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감각의 문을 여는 순간, 새하얀 불면 속으로 백광의 입자가 몸을 파고든다. 오래된 세계에서 뛰쳐나온 요정이 몰고 오는 빛무리처럼, 잊고 있던 세계의 이면이 되살아나 자신을 통째로 들어 올리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문지아의 시집 『당신의 울음을 필사하는 하얀 밤』은 그 놀라운 체험을 언어의 형식으로 되살린다.
아름다움이란 왜 언어의 세례를 받은 뒤에야 눈물로 찾아오는가. 시인은 멈춰 있던 시간의 바다가 바람을 따라 움직이며 쓰나미처럼 요동치는 그 찰나를 포착한다. 울음은 말을 긷는 자맥질 끝에 비로소 밀려오는 밀물이며, 이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힘겨운 줄다리기 끝에 남은 신열의 풍경이다.
출판사 리뷰
문지아 시집 『당신의 울음을 필사하는 하얀 밤』을 펼치면 새하얀 불면과 함께 밀려드는 백광(白光)의 입자가 온몸을 포박하듯 달려든다. 마치 오래된 세계에서 뛰쳐나온 요정이 몰고 오는 빛무리처럼, 잊고 있었지만 언제든 되살아나 자신을 통째로 들어 올려 향하게 하는 세계 이면의 형식 속으로 성큼 들어선 사실을 생각하곤 소스라치며 놀라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어째서 생겨났을까. 왜 아름다움은 둔중한 걸음걸이처럼 지나가는 언어의 세례를 받고 나서야 찾아오는 눈물 같은 것일까. 시간이 멈춘 듯 영원히 잠기어 있을 것만 같았던 바다가 바람의 결을 따라 움직이면서 마침내 쓰나미 되어 요동치듯, 울음은 말을 긷는 몇 번의 자맥질과 여러 번 헛디딘 발걸음이 지나간 자취에 비로소 떠미는 밀물 같은 것이리라. 이런 과정은 시인이 느끼는 세계와 현실이 경험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 사이의 지난한 힘겨루기 끝에 반점처럼 번져 신열(身熱)을 앓게 된 풍경화와 다를 바 없다는 자각과 관계한다.
당신의 울음을 필사하는 하얀 밤
당신의 이목구비가 비로소 서사를 갖기 시작하였다
특이점 없는 무혐의 속 오늘의 날씨에서
의지를 가지고 바라보는 너는
가만히 가만히 나를 계산하고 있었음이라
발화되기도 전 표정들과 함께 다 잠겨버린 소식들의 혀를
더 이상 구해내지 않음으로써 이해를 포기하며
각자 구기다 놓아버린 무용의 종이컵들처럼
사연은 점점 멀어져 간다
오직 한 사람의 표정으로만 성큼거리던 저녁
소용이 다 되어 떨어져 나가는 포스트잇처럼
이제 ‘세월’에서의 오늘이 곧 떨어져 나갈 뿐
당신의 울음을 옮겨 적는 밤
열정은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는 그런
내 눈에 이미 가득 차오르는 것이 계절임을 모르고
자꾸만 자꾸만 봄으로 뒷걸음질 치는 나는
드문드문
있다
건너갈 수 없는 하나의 몸을 오래오래 쫓는다
아무런 기억도 기억해 내지 않은 채
그저 전속력으로
지나쳐야만 했던
수몰지구
절망은 사람의 목발이라네
맨 앞에서 발목이 슬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그 사람의 꿈들이 떠나간 자리엔,
베개처럼 눕는 슬픔들이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어
통곡은 리허설조차 없이 매혹적이야
누구의 가슴에도 각주로 달 수 없는 슬픔,
어느 기도문에도 퇴고되지 않는 기도들이
범람하고 또 범람하지
계절마다 되풀이되는 건
삶을 구원한다는 사제들의 말뿐,
그러나 그 말마저 얼어붙어 가는 것을 보았네
무겁게 언 강물 위로는
시간이 부서지며 흘러가고,
떠난 자들의 흔적은 빛을 잃은 채
물결 속으로 잊혀 가고 있지
물속 깊은 곳에서조차
여전히 들려오는 건 한숨 같은 물결 소리.
희미한 희망조차 녹아내린 땅,
그러나 그곳에도 아픔을 감싸안은 봄이
언젠가는 찾아올까
아니, 그저 얼음이 녹아 흐르는 일만 남았을까
나선
반고리관에서 떨어진 발자국을 따라
꽃잎들을 모조리 짓밟으며 걸어가면
절대 사라지지 않을 영원에 도달하겠지
그러나 나는 허물어진 집 앞에 멈추었다
그 두꺼운 입방체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한 번은 관성처럼 기울어졌다
비의 냄새는 바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눅눅한 8월의 어느 구간
유지를 받은 복제인간처럼 순응해도 좋았다
누수된 베란다에 도서를 몇 날 며칠 띄웠다
글자로 이룬 바다 위 종이배가 떠다니듯
나는 엮인 아버지의 시집을 날마다 회수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문지아
1973년 제주 출생. 연세대학교 대학원 독어독문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2023년 『시사사』로 등단했다. ‘시다’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서시의 반대말도 모르는 서시 15
당신의 울음을 필사하는 하얀 밤 16
리허설 18
오늘의 물집 20
오늘의 풍선 22
백야 24
유빙의 온기 26
백야 29
가라앉지 않는 파동 32
묘연杳然 34
로그인 36
가위 38
일가족 40
암실과 레퀴엠 42
닻 45
닻 46
제2부
상심의 위력 50
흔痕의 연혁 52
태동 55
사라졌습니까 56
수몰지구 58
수몰지구 60
석류 62
석류의 안색 64
커튼 66
80년 동안의 분만 68
예보하지 않은 걸음 70
보온 72
어느 날, 나는 73
목각 안개 76
페이드아웃 78
장마 80
마트료시카 딜레마 82
나무는 천국 속에서 자란다 84
피와 시 86
제3부
봄비 91
Ghost Town 92
드라이클리닝 94
심장 위에서 96
증명의 오차 98
손오공이 근두운이라면 100
엄마는 참치의 화석이 아니다 102
스토커 104
수세권이라는 말 106
13주 후 107
냉장고와 치매의 100분 토론 108
소문처럼 흩어져 떠도는 한 사람 110
비의 성별 112
중심 잡는 시계 114
통증 116
나선 117
야광 118
회전문에 낀 염낭거미 120
▨ 문지아의 시세계 | 정훈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