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말년을 요양병원에 의탁한 한 노년 여성의 시선을 따라 개인의 기억과 가족사, 한국 근현대사가 함께 직조된다. 존엄사를 향한 내적 과정과 의료 시스템 안의 욕망이 교차하며, 개인의 삶이 역사와 분리될 수 없음을 소설적으로 드러낸다. 요양병원의 현재와 회고의 과거가 교차하는 서사는 한 개인의 죽음마저 역사적 맥락 속에 놓이게 한다.
식민지와 전쟁, 군사독재와 현대사의 국면 속에서 이름 없는 이들의 삶이 호출된다. 작가는 민중의 일상을 통해 ‘역사학적 역사’에서 소외된 존재들을 복권시키며, 개인 또한 역사의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민과 절제를 바탕으로 존엄, 돌봄, 정치와 역사를 함께 사유하게 하는 장편소설이다.
출판사 리뷰
여성 주인공의 눈으로 본 민중 서사
강병철의 장편소설 『굿모닝, 요양병원』은 말년을 요양병원에 의탁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개인사적 회고와 가족사, 그리고 한국의 근대사를 함께 직조하면서 전개된다. 동시에 화자가 존엄사에 이르는 내적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대한민국의 의료 현실이라든가 또는 그 시스템 안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개인들의 욕망은 좀처럼 화자의 존엄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작가는 화자의 요양병원 생활의 틈새에 화자의 회고를 굵직하게 끼워 넣음으로써 화자의 존엄사를 도우며 화자 개인의 죽음마저 역사와 깊이 연관돼 있음을 일깨워준다. 과연 역사의 도저한 흐름과 개인의 삶이 불리 불가능하지만, 화자의 연배를 가진 한국의 개인들은 더더욱 한국의 근대사와 독립적일 수 없음을 작가는 짧지만 디테일한 삽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군사독재 시절의 강압 통치로 이어지는 수레바퀴를 멈췄다고 생각하는 찰나 다시 2024년 123 비상계엄 사태를 소설 속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역사가 개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환기시킨다. 차라리 개인의 삶 자체가 역사와 깊숙이 맞물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개인의 삶은 그렇게 역사의 흐름에 수동적이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화자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던 필용 씨의 건강한 자수성가에서 보듯 개인의 삶은 은밀하게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거나 또는 역사의 능동적 주체가 되기도 한다.
피댓줄 잘 감고 기계 잘 다루고 쌀가마를 정리하는 일이 그의 체질에 딱 맞더라고 했다. 근력도 장사여서 우마차 쌀가마니도 베개 들 듯 가뿐하게 들어 올렸고 돈 대신 퍼주는 쌀의 분량도 눈치껏 조금씩 깎아주면서 인심도 얻은 것이다. 그렇게 발동기 피댓줄을 돌리면서 남아 있던 빚을 쬐끔씩 털어내는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으니 전화위복의 시초이다. 손님들과 편하게 안면을 트고 이력이 붙으면서 종업원 조필용의 얼굴을 보려고 일부러 완행버스로 찾아오는 단골까지 생겨났다.
그 와중에 열아홉 수복이와 데릴사위 둥지를 틀면서 가세가 편안해진 게 확실하다. 방앗간 취업과 동시에 야무진 색시까지 얻은 겹경사 소문이 물수제비처럼 퐁퐁 퍼진 것이다.(28쪽)
주인공인 박공희 여사처럼 필용 씨는 이름 없는 필부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때로는 방황과 일탈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묵묵히 감당해낸다. 이런 필부의 생활이 어떻게 역사의 능동적 주체가 되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건에 뛰어든 사람만 역사의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 소설의 배면에 깔린 문제의식이다. 주인공 박공희 여사가 자신의 이웃들과 친척들, 자식들의 삶을 하나하나 불러내는 것은 그들의 삶이 위대해서가 아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삶을 작가가 기록한 것은 ‘역사학적 역사’에서 소외된 존재들을 문학을 통해 역사학적 역사보다 더 큰 역사로 복권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랬을 때만이, 예를 들면 오키나와 전쟁에 끌려갔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당숙’의 삶이 그 큰 역사에 오롯이 등재될 수 있다. 민중의 삶은 ‘역사학적 역사’와는 무관해 보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 역사를 등에 짊어진 존재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여기서 당숙이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장면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가 잔파곶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당장 총알이 몸을 관통할 거라는 직감이 명치를 푹 찔렀다. 하여, 여명 직전 초병들의 교대 틈새에 몰래 막사를 나온 게 ‘신의 한 수’이다. 그늘만 골라 찾으면서 몸을 움직였다. 곧바로 해변가 절벽으로 치달렸으니, 초병의 눈에 걸리는 즉시 사살된다. 사생결단 각오로 나뭇가지를 잡고 서쪽 벼랑을 뛰어내리다가.
