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오늘은 새해 들어 처음으로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날이에요.
동이는 엄마 따라 용알을 뜨러 나갔다가 그만……
이웃집 영수한테 더위를 사고 말았어요.
해 뜨기 전에 이 더위를 되팔아야 올여름을 건강하게 날 텐데.
동이 더위는 누가 사 줄까요? 동이가 더위를 팔 수는 있을까요?
온 동네에 울려 퍼지던 소리, “내 더위 사려!” 우리 부모님들이 어렸을 적에만 해도 정월 대보름날이면 아침부터 온 동네가 시끌시끌했습니다. 이날만큼은 친구가 “아무개야!” 불러도 절대로 대답해서는 안 되었지요. “응?” 하고 무심코 돌아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당장에 “내 더위 사려” 공격이 들어올 테니까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던가요. 친구가 “아무개야!” 부르면 냉큼 돌아보며 “내 더위 사려!”나 “내 더위 맞더위!”를 외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럼 더위를 팔려던 친구가 되레 더위를 사게 되거든요.
더위를 파는 말도 동네마다 달라서 어떤 동네에서는 “내 더위 네 더위 먼 데 더위!” 하기도 했고, 어떤 동네에서는 “내 더위 네 더위!” 하기도 했습니다. 차 떼고 포 떼고 “내 더위!”만 외치는 동네도 있었지요. 문제는 어떤 말이든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여름 더위를 친구 몫까지 도맡아 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침나절 안에 다른 친구에게 더위를 되파는 수밖에 없습니다(옛날에는 해 뜨기 전에 되팔아야 된다고 했답니다. 참 부지런하기도 했지요). 그러니 온 동네 아이들이 한바탕 더위팔기 전쟁을 벌일 밖에요.
더위팔기는 가장 최근까지 이어져 온 대보름 풍속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놀이의 성격을 띤 까닭이지요. 더위를 팔 친구를 찾아서 온 동네를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해가 머리 꼭대기에 와 있고, 더위를 판 아이건 더위를 못 판 아이건 ‘정말 잘 놀았다!’는 기분이 들게 마련이지요.《내 더위 사려!》는 이 더위팔기를 중심에 두고 정월 대보름의 이모저모를 살뜰하게 보여 주는 책입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대보름날은 할 일도 많아 우리 겨레에게 정월 대보름은 설이나 추석 못지않게 뜻 깊은 명절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함께 풍요를 상징하는 새해 첫 보름달을 보면서 풍년 농사를 비는 날이었기 때문이지요. 새벽부터 밤까지 크고 작은 행사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농사철이 시작되면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쳐야 할 일이 많으니, 그 전에 다함께 신 나게 놀면서 정을 나누고 협동심을 다졌던 것이지요.
동이의 대보름은 닭 울음소리를 세는 일로 시작됩니다. 첫닭이 열두 번도 넘게 울었으니 올해 농사는 대풍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지요. 남들보다 먼저 마을 우물에서 용알을 건져 와야 합니다. 실은 어젯밤 용이 알을 낳고 간 우물물을 떠 오는 거지만요. 그런데 엄마를 따라 마을 우물로 나간 동이는 그만…… 이웃집 영수한테서 더위를 사고 맙니다. “동아!” 부르는 소리에 얼떨결에 “응?” 하고 대답을 하고 만 것이지요. 뒤이어 나타난 선이한테 더위를 되팔려고 해 보았지만, 눈치 빠른 선이가 순순히 당해 줄 리 없습니다. “선이야!” 불렀다가 되레 선이 더위까지 덤터기를 쓰게 되었지요. 온 동네를 다 돌아다녀 봐도 동이만큼 어수룩한 아이는 없고, 해는 금방이라고 떠오를 것 같고……. 동이는 그야말로 속이 타들어 갑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누나!”를 목 놓아 불러 보지만 눈앞에 별이 번쩍 하도록 매운 알밤이 돌아올 뿐입니다. 어느새 해도 동산 위로 고개를 쏙 내밀어 버렸고요.
