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책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건국의 정치를 다룬 통사이다. 구체적으로는 고려말 공민왕부터 공양왕, 위화도회군 이후 고려의 멸망, 조선건국에 이르는 약 40여 년(1351-1392)의 정치사와 정치사상을 다루었다. 14세기, 19세기 말은 한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였다. 14세기 말은 세 가지 변동이 중첩된 시기였다. 첫째, 중국 대륙의 원·명 왕조 교체. 둘째, 한반도의 고려·조선 왕조 교체. 셋째,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국가이념 교체. 세계사적으로는 몽골제국에 의해 문명의 축이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 전환기였다.
이런 대변화에 맞서 공민왕은 원으로부터 독립하고 정치개혁에 매진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 이유는 개혁의 비전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태조 왕건의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것은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 유신들이었다. 고려의 정신은 풍수지리와 불교의 초현실적 힘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성리학은 인간의 도덕적 바탕 위에서 개인과 가정, 국가를 완성하려는 합리적 이념이었다. 신흥 유신들은 불교와 풍수지리를 비판하고, 신흥 무장 이성계와 함께 성리학 국가인 조선왕조를 건국했다.
출판사 리뷰
이 책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건국의 정치를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고려말 공민왕부터 공양왕에 이르는 고려 말 40년간(1351-1392)의 정치사와 정치사상을 다루었다. 14세기 말과 19세기 말은 한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였다. 14세기 말은 세 가지 변동이 중첩된 시기였다. 첫째, 중국 대륙의 원·명 왕조 교체. 둘째, 한반도의 고려·조선 왕조 교체. 셋째, 국가이념의 불교·성리학 교체. 세계사적으로는 문명의 축이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 전환기였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무지하고 야만적 국가가 아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를 통합하여 동서양과 유목·농경문명을 융합한 유례없는 세계 문명을 이룩했다. 쿠빌라이 시대 때 중국을 방문한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 속에서 자유롭고 번영하는 몽골 제국을 풍경화처럼 그렸다. 고려는 30년간 몽골의 침략에 저항했다. 그러나 1259년 항복 뒤 몽골 제국의 일원이 되어 세계 문명의 세례를 흠뻑 받았다. 가장 큰 영향은 발전한 강남 농법과 송나라의 성리학이 고려에 유입된 것이다. 100여 년의 장기 평화 속에서 고려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또한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 유신들이 성장해 조선건국을 추진하는 세력으로 자라났다.
14세기 중엽 이후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원·명 교체라는 근본적 변동이 발생했다. 1351년 홍건적의 난이 시작되어, 1368년 몽골제국이 무너지고 명이 건국됐다. 이런 상황 변화에 부응해, 공민왕은 몽골 지배에서 벗어나 개혁정치에 매진했다. 공민왕의 개혁은 태조 왕건 시대를 이상적 모델로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개혁의 비전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결국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다.
공민왕을 이은 우왕대 14년은 폭군 우왕과 권신 이인임에 의한 폭정의 시대였다. 고려가 최악의 상황에 빠진 근본적 이유는 공민왕의 개혁 실패에 있었다. 그 결과 고려는 방향 감각을 잃었다.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좌절감, 그리고 개혁의 방향에 대한 혼돈이 고려 사회에 팽배했다.
이와 함께 우왕 개인의 문제가 더해졌다. 그는 신돈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의혹을 지녔다. 이 때문에 이인임 등의 귀족 세력에게 완전히 제압되어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했다. 우왕 재위기에 권문세족들은 국가를 사유화하고, 토지를 전국적으로 사유화했다. 최영은 이런 세태를 한탄했다. 그러나 그는 이인임 정권의 수호자 역할을 하면서 신진 유신들을 탄압했다. 그 이유는 그가 개혁의 방향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최영은 왕조의 전통적 가치에 따라, 왕과 국가에 충성을 다했다. 또한 그 가치관 위에서, 우왕을 옹립한 이인임을 차선의 대안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고려의 멸망에 일조했다.
