산』


등산인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명저로 꼽혀온 『일본백명산』의 한국어판이 반세기 만에 초역되어 나왔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일본백명산’을 치면 731건의 검색 결과가 나온다. 그만큼 유명하며 ‘무슨 무슨 백명산’이란 이름을 붙이는 유행의 원조다. 이 책은 1964년 7월에 출판되었고 이제는 저자마저 누구였는지 희미해져서, 사람들 대부분은 백명산 투어를 기획하는 여행사가 사전에 나눠준 자료로만 대강의 정보를 얻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후카다 규야의 『일본백명산』이라고 불러야 한다.
반면 전문 산악인, 등산애호가 사이에서 『일본백명산』은 자신의 경험이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권위의 표준이다. 즉 백명산이라는 말은 일본 내 등산 관련 거의 모든 콘텐츠의 해시태그가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일본에서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들의 커뮤니티나 블로그에서 『일본백명산』을 몇 줄 인용하지 않는 법이 없다. 또한 백명산이 속한 지역의 홍보나 지역 연구자들의 보고서며 논문, 심지어 지역 사회의 단체와 관계된 것에서도 빠트리지 않고 언급하고 있다. 저자가 등산 전후에 머물렀던 숙소는 말할 것도 없고 지도나 안내 책자, 투어 프로그램 등 파생 상품도 마찬가지다.
많은 평론가의 붓을 빌려 일반적으로 ‘산의 바이블’로 표현되는 이 『일본백명산』은 저자가 산의 품격, 산의 역사, 산의 개성, 1500미터 이상의 높이 등을 기준으로 뽑은 일본 전역 100곳의 산에 대한 수필이다. 산명고山名考라는 형식 속에 일본의 등산사와 문학을 언급하면서 일본의 다양한 전통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묘사한 산은 발행으로부터 60년, 저자의 등산 활동으로부터는 100년이라는 시차가 있어서 오늘날 어지간한 산에는 로프웨이가 달려 있고, 산머리의 턱밑까지 자동차도로가 나 있어서 산의 영혼이 머물 곳이 사라진 듯한 모습도 보인다.
호황기를 누리던 당시 산록에 들어섰던 시설은 이제 폐허로 변한 곳도 많다. 다시 말해 당시에 그 산이 지녔던 경관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 이 책으로 한가했던 옛 일본백명산의 가이드북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그래도 실제로 이곳을 여행하거나 등산할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용한 참고가 될 것이며, 일본 문화에 호기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덤으로 접하게 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저자에게 직접 듣는 백명산 선정 배경