‘으으흐흡.’
삭정이가 부러지면서 오른손가락 두 개가 바위에 갈리는데도 아픔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중지와 검지 두 개가 쌍둥 잘려나가면서도 오히려 신음소리를 죽이느라 입술조차 떼지 못했다. 윗도리로 손을 싸맨 채 바다가 보이는 절벽 동굴을 찾아 엉금엉금 숨는 찰나 비행기 폭격이 ‘쾅, 쾅’ 터졌다. 방금 탈출했던 막사가 불길에 활활 휩싸인 것이다. 그 절체절명을 벗어난 후에도 동굴 바깥으로는 절대로 나오지 않으면서.(78~79쪽)
깊은 연민과 품을 가진 다정한 소설!
소설의 후반부는 자식들의 삶을 중심으로 현대사가 펼쳐진다. 그전에 남편이 겪었던 516쿠데타 직후의 모욕적인 상황과 필용 씨와 얽힌 개척단 노동자들을 통해 군사정권의 야만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어머니로서 자식들이 겪은 고초에 더 무게를 싣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교직에 있던 아들들의 해직 사태는, 주인공 박공희 여사에게 특히 힘든 시절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작가의 말’에도 언급되었지만, 이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다.
도교육청 장학사 두 명이 새벽 다섯 시 초인종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아드님이 북괴의 회유에 놀아난 거’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피우며.
“아들 같은 사람이 북침설을 주장한다고요.”
그 말을 들은 나도 약이 바싹 올라.
“북침이 뭐대요? 북한이 침략한 게 북침인가요? 남한이 침략한 게 북침인가요?”
그는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북침이니까…… 북한이 침략한 게 맞겠지요. 아마.”
대답을 하면서도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짓기에 내가 대뜸.
“그럼 장학사님 주장이랑 뭐가 다른 건가요? 북한이 쳐들어온 게 북침이라메요. 북침설이 뭐가 문제대유?”(233쪽)
얼핏 주인공의 재치로 읽힐 수도 있으나 1980년대 상황은, 주인공이 전하는 전쟁과 이어져 전쟁과 분단의 상처가 여전했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주장이 아니라 주인공 박공희 여사의 경험과 성격을 통해서 소설적으로 형상화 해냈다는 점일 것이다. 소설의 근본이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이러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국면들을 훌륭하게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코로나 이후 의료 현장에 대한 생생한 증언도 빼놓지 않는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활동에 제약이 큰 연로한 여성이다 보니 의료 현장에 대한 총체적이고 객관적인 보고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주인공의 경험 내에서 포착되는 인간들의 다양한 성격과 처지는 이채롭다 할 것이다. ‘현재’에 대한 주인공의 관찰은 요양병원 내의 에피소드들을 소개하면서 소설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일조한다. 단지 돌봄 노동자들의 성격들을 드러내서가 아니라 돌봄 행위가 제도화되면서 어쩔 수 없이 당사자는 대상으로 전락하는 장면은 어쩌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본뜻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가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만 자식들의 상투화된 효도와 제도화된 돌봄의 그물망은 주인공을 무기력하게 하고 만다. 하지만 존엄사에 대한 주인공의 갈망이 자신이 겪은 역사의 파노라마를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굿모닝, 요양병원』은 진부한 ‘실버 소설’도 아니고 또 남성 중심의 무거운 ‘역사 소설’도 아니다. 이 소설은 한 여성의 수다에 가까운 자유로운 이야기들로 잘 짜여진 구조를 가진 ‘진짜 소설’이다. 한탄 조의 비감이나 신파가 아니라, 존엄사에 대한 갈망에 비례하는 깊은 연민과 품을 가졌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고 다정한 소설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역사와 정치를 놓치지 않는!
그해 4월, 유채꽃 노란 대궁이 사뿐사뿐 흔들리던 봄날이 확실하다. 여우내 물안개가 뿌옇게 오르는 둔치로 필용 씨가 다시 덜컥 나타났으니 영락없는 뽕짝 영화 스크린이다. 그전에도 수복이한테 살짝 수작을 붙였다가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으니 ‘다시’라는 말이 맞는 것이다. 영화에서 청춘남녀가 프로포즈 하는 걸 흉내 내며 청금산에서 꺾은 개나리 한 묶음 들이밀자, 처음에는.