이때부터 동이는 여름을 날 생각에 시름이 깊어 갑니다. 식구들이 부럼을 깨물며 건강을 비는 동안, 동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소원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올해는 봄 다음에 바로 가을이 오게 해 주세요.’ 오곡이 풍성하기를 비는 오곡밥에, 복을 듬뿍 안겨 준다는 복쌈에, 살도 붙고 키도 쑥쑥 큰다는 두부 지짐에, 더위를 견디게 해 준다는 보름나물까지 다 먹어 봐도 동이는 마음이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백가반이라도 먹고 더위를 물리치려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니 집에선 지신밟기가 한창입니다. 흥겨운 풍물 소리에 엉덩이도 들썩들썩 기분도 들썩들썩 좋아지려는 참이었지요. 구경 온 영수가 되통스럽게도 “야, 더위는 팔았냐?” 하고 묻지만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것만 해도 약이 올라 죽을 지경인데, 친구 앞에서 ‘더위 못 판 바보’라며 놀려 대는 건 웬 놀부 심보인지요.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주먹이 막 올라가려는데 누나가 달려와 다리나 밟으러 가자며 동이를 잡아끕니다. 더위를 못 팔았으니 다리라도 튼튼해야겠지요.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넘어 가고 달집태우기와 쥐불놀이만 하고 나면 대보름도 끝이 납니다. 동이는 과연 대보름이 가기 전에 더위를 팔 수 있을까요?
부럼처럼 고소한 글과 오곡밥처럼 풍성한 그림 이 책의 글을 쓴 작가 박수현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이 마을에선 지금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달집태우기를 합니다. 지금은 서울에 사는 작가도 정월 대보름이면 고향에 내려가 풍성한 보름달과 화려한 불 잔치를 보며 옛 기억을 더듬곤 하지요. 새벽부터 온 마을을 뛰어다니며 “내 더위 사려!”를 외치고, 집집마다 오곡밥을 얻으러 다니고, 밤늦도록 쥐불을 돌리는 아이들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걸 아쉬워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이 책에서 보려 주려 한 것은 그저 서랍 속에서 끄집어 낸 낡은 기억이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어제이자 되찾아야 할 내일이지요. 이웃은 이웃답게 서로 기대어 살아가고 그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 아이는 아이답게 마음껏 뛰놀며 자라는 공동체…… 그것을 그저 흘러간 시절의 삶으로만 기억하는 건 너무 아까운 일입니다. 보건복지부에서 장수 마을로 꼽은 ‘구곡순담(구례, 곡성, 순천, 담양)’ 어르신들의 장수 비결이 기후나 지형보다는 서로 돕는 공동체 문화에 있었다는 최근의 보고는 우리에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당장 그런 삶을 돌려줄 수는 없지만 그 따뜻했던 기억만이라도 나누고 싶은 것이 작가의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내 더위 사려!》는 이런 거창한 ‘해몽’이 없이도 참 재미있는 책입니다. 부럼처럼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글맛이 요즘 아이들의 입에도 잘 맞지요. 작가가 남동생 셋을 이끌고 대장 노릇을 하면서 몸으로 겪은 일들이 고스란히 글 속에 녹아 있는 까닭입니다. “더위를 못 팔았으니, 이라도 튼튼해야지.” 낙담한 남동생에게 부럼을 건네며 달래자는 건지 놀리자는 건지 한마디 던지는 누나를 보면 작가가 어렸을 때 꼭 저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더위팔기라는 줄기에 우리 세시 의례와 풍속의 1/4에 해당한다는 대보름 풍속이라는 가지를 살뜰하게 엮어 낸 재주 또한 높이 살 만합니다.
이 감칠맛 나는 글에 감칠맛을 더하는 것은 화가 권문희의 그림입니다. 등장인물의 생생한 표정과 몸짓, 그로부터 전해 오는 생생한 감정이 너나없이 그림 속으로 빠져 들게 하지요. 부스스한 머리에 반쯤 감은 눈을 한 채 엉거주춤 꿇어앉아 요강에 볼일을 보는 동이의 첫 등장부터가 쿡 웃음이 비어져 나옵니다. 온 식구가 나란히 마루 끝에 서서 처음 깨문 부럼을 마당에 던지는 장면은 또 어떻고요. 동이의 축 처진 어깨가 어찌나 귀여운지 와락 안아 주고 싶어집니다. 영수는 영수답게 볼에 심술이 더덕더덕 붙었고, 선이는 선이답게 척 봐도 참 야무지게 생겼습니다. 지신밟기 장면에 딱 한 번 나오는 ‘코찔찔이’조차 그 옛날 동네마다 꼭 하나씩 있던 얼뜬 동생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빛을 그림에 담은 것도 인상적입니다. 검푸른 새벽빛에 붉은빛이 섞여 들어 보랏빛이 되면서 동이 터 오는 모습, 파란 하늘가에 주황빛이 번지면서 해가 저무는 모습, 저물녘 푸르스름한 빛이 검푸른 빛으로 짙어지면서 밤이 깊어 가는 모습까지……. 마음을 담아 보지 않으면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 변화를 어쩌면 이리도 잘 담아냈나 싶습니다. 아이들이 보면 이 장면들을 제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것 같습니다.
화가는 이 책의 그림을 그리면서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담백함 대신 전에 없던 풍성함을 택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풍성한 대보름 풍속을 낱낱이 전하고픈 엄마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