일본은 산의 나라다. 어디를 가도 산이 보이지 않는 곳은 없다. 시정촌市町村을 굽어보는 잘생긴 산이 서 있어서, 그곳 학교의 교가에 반드시 넣고 있는 분위기이다. 일본 국민은 대개 산을 보며 자랐다. 도쿄 정도가 산에서 멀지만 매연이 적었던 과거에는 후지산이며 쓰쿠바산이 도시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이 책에서 꼽았던 백 곳의 명산은 전부 저자가 그 정상에 섰던 산이다. 백을 골라야 하는 이상, 그 몇 배의 산에 올라봐야만 했다.
100개의 산 선정에 있어서 저자는 우선 세 가지 기준을 두었다.
첫 번째는 산의 품격이다. 누가 보더라도 훌륭한 산이라고 감탄하는 것이어야 한다. 높이에서는 합격했어도 범상한 산은 고르지 않는다. 험준함이나 굳셈, 아름다움이랄까,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두드려 오는 점이 없는 산은 고르지 않는다. 사람에도 인품의 고하가 있듯이 산에도 그것이 있다. 인격이 아닌 산격이 있는 산이어야 한다.
두 번째로, 저자는 산의 역사를 존중한다고 말한다. 예로부터 인간과 깊이 유대를 지닌 산을 제외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조석으로 우러르고 공경해서 그 꼭대기에 호코라祠를 모실 만한 산은 저절로 명산의 자격을 지니고 있다. 산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다만 근년의 이상한 관광업의 발달은 오랜 내력이 있는 이름난 산을 통속화시켜, 어느덧 산의 영혼도 머물 곳이 사라졌다. 그런 산을 고를 수는 없다.
세 번째는 개성이 있는 산이다. 개성이 현저한 것이 주목받는 것은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다. 그 형체이든, 현상現象 내지는 전통이든, 다른 곳에 없는 그 산만이 갖추고 있는 독자적인 것, 그것을 저자는 존중한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산은 고르지 않는다. 물론 모든 산은 같은 모양이 아니고 각각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그중에서 강렬한 개성이 나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부가적 조건으로서 대략 1500미터 이상이라는 선을 그었다. 산이 높다고 해서 고귀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높이가 아니면 저자가 목표로 하는 산의 카테고리에 들 수 없다. 예를 들어 에치고의 야히코야마, 교토의 히에이잔比叡山, 분고의 히코산英山 등은 예로부터 이름난 명산임에 틀림없지만 너무나 키가 작다. 예외는 있다. 쓰쿠바산과 가이몬다케. 그것을 고른 이유는 저자가 본문에 적어놓았다.
구체적으로 볼 때, 홋카이도에서는 9좌를 들었지만 그 밖에도 우페페산케ウペペサンケ, 니페소쓰ニペソツ, 이시카리다케石狩岳, 페테가리ペテガリ, 아시베쓰다케芦別岳, 고마가타케, 다루마에산樽前山 등은 유력한 후보였다. 다만 저자가 그 산들을 바라보았을 뿐, 실제로 오르지 않았다는 불공평한 이유로 제외되었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도호쿠 지방에서는 아키타코마가타케秋田駒ヶ岳와 구리코마야마栗駒山를 넣었어야 마땅했을 수도 있다. 모리요시잔森吉山, 히메카미산, 후나가타야마舟形山 등은 좋은 산이건만, 조금 키가 부족하다.
