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동일방직 그 이후,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저자가 처음 《공장의 불빛》을 썼을 때 갓 스무 살이 넘었을 때였다.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난 여성 노동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은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197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저자는 그간 관련 자료집이 발간되긴 했지만 사건 위주의 기록으로는 담아낼 수 없었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그래서 부족했고 미숙했던 과거의 기록을 리모델링했다. 과거의 책이 어린 여공이 겪은 고뇌와 번민을 담았다면, 이번에 다시 쓴 《공장의 불빛》은 사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은 그 후 해고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답이다. 노동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참여했던 각 개인의 체취를 느끼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출판사 리뷰
1970년대 동일방직 사건을 겪고 쓴《공장의 불빛》은 출간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공연연출가였던 고 김민기 님은 이를 노래굿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려 많은 이의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다시 쓰는 이번 책은 그 후 긴 세월이 흐른 후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궁금증에 대한 대답 같은 글이다.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영상이 지원되고 음성까지 지원될 만큼 입담이 탁월하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능이를 찾아 산에 오르면 아름다운 가을 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고, 올뱅이를 잡으러 간 강물의 물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영순, 순애, 연봉, 용자 등등 그 당시 같이 지냈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어릴 적 이야기가 재미있게 그려지기도 하고, 힘들고 답답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읽으면 울컥 화가 나기도 한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춥고 팍팍했던 결혼 생활이며 삶의 애환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들과 같은 시련을 겪지 않았더라도 사람 사는 이야기는 공감을 자아낸다. 독특한 어휘와 투박한 사투리는 정겹고도 흥미롭다. 평범하지 않은 과거의 삶을 넘어 지금은 평범해진 일상의 삶이 감동을 준다.
이 책은 옥이로 시작해서 옥이로 끝나는데, 사실 옥이는 가상의 인물이다. 모든 글이 사실에 기초해 있으나, 저자는 옥이라는 인물을 설정하여 가장 응어리진 아픔과 우리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한 것이다. 부른 배를 동여맨 채 똥물을 뒤집어쓴 의숙 언니, 유일한 청일점으로 지금은 돼지를 키우며 사는 병국 아저씨, 택시 운전사가 된 영순이, 피해망상으로 숨진 남편을 회상하는 옥이에 이르기까지,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사람들의 독특한 캐릭터 속에 많은 사연이 녹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특별한 사람의 특이한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질곡의 세월을 겪은 내 이웃의 이야기처럼 읽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산업선교 때문이다. 아니, 빌어먹을 노조 때문이다. 엉망진창이 된 내 인생,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출근 시간이었다. 경비실 옆 노조에 수백 명의 작업자들이 모여 있다. 투쟁가를 부르며 농성을 한다. 지부장과 총무의 석방 투쟁에 들어간 것이다. 노조와 관리자 간의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진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1차 관문을 통과했다. 욕하려면 해라. 욕이 배 따고 들어가나. 돌 던지려면 던져라. 얼마든지 맞아주마. 나는 주제넘게 그런 데 참견할 수 없다. 누가 뭐래도 돈을 벌어야 한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시골집에 보내야 한다. 나는 우리 집의 기둥. 나 하나 까딱 잘못되면 우리 식구는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산업선교가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하고 간 건가? 거기는 빨갱이 단체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거지. 노조가 나빠. 외부 불순세력을 끌어들여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잖아. 그런 데 부화뇌동해가지고, 아주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지. 오늘도 뭐 하는 짓들이야? 지부장 총무를 왜 잡아갔겠어? 다 죄 가 있으니까 붙들어 갔겠지. 까놓고 말해 석 양이 지부장이나 총무하고 무슨 상관 있어?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저는 그런 거 몰라요. 그냥 책이 좋아서 갔어요. 그런 데 가면 혹시 글 쓰는 길이 있나 그래서 갔지, 다른 뜻은 없어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속으로 말한다. 담임의 기나긴 연설이 이제 끝날 모양이다.
