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한 인간의 삶을 한순간 뒤바꿔 놓은 사건들 자체보다, 그 이후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들의 내밀한 감정과 윤리적 흔들림에 이야기하는 소설집이다. 음주 사고, 부역, 실직, 가족의 죽음, 기억의 왜곡, 기술 시대의 죄책감 등 작품들이 다루는 사건은 다르지만, 그 뒤편에 남은 정적의 시간은 모두 “그 후로”라는 같은 이름 아래 서로 흡수되고 연결된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누구 하나 온전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출판사 리뷰
■ 작품 설명
1. 「손님」
오래된 사진관을 배경으로, 기억의 가장 깊은 층위를 조용히 건드리는 작품. 사진을 복원하는 행위가 곧 자기 과거를 들여다보는 의식이 된다. ‘손님’으로 찾아온 여인은 사실 다른 누구도 아닌 과거의 자신이며, 사진사는 타인의 기억을 인화하는 조용한 증언자의 자리에 선다. 사건의 스펙터클 없이도, 한 인물이 자기 삶으로 귀환하는 순간의 떨림을 탁월하게 포착한다.
2. 「안녕의 온도」
어린 시절 친구의 죽음 이후, 끝내 말하지 못한 ‘안녕’이라는 인사말을 둘러싼 애도의 온도를 그린다. 꿈속에서 다시 도착한 인사, 군대 내무실의 냉기 속에서 느끼는 미세한 체온의 변화가 감정을 대신한다. ‘안녕’을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애도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섬세한 작품이다.
3. 「쓸쓸한 바다 풍경」
부산과 베트남을 오가며, 도피·왜곡·자기 합리화로 버텨 온 남자의 죄책감을 담아낸다. 비극을 타인의 이야기로 포장해온 그는 결국 딸의 폭로를 통해, 자신이 지워버린 과거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바다는 더 이상 도피처가 아니라 죄의 무게가 되돌아오는 장소가 된다.
4. 「성채」
군사독재 시절 제자를 정보기관에 넘겼던 노년 교수의 내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사과와 자기방어, 반성과 체면 유지를 오가며 스스로의 ‘성채’ 안에서 흔들린다. 지식인의 책임과 죄를, 악마화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은 채 정면으로 파헤친다.
5. 「그 후로」
표제작. 억울한 사건으로 25년을 잃은 한 인물이 “그 후로”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는가를 묻는다. 그는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빼앗긴 ‘말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 언어를 다시 구성한다. 기억은 피해자의 무기가 아니라 저항의 언어가 된다.
6. 「남쪽 바다에 잠들다」
한 남자가 생의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는 조용한 레퀴엠. 사랑과 믿음에 끝내 매달렸던 그는 남쪽 바다에서 삶의 마지막 미광을 맞이한다. 세밀한 묘사와 절제된 문장이 극적인 비극보다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7. 「오란의 자손들」
한 가문의 장자 중심 구조가 어떻게 폭력과 왜곡을 누적시키는지를 탐구한다. 특정 인물을 악인으로 지목하지 않고, 세대적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죄와 반복된 패턴을 드러낸다. 유산·돌봄·책임의 불균형이 어떻게 후손들에게까지 전가되는지 보여주는 탁월한 가계 서사다.
8. 「괜찮아질 시간」
콜센터, AI 챗봇, 코인, 데이팅 앱이 뒤섞인 가장 현대적이고 잔혹한 단편이다. 음주 치사 사고 이후 자기 파괴로 추락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죽은 연인의 계정이 ‘추모 자동복원’ 기능을 통해 자동으로 복원되는 장면은 애도와 기술의 비극적 교차점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9. 「정원」
모방 욕망과 질투, 상실과 치유를 정원의 은유로 풀어낸 우화적 단편. 정원은 폭력의 무대이자 치유의 장소이며, 잃어버린 자리 위에 다시 삶을 심어넣는 행위가 핵심을 이룬다. 소박하지만 강력한 상징이 돋보인다.