저자가 가장 망설였던 것은 조신에쓰였다. 이곳에는 높이에서 제1급은 아니지만 제2급이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모두 저자가 좋아하는 산이다. 뇨호산, 센노쿠라야마仙ノ倉山, 구로히메야마黑姬山, 이이즈나야마飯繩山, 스몬야마守門山, 아라사와다케荒澤岳, 시라스나야마白砂山, 도리카부토야마鳥甲山, 이와스게야마, 그 밖에 백명산 안에 들어와도 조금도 손색없는 산이 많이 있다.
사람들은 후쿠다 규야에게 어느 산이 가장 좋으냐고 곧잘 물어본다. 이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가장 최근에 다녀온 산이다. 그 산의 인상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위에서 예로 들었던 산도 만약 내가 그곳에서 막 돌아왔더라면 당연히 백명산에 넣었을 것이 분명하다.
일본 알프스의 산들이 백명산 안에 사분의 일 이상 차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혼슈의 등뼈를 이루는 이곳은 눈에 띄는 것만 헤아려도 금세 서른을 넘겨 버린다. 그중에서의 선택도 저자를 당혹스럽게 했다. 당연히 꼽았어야 할 산으로는 유키쿠라다케, 오쿠다이니치다케奧大日岳, 하리노키다케針ノ木岳, 렌게다케蓮華岳, 쓰바쿠로다케, 오텐조다케, 가스미자와다케霞澤岳, 아리아케야마有明山, 가키다케, 게카치다케毛勝岳 등이 있었다. 남쪽에서는 다이무겐야마, 자루가타케ヶ岳, 시치멘산七面山도 넣고 싶었다.
호쿠리쿠에서는 하쿠산 산맥의 오이즈루가타케ヶ岳나 오가사야마大笠山를 꼭 넣을 작정이었다. 이는 저자 고향의 산이라서 편드는 것만이 아니라, 이런 숨겨진 훌륭한 산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퍼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등정할 기회를 가지지 못해서 유감스럽지만 생략했다고 밝힌다.
간사이에서 골랐던 이부키야마, 오다이가하라야마, 오미네산 이 외에도 예로부터 이름난 스즈카야마鈴鹿山나 히라산比良山을 넣고 싶었다. 스즈카야마에는 세 번 갔다. 하지만 고자이쇼다케御在所岳는 이미 유원지가 되어 있었고, 후지와라다케藤原岳에 올라 스즈카의 산들을 바라봤지만 무엇 하나 높이가 없는 점이 저자를 주저하게 했다.
주고쿠는 고산이 부족하다. 호키 다이센에 올랐던 날은 더없이 드맑은 가을날이었고, 그 정상에서 나는 산요와 산인을 가르는 척량산맥을 바라보았다. 나의 기대는 어딘가에 이렇다 할 산이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 겹이나 이어진 산들은 모두 하나같이 평평한 구릉이라,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없었다. 히루젠蒜山에도 들러 봤지만 명산으로서 추천하기에 어딘가 부족했다.
다시 서쪽으로 가서 산베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이번에는 니시추고쿠西中國의 산들을 바라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명산을 찾아다니는 일은 보람 없이 끝났다. 이렇게 해서 주고쿠에서는 다이센 하나가 되었다. 만일 따로 꼽으려고 한다면 효노센일지도 모르겠다.
시코쿠에서 이시즈치산과 쓰루기산이라는 2좌는 이의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규슈는 6좌를 골랐는데, 그 밖에 유후산由布山, 이치후사야마市房山, 사쿠라지마산을 염두에 뒀었다. 모두 개성 있는 멋진 산이다.