한편 고려의 지식계를 이끈 이색은 우왕대에 침묵을 지켰다. 그는 몽골 지배기에 고려에 유입된 정신적 유산의 저수지 같은 존재였다. 젊은 시절 아버지 이곡을 따라 원나라 태학에 유학했고, 원나라 과거에도 높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색은 공민왕 초년에는 왕에게 근본적 개혁을 촉구했다. 그러나 공민왕 말년부터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고 정신운동에 몰두했다. 그는 공민왕 16년(1368) 성균관을 중영하고,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을 고려의 지식계에 널리 유포시켰다. 이에 동도하는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 유신들이 이색 아래 집결했다. 이들은 우왕 초년 집권자 이인임의 친원정책을 비판하면서 역사에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인임, 최영에 의해 죽거나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색은 침묵했다. 이 때문에 신진 유신들은 정치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주에 유배되어 10여 년간 복권하지 못한 정도전은 신흥 무장 이성계와 손잡고 역성혁명을 준비했다.
1388년 최영과 이성계가 손잡고 무진정변을 일으켜 이인임 세력을 모두 축출했다. 그런데 명이 철령 이북의 영토를 요구하자, 최영은 요동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대중국 전쟁에 반대한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일으켰다.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처형했다. 그 후 정몽주, 정도전, 조준 등 신진 유신과 협력해 대대적인 전제개혁에 나섰다.
당시 고려의 가장 큰 문제는 토지제도의 문란이었다. 몽골 지배기에 국가 권력이 취약해지면서, 권문세족은 토지 점탈을 본격화해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고 농민을 노비화시켰다. 토지가 사유화되면서 국가 재정이 무너져 관료들에게 토지와 녹봉을 지급할 수 없었다. 또한 왜구의 발호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토지를 잃은 백성은 유민화되고, 왜구의 침입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결과 고려 왕조는 재산과 생명이 위태로워진 백성의 민심을 잃었다. 공민왕대에 신돈이 등용되어 대규모 사전 개혁에 나섰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공민왕처럼 개혁 의지는 강했으나, 개혁의 방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반면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파의 강력한 전제 개혁은 성리학적 국가이념에 기초한 정전제 모델에 따른 것이었다.
고려 왕조의 또 다른 문제는 불교의 타락이었다. 삼국 시대에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는 신라 법흥왕대 이후 국가이념으로 채택되었고, 호국 불교를 통해 고대국가의 완성에 크게 기여했다. 불교는 정치는 물론 지식계에도 폭넓게 확산되었고. 기복 불교로서 널리 민심을 얻었다. 고려는 건국 뒤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불교의 가장 큰 정신적 문제는 속세를 부정한 데 있었다. 이 때문에 고려 성종대에 최승로는 정신세계는 불교, 정치세계는 유교에 의존해야 한다는 이원론적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데 불교는 무신란 이후 타락했을 뿐 아니라, 쇠락하는 국가에 아무런 정치적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런 정신적 공백 상태에 새로운 빛을 비춘 것은 몽골 지배기에 유입된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세속을 적극적으로 인정했고 불교의 탈세속성을 반윤리적인 것으로 비판했다. 성리학은 또한 천리(天理) 개념을 통해 세속 안에서의 개인의 완성, 그리고 가족과 국가에서 평화를 이룩할 방법론을 제시했다.
13세기 말 안향이 성리학을 소개한 이후 14세기 중엽 이제현,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이 성리학을 새로운 개혁 이념으로 적극 수용했다. 그 가운데 이성계와 정치적으로 제휴한 것은 정몽주와 정도전 등 이색 좌파였다. 이색은 위화도회군과 전제 개혁에 반대했다. 이 때문에 신진 유신은 양분되었다. 정몽주는 기본적으로 이성계파의 개혁을 지지했지만, 전제 개혁에는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개혁이 깊어지면서 고려 왕조의 운명이 점차 위태로워지자, 정몽주는 결국 역성혁명에 반대해 반이성계파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1392년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를 계기로 반격에 나섰으나, 이방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조선 왕조는 고려말 신진 유신과 신흥 무장 세력이 결합되어 건국되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건국 초 왕위계승 과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정도전이 제거되었다. 그 결과 정도전은 500년간 조선의 역적으로 비판받았다. 그 반면 정몽주는 태종대에 복권되고, 중종대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런 역사적 전도가 발생한 이유는 정치와 도덕을 동일시한 성리학의 형이상학이 역성혁명을 수용할 수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조선은 자신의 국가이념에 의해 건국을 정당화할 수 없는 역설 속에서 탄생했다.