10. 「낙마」
검증 과정과 정치인으로서의 행위에서 희생양으로 소환된 여성 장관의 몰락을 통해, 권력과 윤리의 관계를 비판한다. 누가 진짜 ‘낙마’해야 하는가를 묻는 날카로운 사회 소설이자, 권력 언어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11. 「약속」
기후 위기 이후 제도가 인간의 사적 감정까지 재편하는 디스토피아. “면담”, “대기 상태”, “동반자 배정”, “소멸” 등 관리 언어로 구성된 세계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미래가 이미 문서로 설계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카프카적 절망을 정교하게 구현한 짧디짧은 단편이다.
12. 「옆집」
거대한 사건 없이도 현대인의 불안과 단절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인사하지 않는 옆집, 무표정한 복도, SNS에 밀려난 이웃 관계. 공동체의 말기적 장면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조용하지만 깊은 공포가 남는다.
■ 출판사 리뷰
단편소설집 『그 후로』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후로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집이다. 제목이 시사하듯, 이 소설들은 재난·상실·배신·폭력·파국을 통과한 뒤의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2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다양한 세대지만, 모두 이미 한 번 무너져 본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그 후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사건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고, 때로는 침묵의 공범이며, 도피자이며, 잊고 싶은 기억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끝내 그 기억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이전 소설집 『세월』이 “흘러간 시간의 슬픔”을 회상과 애도의 정조로 그렸다면, 『그 후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억 이후의 윤리”를 탐구한다. 작가는 기억을 향수나 감상적 회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기억은 이 책에서 언제나 윤리의 출발점이다. 과거를 떠올린다는 행위는 곧 ‘지금 여기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자기 심문이며, 그 질문은 작품 속 인물들을 한계 지점까지 몰아간다.
배경 또한 독특한 정조를 만든다. 베트남의 골목, 붕괴된 가족의 거실, 오래된 사진관, 병원 복도, 반지하, 낯선 해안, 사라진 마을, 무표정한 아파트 복도 등, 이 책의 공간들은 ‘누군가의 부재가 남긴 자리’들이다. 화려한 풍광 대신, 사람이 사라진 뒤의 흔적들과 조용한 뒤척임이 중심에 있다. 이 빈자리들을 더듬는 일이 곧 서사가 된다.
작가 윤혁의 문장은 이전보다 더욱 절제되고 건조해졌지만, 그 이면에는 오랜 윤문과 사유가 스며 있다. 감정의 폭발 대신, 문장 사이의 “침묵”, “여백”, “낮은 체온” 같은 미세한 떨림들이 인물의 내면을 드러낸다. 이 절제 덕분에 작품 속 비극은 과장 없이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그 후로』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닿는 작품집이다. 누구든 삶에서 한 번쯤 “그 후로…”라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 말 뒤에 어떤 문장을 이어갈 것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그 후로도 인간은 살아가야 한다. 때로는 무너진 채로, 때로는 끝내 버텨내며.”
“그녀는 오래전의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었다. 사진 속에서 잘려 나간 가장자리, 초점이 흐릿한 얼굴, 오래된 먼지의 결들은 모두 말하지 못한 생의 빈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의 빛을 조정하며, 누군가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곧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증언하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윤혁
부산대를 졸업했다. 본명은 윤부혁. 2007년 Daum 블로그를 개설하여 10년 이상 인문학 관련 서평과 연작소설을 발표했다. 2010년 「대한민국 100대 블로그」로 선정되었다. 2009년 ~2015년까지 매년 「우수블로그」로 수상했다. 2014년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월간지 [맑고향기롭게]에서 2015. 7월 ~ 2016.12월 <옛날의 금잔디>, 2017. 1월 ~ 2017. 12월 <고전을 읽다>를 연재했다. 1982년 희곡 <탈출>로 「효원문학상」을 받아 등단했으며 저서로는 연작 전자소설 『옛날의 금잔디(다음, 2017)』, 시집 『도시의 바람(올리브 출판사(2002)』, 장편소설 『기억과 몽상(청어, 2018)』, 단편소설집 『세월(신세림출판사, 2022)』, 산문집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신세림출판사, 2023)』 등이 있다.
목차
1. 손님
2. 안녕의 온도
3. 쓸쓸한 바다 풍경
4. 성채
5. 그 후로
6. 남쪽 바다에 잠들다
7. 오란의 자손들
8. 괜찮아질 시간
9. 정원
10. 낙마
11. 약속
12. 옆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