번역 배경과 주요 고려사항들

역자가 속했던 모임에서 뒤풀이 자리면 종종 화제로 삼는 일본 등산가들이 있었다. 주로 김영도金永棹(1924~2023) 선생께서 말문을 열어 시작되었다. 이를테면 본문에 등장하는 고구레 리타로, 다나베 주지, 오시마 료키치, 그리고 권말에 이 책의 해설을 쓴 구시다 마고이치 같은 분들이었고 후카다 규야 선생도 단골이었다. 모두 그들의 저작과 함께 짝지어서 등장했다. 대개 극단적인 말로 고전은 누구나 들어는 봤지만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일본백명산』도 예외일 수는 없었고, 모두 그 어떤 책보다도 내용을 궁금해하는 분위기였다.
김영도 선생은 1970년에 시작된 전국 35개소 산장 건설을 주도했고, 한국인으로는 고상돈 씨가 초등한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대장, 1978년의 북극 탐험대장 등을 지냈다. 이후 한국등산연구소를 설립해 구미의 여러 등산서를 번역하고 등산사를 연구했다. 어느 날 역자는 김영도 선생에게 걸작으로 꼽는 일본의 산서는 무엇이냐고 여쭌 적이 있었다. “『일본백명산』이 그 백미”라는 대답을 듣고 역자는 “그럼 선생님이 번역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다. “말맛을 내기가 워낙에 어려운 책이라서……”라는 게 당시의 답이었다. 시간이 지나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역자와 같은 모임의 김진덕金珍德 씨가 작은 모임을 만들어서 일본의 산서를 읽어보자는 제안을 하곤 했다. 또한 한국과 일본에서 『일본백명산』만큼 영향을 미친 책은 다시없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아직도 『일본백명산』이 번역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역자 역시 우리나라에서 근대 이후의 등산사와 필연적 관련이 있는 일본의 등산사에 평소 관심이 많았고 홋카이도의 산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었기에, 별 뜻 없이 『일본백명산』을 윤독해보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궁금했던 나머지 어쩌다가 번역을 역자가 맡기로 해서 일을 키웠다. 그렇다고 해서 역자가 일본에서의 등산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일본백명산』 앞부분에 등장하는 홋카이도의 산을 몇 편 번역한 후 몇몇 친구에게 나머지 내용이 궁금하다는 식의 호응을 얻지 못했더라면, 이내 완역 욕심이라는 망상을 내려놓았을지도 모른다.
번역 작업이 혼슈로 건너가자 일본 특유의 다양성의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산명고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일본 전국의 산에 관한 이야기가 얽혀서 있어서 마치 팔도 사투리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작가 스스로가 편당 400자 원고지 5매라는 원칙을 잡고 썼기 때문에 이 책의 압축을 풀었을 때 그 방대함은 남달랐다.
가령 ‘아라시마다케’ 편에서 나오는 中出라는 지명이 있다. 이것은 다양하게 읽을 수 있지만, 해당 지역의 독법은 찾기가 어려웠고, 그렇다고 해서 얼버무리기도 싫어서, 역자는 직접 그 지역 일대의 도로 표지판을 뒤져본 결과 ‘나칸데’로 읽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책은 초판본을 기준으로 양장본 26센티미터의 길이에 해당 편마다 자그마한 지도와 사진 한 장의 도판을 실은 222페이지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을 다뤘다는 점에서 책에 등장하는 낯선 점들을 잘 살펴보고 설명하기로 했다. 본문의 역주는 다양한 견해의 일부라는 것을 전제로 달았다. 일본의 문화사는 예외적인 요소가 많아서 한 가지로 정의된 개념어로 해석하기 어렵고, 규칙성을 전제로 논리적인 구조를 갖는 경우를 찾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따라서 역주 또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당연히 모순되거나 부족한 정보를 전달할 수도 있다고 본다. 다만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역자의 의견을 제외하고 전거가 없는 것은 되도록 인용하지 않았다. 도서와 논문을 참조한 것은 물론이고, 고도서는 일본 공공 도서관의 디지털 자료를 열람했다. 일본의 백과사전에서는 가능하면 집필자가 명기된 항목을, 방대한 자료가 있으나 잘못된 정보도 있는 일본 위키에서는 출전이 있는 부분만 확인 후 참고했다.
자연이나 자연 현상을 표현하기 위한 말은 일찍부터 나라마다 대개 고유어가 발달해 있었다. 다만 도시생활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은 옛사람들처럼 날씨의 추이나 지형의 변화를 다양하게 경험하고 섬세하게 묘사할 일이 줄어들어서 그에 관한 표현들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등산을 다루는 글에서는 빠트릴 수 없는 요소라 그와 관련된 잊힌 우리말을 먼저 수집해놓고 우리의 산과 일본의 산을 올라본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에 맞게 채택했다.
지형의 묘사와 관련된 부분의 확인을 위해서 여러 지도를 참조했는데, 상세한 일본국토지리원의 지리원지도(전자국토 Web)를 통해서는 전체적인 지형을 파악했고, 시판 조감도와 등산지도 등을 통해 어프로치
와 등산로, 실제 산의 형태, 주변 지형과의 관계, 시설이나 건조물의 존속 여부 등을 확인했다. 사진에 대해 말하고 싶다.
본문에 실은 사진의 선별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산의 특징을 담으려면 해당 산의 전용全容이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고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캡션으로 설명하려면 어디에서 바라보고 촬영한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결국 해당 루트를 선택한 다른 등산자의 시선을 따라 눈으로 오를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그저 지나치며 눈으로만 담기에는 아깝고 가보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 너무나 많아서 새삼스럽게 저 말이 와 닿았다. 그러나 그러한 산의 표정들을 본문의 지면에 일일이 드러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모든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 가장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고르려고 했다. 하지만 필요한 자리마다 적절한 사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험난한 산을 오르면서도 결정적 장면을 포착하고 싶었을 촬영자의 의지만큼 행운이 따르지 않았을 아쉬웠던 순간에도 많이 공감했다. 따라서 당연하지만 분식한 사진도, 태가 나지 않는 사진도 더러 있어서 그것만으로 해당 산의 미추를 판단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해당 산의 이런 구우일모에 지나지 않는 겨우 몇 장의 사진이 명산에 대한 환상을 깨트릴 뿐만 아니라 그릇된 선입관을 심을까봐 망설였지만, 결국 책의 내용을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역자가 골라 수록하게 되었다.

