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정이향의 시는 일상의 구체적 서사와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삶과 닮은 서정을 펼친다. “심장 끝에 닿”는 웃음과 거울 같은 응시로 허기진 일상에 위로의 밥을 지어 건네는 따뜻한 목소리를 담았다.
출판사 리뷰
정이향의 시는 일상성에 발을 깊이 담그고 있다. 시인은 현실 경험을 벗어나지 않는 시에 가치를 둠으로써 삶과 다르지 않은 시, 세계 내의 삶인 시를 추구한다. 일상적 삶의 애환을 진솔하게 노래하려는 작가 의식은 구체적 시공간과 인명, 주름을 가진 풍부한 서사를 통해 이뤄진다. 현재・현실・인식에 충실한 문학은 과거・꿈・무의식과 거리를 둠으로써 전체적으로 순화되고 편안한 느낌의 서정으로 스며든다. 무엇보다 정이향의 시는 우리의 “심장 끝에 닿”는 “웃음”이거나 마주 비추는 “거울처럼 서 있”으면서 ‘너’의 “고운 이야기”(「딸아」)에 민감한 귀를 가졌다. 브레이크도 없이 과속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허기를 위해, 위로의 밥을 짓는 그의 안부는 오늘도 계속되는 것이다.
은행나무가 보이는 교실에서
시를 놓고 밥 먹었다
시는 밥 짓는 일
폼 나게 쓰는 시는 죽은 시
시를 놓고 돈가스를 먹었다
경험 시를 죽을 각오로 쓰라고
사물에 눈을 달라고
내 이름에도 눈을 달지 못하는
언어를 붙잡고
눈을 주고 코를 주고 귀를 달아주는 시간
은행나무는 제자리에서 단풍을 입혔다
마라톤만큼 오래 달려야 하는 길에 시가 달렸다
온 생, 향기로 몰아간다
천국의 계단
통유리 바깥에서 나는 그녀를 본다
반쯤 눈을 감고 반쯤 고개 숙인
가만히 오른쪽 뺨에 갖다 대는 엄지와 검지는
업의 무게를 모두 덜어낸 듯 날렵하다
몇 세기 동안 그렇게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걸치고 앉아 있어도
척추는 유연하고 사유思惟는 자유롭다, 아니
그녀의 혼은 자유롭다
출구가 없는 통유리 안에서
시간에 갇힌 나를 그녀가 본다
할인마트
아뿔싸
한숨 풀고 보니
할인마트에서 싸게 산 유통기간 짧은 물건들
간장, 김, 마요네즈 그리고 덤으로 딸려 온 그릇들이 보인다
헐레벌떡
할인된 사람들 속 나도 세로줄로 서고
가벼운 바코드 옷으로
어느 누군가에게는
유통기간이 지난 사람으로
하수구에 쏟아진 간장처럼 버려진다
버려진 자리에 검게 앉은 기억들
수돗물을 틀자 금방 따라 쓸려나가는
참 가벼운 사람들 틈 사이
나도 웅크리고 앉았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이향
마산 출생. 2009년 『시에』 등단.시집 『좌회전 화살표』 『수직의 힘』 등.경남문인협회 회원, 고성문인협회회원, 한국디카시연구소 사무국장, 고성디카시인협회 회장, 문덕수문학관 총괄간사.
목차
제1부 복숭아 네 개, 수박 하나
편지
서머 러브
플라스틱 플라워
여름 장마
진달래
산수유
4월은 유예 중
8월 5일
이사하는 날
매미
복숭아 네 개, 수박 하나
기일
가을약속
보드
보드 콜리
연애 다리 문화동
감자
오후 10시
사춘기
사과나무
설악초
에스키스
박
제2부 할인마트
성실한 답변
선물
춘복이
덜커덕
딸아
한아름 아파트 사람들
물고기 반지
통영 정량리 275번지
하르키우 정류장
법원장터
은행나무가 보이는 교실에서
삼산면 병산리 003번지
무척산 모은암
고성터널 1
지하철 3호선
함안 동신아파트 402호
시민극장
흥국사
리더스 원룸
한백마리나 아파트 202
할인마트
번개시장
제3부 등이 굽은 여자
대평1길 10 제일건재공구 상사
창원 임진각
송학리 고분군
신안동 현대아파트
상복공원에서
마산 공원묘지
새벽시장에서
석장동에서
거룩한 무덤
양덕동에서
발톱
서울 달팽이
호미의 등
큰오빠
세 번째 고민
12번 버스
아버지의 부재
바운스 바운스
등이 굽은 여자
도계동 할머니
제4부 동박새
키다리아저씨
요시코
열쇠
밥
줄서기
집
정숙이
훈방 조치
기월리 할아버지
망하는 일
타투
함안 기동댁
아버지제사 2
손톱
동박새
로드킬
수선집
보이스피싱 2
해설
일상의 날들, 시로 쓰는 편지│신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