역사에는 평화롭지만 평범한 시대가 있고, 어렵지만 창조적인 시대가 있다. 한말의 조선처럼 공민왕대(1352-1374) 이후 40여 년 동안 고려는 수차의 전쟁과 기근, 폭정을 겪었지만,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창조적인 시대였다. 고려말의 실천적 지식인들은 국가의 공공성 붕괴, 그리고 불교의 부패와 유학의 현실도피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공백 현상을 목격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난을 함께 슬퍼했다. 성리학을 새로운 문명과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당대 고려의 정신적 혼란과 정치적 위기를 자신들의 역사적 사명으로 받아들여,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개혁운동에 헌신했다. 그 결과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처한 근본적 딜레마는 조선이 역성혁명에 의해 건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념적으로 옹호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즉 혁명 없이는 역사 속에서 성리학이 실현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은 그 혁명을 부정해야 했다. 그 결과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정몽주는 성리학을 위한 순교자가 된 반면, 조선의 건국자들은 패륜적 인간들로 역사 속에 매장되었다.
고종 이래의 모든 고려의 왕들은 배후에서 키를 움직이고 있는 원을 의식해야 했다. 원은 왕위는 물론 그들의 생명까지 좌우할 수 있었다. 왕조의 존속과 대외적인 평화의 대가로 고려는 거의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했다. 심지어 고려를 원의 일부로 복속시키려는 입성책도 네 차례나 전개되어, 형식적인 자주성조차 위협받았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영수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객원연구원,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사회과학대학 학장, 대통령실 연설기록비서관을 역임했다. 한국동양정치사 상사학회 회장을 거쳐 현재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이다. 단독 저서로는 『건국의 정치』(2006) 『고려의 가을』(2022) 『세종대의 정치와 사상』(2022)이 있고 공동저서로 『정치학의 대상과 방법』(2005) 『한국정치사상』(2010) 『세종리더십 이야기』(2010)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o5
01 고려의 가을
1. 역사로의 귀환 o15
2. 고려의 가을 o23
1) 원의 고려통치: 지배와 보호의 역설 o24
2) 원 지배하의 고려 정치: 권문세족과 탐욕의 시대 o35
3) 코스모폴리타니즘과 고려의 개명:
성리학의 유입과 혁신운동의 대두 o52
02 개혁과 전쟁: 공민왕대 전반기의 정치(1352-1365)
1. 개혁(공민왕 1-5/1352 1356) o70
1) 공민왕 원년의 개혁과 반동: 권문세족과의 전쟁 o70
(1) 공민왕의 즉위과정: 2전 3기 o70
(2) 개혁의 목표: 태조 왕건으로의 복귀와 '무일無逸'의 정치 o74
(3) 민생 개혁: 권문세족과의 투쟁 o80
(4) 정치운영상의 개혁: 인사, 사정司政, 소통 o86
(5) 개혁의 장애: 개혁이냐 측근이냐 o110
2) 개혁의 위기와 반원정책: 조종의 법을 회복하라 o132
(1) 개혁의 중단과 친원세력의 집권: 군주를 떨게 하는 기철 일족 o132
(2)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독립: 너의 부모는 고려 사람이다 o138
2. 전쟁(공민왕 5-14/1356 1365) o153
1) 새로운 시작: 지루한 개혁 o155
2) 전쟁: 개혁의 실패와 신뢰의 파괴 o177
(1) 전쟁의 서막: 국가가 장차 망하겠구나 o178
(2) 제 1·2차 홍건적의 침입: 개경의 함락과 정세운의 대첩 o184
(3) 전쟁 영웅들의 처형: 정치의 슬픔과 정몽주의 비탄 o193