후쿠다 규야의 삶에 대하여

『일본백명산』은 저자가 이전에 발표했던 산에 관한 여러 수필과 상당 부분 주제와 내용이 겹친다. 즉, 저자는 같은 산을 두고 여러 편의 수필을 썼다. 이렇게 저자는 오랜 세월 『일본백명산』을 준비했고 글을 깎고 다듬었다. 덕분에 이 책의 텍스처는 보다 조밀·복잡해졌고 행간은 더욱 넓어졌다. 그리고 일본 문학의 자연 묘사를 계승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인맥은 도쿄 생활을 시작한 구제 제1고등학교(이하 제1고)의 인연이 평생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구제 고등학교는 진학보증제도로 제국대학 입학자격이 자동 부여되었다. 제1고는 도쿄제국대학(이하 도쿄대) 예과의 기능을 하고 있던 터라 대부분 도쿄대로 진학했다. 따라서 도쿄대 출신 친구라는 것도 엄밀히 말해 제1고 친구다. 예를 들어 고바야시 히데오는 저자의 제1고 1년 선배이자 쓴소리도 마다치 않았지만 그의 명예가 회복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친구다. 후지시마 도시오는 제1고 여행부(산악부의 전신) 8기 선배이자 친구였으며 그의 마지막 산행에도 가장 연장자로서 동행해 그의 최후를 목격했다.
후카다는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했지만, 그와 별개로 등단 작가였던 그가 인생 후반에 산에 관한 글에만 집중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는 결과적으로 일본 문학계에서 과적으로 산의 작가 후카다 규야와 아동문학가 기타바타케 야호北八穗(1903~1982)라는 두 가지 장르의 작가를 낳게 했다. 따라서 그의 첫 번째 부인 기타바타케 야호와 두 번째 부인인 고바 시게코木庭志げ子에 얽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후카다는 “내 마음속에는 여러 겹의 자물쇠가 있는데, 한 가지만 빼고 모두 오픈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 한 가지가 기타바타케 야호에 관한 일이다. 야호는 후카다가 가이조샤改造社의 편집부에서 일할 때 현상소설의 선별담당자와 응모작가로 만났다. 야호의 재능을 알아본 후카다는 그녀의 고향 아오모리까지 찾아가서 만났고 이들은 그렇게 맺어졌다. 그녀는 척추 카리에스를 앓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후카다의 본가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1929년 여름부터 그들은 동거를 시작했고 그 시절의 빈곤함은 가마쿠라로 이사할 때 짐이라고는 고작 리어카 한 대 분량이었다는 것으로 말해준다. 이때가 이른바 ‘가마쿠라 문사 시대’로, 간토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쿄에서 통근권 내에 있고 출판사와도 왕래가 편리해진 가마쿠라에 문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가리켜 가마쿠라 문사라고 했다.
이 무렵 후카다가 발표한 소설은 그의 제1고와 도쿄대 선배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호평을 받는 등 촉망받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듯했다. 이를 계기로 오직 붓 한 자루로 일어서려고 학적을 걸어두고 있었던 대학도 중퇴하고 출판사도 그만두게 된다. 후카다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야호와 1940년에야 정식 부부가 되었으나, 후카다는 1941년에 8살 연하의 제1고와 도쿄대 후배이자 친구인 평론가 나카무라 미쓰오中村光夫(본명 고바 이치로木庭一郞)의 누나인 고바 시게코를 나카무라의 결혼 피로연에서 마주쳐 운명처럼 재회한다.
5살 연하인 시게코는 후카다가 제1고 시절 매일같이 길가에서 그녀의 하교 시간에 맞춰 어슬렁거리다 마주치곤 했던 첫사랑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두 사람은 함께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오타리 온천에서 오르려고 아마카자리야마에 가게 되었다. 후카다는 이때의 기억을 『나의 청춘기』에서 “이 우연이 나의 반평생을 지배하게 될 줄이야!”라고, 『기타구니きたぐに』에 실린 「낙향의 글都落ちの記」에서는 “정말 내 인생에서 이런 생각해본 일도 없는 복병(지금의 아내와 연애 이야기)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변함없이 가마쿠라 문사로 흥청거리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라고도 적고 있다.
