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러일전쟁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의 대사건이었다. 일본에서는 제국주의 국민이 탄생했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간 러일전쟁에 관해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비교하고 연구한 책은 없었다.
'일본의 양심'이라 불리는 와다 하루키(和田 春樹, 1938- )의 <러일전쟁 : 기원과 개전> 1, 2는 러일전쟁에 관한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조사한 최초의 책으로 러일전쟁이 어떻게 기원하고 개전했는지 밝힌다.
와다는 러일전쟁의 성격을 '조선을 지배하고 정복하려 한' 일본이 러시아와 맞닥뜨려 전쟁으로 '몰아간' 뒤 "조선을 일본의 것으로 한다는 점을 러시아가 인정하게 한 전쟁이었다"(36쪽)라고 정의하고, 전쟁의 가장 큰 결과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말살하고, 조선 전역을 식민지 지배한 것이다"라고 밝힌다.
전쟁의 이름은 '러일전쟁'이고 전쟁의 내용, 즉 전장은 조선에서 시작해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뻗어간 '동아시아전쟁'이지만 전쟁의 본질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조선전쟁'이라는 것이다.
출판사 리뷰
전쟁사학의 결정판
러일전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의 대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은 전쟁 직후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받았고 그때부터 국권 침탈까지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에서는 제국주의 국민이 탄생했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간 러일전쟁에 관해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비교하고 연구한 책은 없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행동하는 일본의 양심’이라 불리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2는 러일전쟁에 관해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조사한 최초의 책으로 전쟁사학의 결정판이다.
와다는 러일전쟁의 성격을 ‘조선을 지배하고 정복하려 한’ 일본이 러시아와 맞닥뜨려 전쟁으로 ‘몰아간’ 뒤 “조선을 일본의 것으로 한다는 점을 러시아로 하여금 인정하게 한 전쟁이었다”(36쪽)라고 정의한다. 그는 전쟁의 가장 큰 결과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말살하고, 조선 전역을 식민지 지배한 것이다”라고 밝힌다. 전쟁의 명칭은 ‘러일전쟁’이지만 전쟁의 본질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조선전쟁’이라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에게 보내는 준엄한
경고장이자 단죄의 논고(論告)
이 책을 읽은 한국과 북한의 여러분이 일본제국주의의 교묘한 행보에 관해서, 일본의 침략 때문에 망국의 위기에 떨어졌던 자국의 행보에 관해서 보다 깊이 생각해준다면 기쁘겠다._37쪽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2는 각주를 2,402개나 넣을 만큼 사료를 철저하게 고증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재구성한 서사극(敍事劇)이다. ‘사건’ 중심의 서술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역사의 지류가 ‘어떻게’ 러일전쟁으로 흘러가게 되었는지 밝힌다. 러시아, 일본, 조선, 중국,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그리고 태국 등 9개국에서 700여 명에 이르는 인물이 등장해 사실 관계를 고증한다. 와다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을 샅샅이 훑는다. 이를 통해 10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따로 떼어 해석할 수 없으며 이 전쟁은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단일 범죄임을 밝혀낸다.
청일전쟁은 ‘제1차 조선전쟁’, 러일전쟁은 ‘제2차 조선전쟁’이었다는 독특한 시각을 제시하는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1, 2는 이 두 차례의 조선전쟁이 한반도 비극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명쾌하게 규명하면서, 비극의 서막을 연 역사 법정의 피고(被告)는 반성해야 한다고 준엄하게 질타한다.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2는 일본이 전쟁을 기획, 모의하고 마침내 실행하는 현장을 마치 동영상을 틀어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다. 이제까지 밝혀진 것과 달리 러시아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제시했고 일본이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범죄였다는 증거를 장장 1,300여 쪽에 걸쳐 입증한다.
전쟁으로 몰아가던 군국주의 시대에도 침묵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려는 양심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이성적 판단이 결핍된 야만의 시대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역사의 법정에 울려 퍼지는 예리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가득 찬 이 대작은 전범(戰犯)을 겨눈 논고의 전범(典範)이다.
일본의 간섭, 지배, 침략에 일관되게 저항한 고종
고종이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서 벗어나 직접 정사를 다스리겠다고 선언한 것은 1873년이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현재까지 고종은 ‘암약’(暗弱)한 인물이고 민비에게 완전히 좌지우지되었다는 게 통념이지만 최근에는 이런 통념을 비판하며 고종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다.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1, 2에서도 고종이 “일본의 간섭, 지배, 침략에 일관되게 저항”(1199쪽) 했으며 이는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사실이라고 평가한다. “분명 고종은 대원군의 정치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고, 개명(開明)성도 갖추었으며, 백성의 생활에 대한 배려심도 있었다”(127쪽)라는 것이다.