“오늘의 불상사는 군중심리에 의해 한 번 따라간 걸로 생각하고 넘어갈 테니 앞으로 잘해보도록. 내가 지켜보겠어. 이번 한 번은 봐주지만 두 번은 못 봐줘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몇 번이나 다짐을 놓는다. 담임에게 고초를 당하고 나오면서 생각한다. 노조에 가지 않겠어. 산업선교도 절대 안 갈 거야. 굳게 결심한다. 아이고, 무시라. 노조를 싫어하는 거야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문학이고 뭐고 우선은 먹고사는 게 먼저지, 나에게 부양가족이 좀 많은가? 직장이야말로 우리 가족의 생명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순애도 필요 없다. 순애가 우리 가족까지 먹여 살리지 않는다.
결심을 굳혔지만 회사의 상황은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 내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니었다.
변절자란 굽이굽이 대목마다 너무 큰 타격을 주었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은 우리의 허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집요하게 공격했고, 끝까지 물어뜯었다. 변절자는 우리 회사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중략)
퇴근한 기숙생들이 흘금흘금 눈치를 보며 경비실을 빠져나간다. 낌새가 이상하다.
“시내에 있는 문화여관으로 가봐야겠어. 한순임이 거기서 비 밀리에 교육하고 있대.”
연봉이가 어디서 들은 모양이다. 어쩐지 기숙생들까지 나가더라. 우리만 쏙 빼놓고 아지트를 알려준 것이다. 우리는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 (중략)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떤 남자가 벌떡 일어선다. 처음 보는 얼굴에 인상이 고약하다. 삐죽삐죽 눈을 덮은 머리, 튀어나온 광대뼈. 드라마에서 보던 양아치 그대로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나가! 나가라고! 드러운 성질 건드리지 말고.”
갑자기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아저씨, 누구예요? 어디서 오셨어요?”
연봉이 또박또박 묻는다.
“야, 씨부랄년아. 내가 누구건 어디서 왔건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내가 누군지 보여줄까? 나 이런 놈이다, 어쩔래?”
순식간에 바지를 내린다. 꼴막을 내린 놈이 바지 속에서 쑥 꺼낸다. 교육받으러 온 아가씨들, 보지 않으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씨부랄년, 너 이리 와. 니가 대표자야? 물어볼 게 뭔데? 내가 가르쳐줄게.”
놈은 피할 새도 없이 부순 언니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긴다. 아악. 부순 언니의 외마디 소리! 놈은 하필이면 부순 언니 입술을 물어뜯었다. 수치심과 공포를 극대화하기에 최적인 인물이다. 어디서 저런 놈을 동원했을까?
언니 입술에 흐르던 붉은 피!
아, 우리 어찌 잊으랴, 그날을!
작가 소개
지은이 : 석정남
195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산과 물을 누비며 살다가 1975년 인천의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민주 노조의 파도가 거세게 휘몰아치던 한가운데 뛰어들었다가 3년 만에 해고당했다. 민주노조에 가담한 보복 조치는 해고로 끝나지 않았고, 전국에 뿌려진 블랙리스트로 인해 다시 취업할 수 없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돌고 돌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35년간 장사를 했다. 68세 되던 해에 대장암 3기로 진단받고 남편의 고향인 내면으로 왔다. 자연환경이 충청도보다 훨씬 풍요로워 산나물도 버섯도 많고 올뱅이도 지천인 곳에서, 곧 봄이 와 파릇파릇한 곤드레 뜯고 다래순 꺾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목차
그 이름도 고왔던 옥이
그늘 큰 나무
폭풍 전야
나체시위
우리도 사람이다
우정이 꽃피던 시절
문학이란 무엇인가
떠오르는 얼굴, 얼굴들
남편이라는 사람들
어린 시절
분식집 풍경
계엄군이었던 남편을 만난 영순
이렇게 살려고 인연을 맺었나
결혼의 굴레
해고자의 딸들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었던 당신
어려서도 산이 좋았네
늙어서도 산이 좋아라
내 마음속 대통령
타는 목마름으로
차라리 듣지 말 것을!
유쾌한 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