후카다는 패전 후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가마쿠라에 들르지 않고 시게코와 장남 모리타로森太郞가 있는 유자와湯澤로 돌아간다. 결혼이 파탄 나자 야호는 후카다가 자신의 초고를 표절했다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폭로해버린다. 이런 일이 터지기 전에 이웃에 살고 있던 선배 가와바타와 친구 고바야시는 표절을 눈치채고 후카다에게 자기 작품을 쓰라고 아낌없는 충고를 해주었다. 후카다가 소설집 『쓰가루의 들津輕の野づら』을 발표하면서 “이런 유치한 이야기가 비평가의 손에 걸리지 않고 그저 소수의 사람에게만 사랑받기를”이라고 자신의 치부를 암시하는 듯한 후기를 쓰자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고바야시는 아사히신문 지상에다가 “무슨 놈의 쭈뼛쭈뼛한 수작으로 작자는 자신의 청춘을 세상에 내보내려는가. 그리고 이 수작은 작자 혼자의 수작이 아니다”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후카다가 문단을 떠나 고향인 다이쇼지와 가나자와로 내려가서 살았던 7년 반의 세월은 그야말로 자복雌伏하던 어려운 시기였다. 평판에 대해 일절 변명도 없이 후카다는 산의 문학자로 전향하게 된다. 주변에서 어떻게 보았든지 간에 문인으로서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던 이때를 후카다 자신은 매문도세賣文渡世하던 시기로 자평했다.
은둔을 끝내고 도쿄로 돌아오자 ‘고상한 생각’을 실천했다. 어느 문인이라도 책 욕심이 있겠지만, 히말라야 관련 문헌에 대한 그의 열정은 스스로 병적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이런 집착은 1950년 6월 3일 프랑스 등산대가 안나푸르나를 초등하고 나고부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유럽이 도전해온 8000미터급 히말라야 자이언트가 하나둘씩 떨어지자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 이른바 ‘눈의 거처Abode of Snow’라고 할 수 있는 히말라야에 대한 문헌을 소개하고 번역하기 시작했다. 알파인클럽의 기관지 『알파인 저널』 60권짜리 전질이 마침 매물로 나온 것을 보고 상경 후 첫 성공작이었던 『히말라야 산과 사람』의 인세를 거의 털어서 12만 엔에 샀다. 히말라야 희귀본을 구하려고 『일본백명산』으로 받은 요미우리 문학상의 상금 20만 엔에 10만 엔을 보태서 마루젠丸善 서점에서 문헌전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봐뒀던 책을 샀다. 공무원의 초임이 1만 엔이던 시절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게코 여사는 매번 해외 도서 구입으로 마루젠에서 날아오는 청구서가 무섭다며 가슴 졸이며 열어봤지만, 남편이 부탁한 양서洋書가 들어왔다면 무거워도 안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 당시 귤 상자를 쌓아 만든 책장의 무게 때문에 집안 마룻바닥 여기저기의 귀틀이 부러질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다이세쓰잔으로 가 있는 동안 시게코 여사는 히말라야 컬렉션을 위해 집안에 그의 호를 붙인 두 평짜리 구산산방九山山房을 지어주었다. 후카다는 “나 같은 가난한 사람이, 예를 들어 주식 한 주도 가지고 있지 않고 정기예금도 없이, 비가 새는 집에 살며 월말에 돈을 변통하는 것도 부드럽게 넘어가지 못하는 살림에 이런 고액의 지불을 용서받았던 것은 오로지 아내의 내조 덕분이다”라고 쓰고 있다. 비싼 책을 사고 나서 사흘 동안 아내에게 말 한마디도 못 붙였다느니, 한꺼번에 집으로 들이지 못해서 회사에 두고 한 권씩 가지고 갔다느니 하는 산 친구들의 이야기를 「책 수집本集め」이라는 글에 쓰고 있지만, 정작 후카다에게 그런 고생은 없었다고 오모리 히사오는 말한다.
『일본백명산』을 제16회 요미우리 문학상에 추천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고바야시 히데오였다.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그는 2월 1일 자(상의 발표일이기도 하다) 『요미우리신문』에 추천 이유를 썼다. “평론 부문에서 나는 후카다 규야 씨의 『일본백명산』을 추천했다. 이것은 최근 들어 가장 독특한 비평문학이라고 여긴다. (…) 저자는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산에는 산격이 있다고 말한다. 산격에 관해 좀 더 자신 있는 비평적 언사를 얻기 위해 저자는 50년의 경험이 필요했다. 문장의 수일秀逸은 그로부터 왔다. 나에게 산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사람은 저자였다. (…) 나의 추천에 대해 거의 전 위원의 찬동을 얻었기에 내 일처럼 기뻤던 것을 외람되게나마 덧붙여두고 싶다.” 후카다는 이 글에 대해 “마음의 눈물을 흘렸다”라고 했으며, 동지 2월 6일 자의 수상소감으로 “펜보다는 발의 공로다. 산의 글로 문학상을 받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춘풍태탕春風蕩한 인품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전지에서도 난폭한 다른 상관들과는 달리 부하들에게 하이쿠를 가르쳐주었기에 전쟁 후에 고향 인근인 노토能登에 사는 옛 부하들이 하이쿠를 매개 삼아 은둔하고 있던 그를 넌지시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읽어서도 좋고 올라서도 좋은 산