“쉽게 보이나유? 지가?”
노려보다가 금세 고개 돌리며.
“남의집살이허는디 이런 거 함부루 받으면 눈총 먹어유.” 손사래 치는 바람에 ‘쭈우’하고 첫 헛물을 켰으나 아주 싫은 느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보름 후 다시 5일장에 서 사온 호떡 봉지를 디밀자.
“주인집하고 한치* 먹을 튜. 아저씨가 줬다고 정직허게 실토 헌 다음 먹는 게 심사 편해유. 그렇쥬?”
질풍노도 소년의 달뜬 희망이랄까, 소학교 시절 월반으로 5년 만에 졸업했던 수재 소년의 광폭 유학 행보가 전쟁통에 꼬였으니, 그 또한 운명이다. 저 푸른 창공으로 훨훨 날갯짓하고 픈 욕망이 펄펄 넘치면서 공군 장교로 덜컥 자원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오판이었다. 일본은 절망적 전황 상태를 털끝만큼도 흘려주지 않으면서 오로지 ‘도스께끼(突擊)’ 목청만 높였다. 목숨을 바쳐 천황폐하를 보위하는 게 멸사봉공 사명이라며 광분에 싸인 채 ‘돌격’ 명령만 질렀고 또 그대로 먹혀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황국신민의 그 흐름에 동참했으니 그게 ‘우민으로의 동화’이다.
그렇게 조종사를 꿈꾸던 황성구 청년까지 오키나와 전쟁터 자살 특공대로 직통 연계되었으니 사람 팔자가 그렇듯 예측불허이다. 황성구가 느끼기엔 명분 없는 개죽음이었지만 공군학교의 다른 청년 조종사들은 달랐다. 일본 본토 청년들은 어금니 깨물며 자국의 승리를 빌며 ‘부모님 전 상서’의 눈물 서린 편 지를 쓰기도 했다. 아니, 몇몇 조선인 유학생도 그랬다. ‘몸 바쳐 적의 항공모함에 부딪치면 나의 영광이요, 나라의 명예이다’라며 황군으로 전사하게 됨을 영광으로 받드는 쪽으로 세뇌되었으니.
‘어머니, 저는 사선으로 떠납니다.’
목숨을 바치는 걸 영광으로도 여기는 서신이 줄을 이었다.
27일 후,
분당종합병원으로 앰뷸런스를 타고 또 옮겨졌으니 그 이유가 황당한 건 아니다. 무릇 병원은 수술과 치료를 위해 세워진 시설이지 고칠 수 없는 환자들을 재우는 숙박업소가 아니다. 따라서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는 당연히 요양원으로 보내야 한다. 그래도 보호자 입장에서는 요양원으로 모시는 게 왠지 ‘포기한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는 게 문제이다. 자식들은 그게 싫어서 병든 노모를 또 몇 차례 다른 병원이나 재활병원으로 옮기고 또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내 병이 더이상 회복이 어려우므로 혹시 ‘마지막이라며 집에 보내주는 걸까?’ 그러면 텔레비전이나 실컷 틀어놓고 졸다가 보다가를 반복하다가 적당한 시점에서 숨을 끊어야겠다는 기대도 가져보았다. 병원을 나와 다시 앰뷸런스의 삐용삐용 소리를 들으며.
‘드디어 가나 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강병철
1983년 『삶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서, 시집 『유년 일기』 『하이에나는 썩은 고기를 찾는다』 『꽃이 눈물이다』 『호모중딩사피엔스』 『사랑해요 바보몽땅』 『다시 한판 붙자』 『격렬하고 비열하게』 등과 청소년시집 『세수 안 한 날』, 장편 소설 『해루질』 『닭니』 『토메이토와 포테이토』 『엄마의 장롱』 『꽃 피는 부지깽이』 등, 소설집 『열네 살 종로』 『초뻬이는 죽었다』 『비늘눈』 『나팔꽃』 등, 산문집으로 『어머니의 밥상』 『선생님이 먼저 때렸는데요』 『작가의 객석』 『쓰뭉선생의 좌충우돌기』 『우리들의 일그러진 성적표』 『선생님 울지 마세요』 등을 냈다.
목차
작가의 말 / 5
실족 / 11
오키나와 당숙 / 52
요양보호사 / 92
지아비 / 112
뇌졸중 / 138
친정어머니 / 165
여섯 침대 / 179
개척단 / 198
전쟁 / 216
관재수 두 사연 / 227
그 간병인 / 257
계엄 / 277
꿈 /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