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사람은 또 어떻게 생겨났을까?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에 답하는 우리 겨레의 창세 신화
세계 여러 민족들은 저마다 창세신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반고’라는 거신(巨神)이 한 덩어리로 엉겨 있던 하늘과 땅을 떼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인도에는 ‘푸루샤’라는 거인의 몸에서 사람과 세상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북유럽에도 ‘오딘’이라는 신이 ‘위미르’라는 거인을 물리치고 그 몸으로 세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이러한 창세신화는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나?’, ‘사람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이 세상에 선과 악이 존재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 속에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사람들이 오랜 세월 지켜 왔고 또 지켜 가야 할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원형이 온전히 남아 있는 창세신화가 드물뿐더러,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민속학자 손진태가 1920년대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채록한 〈창세가〉가 남아 있어 우리 창세신화의 원형을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세상이 처음 생겨난 이야기, 창세가》는 《조선신가유편》에 실린 이 채록본을 바탕으로 한 그림책입니다.
세상을 열고 사람을 빚은 큰사람채록본 〈창세가〉는 ‘미륵님’이 서로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하늘과 땅 사이에 구리 기둥을 세워 떼어 놓으면서 세상이 열렸다고 전합니다. 이 채록본을 처음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고개를 갸웃거릴 것입니다. ‘우리 창조신의 이름이 왜 미륵이지?’ 하고 말입니다. 이는 우리 붙박이 신앙이 불교, 그중에서도 미륵 신앙을 받아들인 흔적입니다. 우리 창조신의 품성이 언젠가 이 세상을 전쟁도 가난도 욕심도 없는 낙원으로 바꾸어 놓으러 온다는 미륵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던 게지요. 하지만 이 그림책에서는 미륵이라는 이름이 불러올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큰사람’ 또는 ‘먼저 온 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중국의 반고가 머리로 하늘을 떠받치고 발로는 땅을 누르며 버티다 지쳐 죽음을 맞이한 것과 달리, 우리의 큰사람은 땅의 네 귀퉁이에 구리 기둥을 세워 하늘을 떡 받쳐 놓고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가꾸기 시작합니다. 〈창세가〉의 다른 채록본을 보면 그때는 해가 둘에 달이 둘이라 낮이면 땅이 석자 세치씩 타들어 가고 밤이면 땅이 석자 세치씩 얼어붙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사람이 해 하나를 뚝 떼어 큰 별과 작은 별을 만들고 달 하나를 뚝 떼어 북두칠성과 남두칠성을 만든 덕분에 더위는 사그라지고 추위는 잦아들게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이라면 기후를 조절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마땅하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가뭄이나 홍수로 흉년이 거듭되면 임금을 바꾸었던 부여의 풍습도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큰사람은 세상이 제자리를 찾자 칡넝쿨을 캐서 옷을 지어 입은 뒤, 풀무치와 개구리, 생쥐를 차례로 잡아들여 물과 불의 근원을 캐묻습니다. 하늘과 땅을 떼어 놓은 거대한 신이 그야말로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작은 동물들을 닦달하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납니다. 이는 우리 겨레의 해학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자 자못 의미심장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는 세상을 만든 신의 힘뿐만 아니라 세상에 속한 존재의 힘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소리로 들리는 까닭입니다.
큰사람은 다산과 풍요와 지혜를 상징하는 쥐에게서 물과 불의 근원을 알아낸 뒤, 한 손에 금쟁반을 들고 다른 손에 은쟁반을 들고 세상을 함께 누릴 사람들을 내려달라고 하늘에 빕니다. 그러자 금쟁반에 금벌레 다섯 마리가 떨어져 남자가 되고, 은쟁반에 은벌레 다섯 마리가 떨어져 여자가 되지요.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져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진화론과도 닿아 있어 사뭇 흥미롭습니다.
세상에는 왜 악이 생겨났을까? 채록본 〈창세가〉는 큰사람, 곧 먼저 온 이가 다스리던 세상은 ‘사람들이 곡식을 섬으로 먹고 말로 먹는 태평성대’였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이 태평성대는 또 다른 큰사람, 곧 ‘나중 온 이’가 나타나면서 막을 내리고 맙니다.
나중 온 이가 세상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부리자 먼저 온 이는 견디다 못해 내기를 제안합니다. 첫 번째 내기는 병을 매단 줄을 바다에 드리워서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 내기는 여름에 강물을 얼리는 것이며, 세 번째 내기는 무릎에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세 가지가 다 자연을 움직이고 생명을 싹 틔우는 창조신의 능력과 관련된 내기지요.
첫 번째, 두 번째 내기에서 잇따라 진 나중 온 이는 세 번째 내기에서 속임수를 씁니다. 먼저 온 이의 무릎에 핀 꽃을 꺾어 자기 무릎에 꽂은 것이지요. 먼저 온 이는 이 추잡한 싸움이 싫어진 나머지 세상을 나중 온 이에게 넘겨주고 떠나 버립니다. 신화는 세상에 악이 끊이지 않는 것은 모두 나중 온 이가 이렇듯 거짓으로 세상을 빼앗은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먼저 온 이가 다스리던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그리움과 스스로 그런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불씨처럼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슬쩍 흘리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신화는 상상력의 보물 창고신화는 그것을 간직해 온 겨레의 오랜 믿음과 상상과 생각으로 가득한 보물창고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신화는 그리스.로마 신화보다 오히려 더 낯설고 멀기만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알기 쉬운 글로 풀어 널리 읽히지 못한 탓이고, 서양 신화처럼 다양한 예술 장르 속에서 확대 재생산 되지 못한 탓이지요. 그림책 《세상이 처음 생겨난 이야기, 창세가》를 만드는 일은 그런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작가 고승현은 이 심오한 창세신화를 구수하고 편안한 입말로 풀어내는 데 무엇보다도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이 책이 우리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상상으로 가득한 이야기로 먼저 읽히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한편 화가 김병하는 누구도 그려 본 적이 없는 우리 창조신의 모습을 친근하면서도 신비롭게 형상화해 냈습니다. 우리 겨레처럼 순박한 얼굴을 한 신, 우리 산천처럼 푸근한 얼굴을 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더불어 우리 겨레가 꿈꾸었던 세상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까지도 그림에 담았습니다.〈창세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서사라고 그림을 통해 조용히 주장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