역자는 서문을 마무리하며 말한다.
“이 책은 체력과 기술과 담력을 갖춘 소수의 일류 등산가를 유혹하는, 하지만 언제든지 내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산이 아니라, 숲 내음에 둘러싸여 새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고 산길을 거닐려는 사람들에게 속삭이듯 누구라도 어서 오시라고 하는 모두의 산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산에 가지 않더라도 일본 열도라는 긴 갤러리에 전시된 명산의 큐레이션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일본에 백명산이 있는 한, 사람들이 그곳으로 하이킹을 떠나는 한, 계속 읽힐” 책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후카다 규야
일본의 작가이자 쇼와 시대에 활동한 등산가다. 도쿄제1고교를 나오고 도쿄제국대학을 중퇴했으며 고바야시 히데오 등 문단의 인맥을 이 시기에 형성했다. 전쟁 전에는 등단 작가로 소설을 쓰고 편집자로도 활약했지만, 결혼과 이혼, 사생활과 표절 논란에 휘말리며 결국 낙향했다. 평판에 대해 일절 변명도 없이 후카다는 이 7년의 자복 기간에 산의 문학자로 전향하게 된다. 전쟁 후에는 산과 스키에 관한 수필로 유명해졌다. 산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한 저서 『일본백명산』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하이쿠 필명도 산이 들어간 구산九山이었으며 자택 서재를 겸한 서고에는 ‘구산산방九山山房’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1971년 3월 21일, 등산 중이던 가야가타케 정상 직하에서 뇌졸중으로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 장소에는 『후카다 규야 선생 종언의 땅深田久彌先生終焉の地』이라고 표기된 비석이 세워져 있다. 기일인 3월 21일은 “구산기九山忌”라 불린다. 하쿠산의 기슭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어렸을 때 어머니의 “너는 커서 뭐가 될래?”라는 물음에 “중이나 거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 말처럼 평생 산에 들어가 거친 음식을 먹으며 한뎃잠을 잤다. 『일본백명산』은 그 기록의 진수다.