(4) 왕과 신하의 불신: 김용의 반란-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o210
(5) 원의 침입: 덕흥군의 난과 민심이반-누가 전하를 따르겠습니까 o216
3) 방황: 고려의 정신적 방황-하늘의 길, 인간의 길 o224
03 좌절과 실정: 공민왕대 후반기의 정치(1365-1374)
1. 좌절(공민왕 14 -20 1365 -1371) o271
1) 신돈의 대리정치: '세상을 떠나 독립한 사람'의 정치 o272
(1) 공민왕의 정치적 좌절과 신돈의 집권배경: 노국공주의 죽음 o272
(2) 신돈의 정치세력의 재편과 권력강화: 유자는 나라에 가득찬 도둑이다 o287
(3) 신돈의 개혁정치: 노예가 말하기를, 성인이 나왔다 o296
(4) 신돈 정치의 악화 o310
2) 공민왕의 슬픔과 타락 o315
(1) 공민왕의 유희와 토목공사: 백성은 왕의 하늘이요,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다 o316
(2) 공민왕의 불교신앙: 왕도냐 불도냐 o324
3) 신돈의 처형 o334
2. 실정(공민왕20 23 1371 -1374 ) o354
1) 마지막 개혁시도 o355
2) 타락과 암살 o361
3) 명의 건국과 요동정벌(공민왕13 -23 /1364 - 1374) o371
4) 암흑 속의 빛: 새로운 대안 성리학 o392
04 우왕대의 폭정과 절망
1. 어둠과 빛: 권문세족정치의 부활과 성리학의 도전(우왕 1-5/1375 -1379) o432
1) 제1차 권력투쟁: 우왕의 정통성에 대한 의혹 o433
2) 제2차 권력투쟁: 성리학의 정치적 등장과 신진 유신들의 저항 o436
3) 개혁을 위한 최후의 노력 o450
4) 제3-5차 권력투쟁: 친왕파의 제거와 이인임의 승리 o463
2. 폭정: 폭군과 권신의 정치(우왕6-13/1380 - 1387) o474
1) 우왕의 폭정: 생존을 위한 자기파괴와 풍자 o476
2) 권신들의 전횡: 최영의 딜렘마와 이색의 침묵 o486
3. 위기: 외교와 국방의 실패 o505
1) 대외정책의 위기: 대명 관계의 악화 o506
2) 왜구와 해적의 시대: 백성들의 절망과 메시아에의 열망 o531
4. 대안의 발아: 칼과 성리학의 만남 o556
1) 이성계의 정치적 부상: 전쟁, 입신, 역성혁명의 꿈 o557
2) 유배와 혁명의 성리학: 정도전의 시련과 이성계와의 만남 o577
05 혁명: 이성계의 집권과 조선건국
1. 권신정치의 붕괴: 최영·이성계의 연합과 무진정변(우왕 14/1388) o614
2.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망국의 서막(우왕 14/1388) o629
3. 조선의 건국(창왕 즉위-공양왕 4/1388 1392) o659
1) 개혁: 특권의 전면적 해체와 재분배 o660
(1) 전제개혁: 인정은 밭둑에서 비롯된다 o665
(2) 지방행정의 개혁: 수령이 합당하면 백성이 복을 받는다 o701
(3) 관제개혁: 『주례』의 제도적 상상력 o706
(4) 군정개혁: 왜구 문제 해결의 실마리 o712
2) 폭풍의 계절: 권력투쟁과 조선의 건국 o715
06 영혼의 전쟁: 유교-불교 논쟁과 '이단'의 발견
1. 불교의 정치사상: 법(Dharma)의 통치와 국가의 보호 o780
1) 석가모니의 정치적 이상: 진실한 법의 통치와 공화주의 o782
2) 동아시아의 불교와 정치: 왕권과 묘법의 보물 o793
2. 이단의 탄생: 여말선초의 척불론과 이理의 에스프리 o811
1) 여말선초의 불교비판: 불승은 세상의 큰 좀벌레이다 o812
2) 불교의 정치적 지위에 관한 논쟁: 양검의 대립 o826
3) 정치가의 불교 신앙과 정치행위에 관한 논쟁:
불도는 왕도와 공존할 수 있는가? o831
4) 기복 불교 비판: '기복'의 정치에서 '위민'의 정치로 o837
5) 불교를 위한 변명: 오랑캐의 도도 도이다 o843
(1) 유불동도론: 유자나 불도가 다같이 조금도 다름이 없다 o848
(2) 호불론: 불교를 위한 변명 o855
07 조선의 국가 원리와 조선인
1. 조선의 헌정과 제도: '정치적인 것'의 성찰 o869
1) 내적 정치제도론:
정신의 제도화와 예치-백성은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o877
2) 외적 정치제도론:
욕망의 제도화와 정치-임금에게는 음란과 방탕이 쉽게 온다 o889
2. 조선인: 춘추적 인간과 이理의 모험-
군자는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룬다 o911
참고문헌 o925
찾아보기 o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