  목차

역자 서문 | 오기팔도 | 도도부현 | 백명산 위치도 | 표제

1부 홋카이도北海道
001 리시리다케利尻岳
002 라우스다케羅臼岳
003 샤리다케斜里岳
004 아칸다케阿寒岳
005 다이세쓰잔大雪山
006 도무라우시トムラウシ
007 도카치다케十勝岳
008 포로시리다케幌尻岳
009 시리베시야마後方羊蹄山

2부 도호쿠東北
010 이와키산岩木山
011 핫코다산八甲田山
012 하치만타이八幡平
013 이와테산岩手山
014 하야치네早池峰
015 조카이산鳥海山
016 갓산月山
017 아사히다케朝日岳
018 자오산藏王山
019 이이데산飯豊山
020 아즈마야마吾妻山
021 아다타라야마安達太良山
022 반다이산磐梯山
023 아이즈코마가타케會津駒ヶ岳

3부 조신에쓰上信越·오제尾瀨·닛코日光·기타칸토北關東
024 나스다케那須岳
025 우오누마코마가타케魚沼駒ヶ岳
026 히라가타케平ヶ岳
027 마키하타야마卷機山
028 히우치다케燧岳
029 시부쓰산至佛山
030 다니가와다케谷川岳
031 아마카자리야마雨飾山
032 나에바산苗場山
033 묘코산妙高山
034 히우치야마火打山
035 다카즈마야마高妻山
036 난타이산男體山
037 오쿠시라네산奧白根山
038 스카이산皇海山
039 호타카야마武尊山
040 아카기산赤城山
041 구사쓰시라네산草津白根山
042 아즈마야산四阿山
043 아사마야마淺間山
044 쓰쿠바산築波山

4부 북 알프스北アルプス
045 시로우마다케白馬岳
046 고류다케五龍岳
047 가시마야리다케鹿島槍岳
048 쓰루기다케劍岳
049 다테야마立山
050 야쿠시다케藥師岳
051 구로베고로다케黑部五郞岳
052 구로다케黑岳
053 와시바다케鷲羽岳
054 야리가타케槍ヶ岳
055 호타카다케穗高岳
056 조넨다케常念岳
057 가사가타케笠ヶ岳
058 야케다케燒岳
059 노리쿠라다케乘鞍岳
060 온타케御嶽

5부 우쓰쿠시가하라美ヶ原·야쓰가다케八ヶ岳·지치부秩父·다마多摩·미나미칸토南關東
061 우쓰쿠시가하라美ヶ原
062 기리가미네霧ヶ峰
063 다테시나야마蓼科山
064 야쓰가타케八ヶ岳
065 료가미산兩神山
066 구모토리야마雲取山
067 고부시다케甲武信岳
068 긴푸산金峰山
069 미즈가키야마瑞牆山
070 다이보사쓰다케大菩薩岳
071 단자와산丹澤山
072 후지산富士山
073 아마기산天城山

6부 중앙 알프스中央アルプス·남 알프스南アルプス
074 기소코마가타케木曾駒ヶ岳
075 우쓰기다케空木岳
076 에나산惠那山
077 가이코마가타케甲斐駒ヶ岳
078 센조다케仙丈岳
079 호오잔鳳凰山
080 기타다케北岳
081 아이노다케間ノ岳
082 시오미다케鹽見岳
083 와루사와다케惡澤岳
084 아카이시다케赤石岳
085 히지리다케聖岳
086 데카리다케光岳

7부 호쿠리쿠北陸·긴키近畿·주고쿠中國·시코쿠四國
087 하쿠산白山
088 아라시마다케荒島岳
089 이부키야마伊吹山
090 오다이가하라야마大臺ヶ原山
091 오미네산大峰山
092 다이센大山
093 쓰루기산劍山
094 이시즈치산石鎚山

8부 규슈九州
095 구주산九重山
096 소보산祖母山
097 아소산阿蘇山
098 기리시마야마霧島山
099 가이몬다케開聞岳
100 미야노우라다케 宮ノ浦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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