러시아에 접근하는 고종과 일본의 반응
고종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조선의 운명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러시아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종주국이었던 청국도 거부하고, 새롭게 밀고 들어오는 일본도 거부했으며, 북쪽의 러시아 제국의 보호 하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통치를 확립하는 길을 모색”(1190쪽)하기에 이른 것이다. “고종이 러시아에 처음으로 밀사를 보낸 것은 갑신정변 이전인 1884년 5월이었다.”(128쪽)
이 사실이 전해지자 일본의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격노했다. 그는 1885년 6월 5일 청국 공사 수청쭈(徐承祖)에게 “청국과 일본이 협력해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 외교의 졸렬함으로 인해 귀국과 아국 양국에 화를 초래할 것이 경각에 달려 있다.”(1190쪽) “따라서 조선 왕의 임정(臨政)을 약간 구속하고, 외교상의 망동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1190쪽)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1910년 병합 때까지 일본에 대항하는 고종의 긴 투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러시아는 조선이 어느 국가의 보호국도 되지 않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청일전쟁과 삼국간섭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 청국을 몰아냈을 뿐 아니라 막대한 배상금까지 요구했다. 또한 타이완, 랴오둥반도, 남만주의 할양까지 요구했는데 이는 “제국주의의 기준으로 봤을 때도 지나친 욕심”(1192쪽)이었다.
일본이 만주에 진출하려 하자 러시아가 즉각 반응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압박했고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조선이 러시아에 거는 기대는 높아졌다.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의 힘에 의지해 일본의 간섭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1193쪽)
다급해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획득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우라 고로(三浦梧?)공사가 민비를 시해하는 폭거를 저지른다. 비(妃)를 서민으로 격하한다는 조칙을 내도록 강요받은 고종은 분노해서 아관파천을 감행하는 반격에 나섰다.
일본은 조선에서 힘을 강화한 러시아와 어떻게든 협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해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하자는 안과 만주와 조선을 교환하자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이 생겼다.
러시아의 만주 진출
일본은 그동안 소극적인 자세로 ‘만한교환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자 ‘만한교환론’을 강하게 밀어붙인다. 그러자 고종은 대한제국의 중립국 노선을 처음으로 내세우며 일본 정부에게 교섭하자고 제의한다. 이를 “주일 러시아 공사 이즈볼스키(Izwolskii)가 강하게 지지했고, 그의 설득으로 러시아 외무성도 대한제국 중립국 노선을 지지하게 된다.”(1196쪽) 하지만 일본은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1196쪽) 사실 러시아가 만주에 진출했을 때부터 일본은 ‘만한교환론’으로는 만족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것으로 하고, 더불어 남만주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1197쪽)했다. 이는 완전히 전쟁을 하겠다는 자세였다.
러일교섭
당시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는 즉각 러일교섭을 시도했지만 ‘만주문제’와 ‘조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섭이 아니었다. 고무라는 “교섭의 장에서 조선은 일본의 것이고 일본이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인정하라고 러시아에게 요구한다. 러시아가 이를 거부하면 전쟁을 시작한다. 전쟁은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되지 않은 지금이 찬스다”(1198쪽)라고 말했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보면 러시아가 일본의 요구를 거부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일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고종은 러일교섭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개전이 가까워진 것이라 생각하고, 1903년 8월 전시 중립을 인정받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1199쪽) 고종은 “8월 15일자로 러시아황제에게 보내는 밀서를 작성했다.”(880쪽)
“만약 전쟁의 막이 열리면 우리나라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다…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귀국 군대의 세력을 도와서, 적[일본군]이 올 때에는 재물과 곡식을 옮겨 감추게 하고, 몸은 산의 계곡 사이에 숨도록 하게 할 것이다….”_881쪽
이는 러시아에게 전시 협력을 제의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고종의 개인적인 소원을 표명한 데 지나지 않았다. 고종은 이 밀서를 쓰고 난 후에 외부대신 이도재(李道宰)에게, 러시아와 일본 양국에 대해서 중립국으로서의 승인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양국의 주재 공사에게 보내는 훈령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고종은 이렇게 전시 중립의 승인을 러시아와 일본 양쪽에 촉구함과 동시에 러시아에게는 제한 없는 연대협력의 의사를 은밀하게 표명했던 것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조인했다. “양국의 평화를 강조한 제1조에 이어 제2조에는 일본의 가장 중요한 전쟁 목적이 적시되었다.”(1210쪽)
“제2조 러시아제국 정부는 일본국이 한국에서 정사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우월한 이익을 지니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위함에 있어 이를 방해하거나 또는 이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_1211쪽
일본은 이 결과에 기초해서 움직였다.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로 들어가 고종과 한국 정부 각료들을 위협해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만이 무조건 ‘불가’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은 찬성했다.
최후의 저항
이렇게 대한제국은 완전히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통감이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이 협약의 무효를 여러 나라에 은밀하게 호소하는 밀사를 계속해서 파견했다. 그 최후의 노력이 1907년 제2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세 명을 파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의 주최자에 의해서 이 특사들의 회의 참가는 거절되었다. 이토 통감은 이 행동의 책임을 추궁해 고종을 퇴위시켰다.
1907년 7월 19일 고종은 퇴위했고, 황태자가 순종(純宗)으로 즉위했다. 7월 24일에는 제3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통감이 한국 정부 내정의 모든 것을 지도하게 되었다. 보호국화의 완성이었다. 그 시점부터 한국병합까지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고종은 1880년대 중반부터 1919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나라에 대한 일본의 간섭, 지배, 침략에 일관되게 저항했다. 그 저항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겠지만, 그 일관된 저항의 사실은 역사의 중요한 요소이며, 그것을 모르면 이 시대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_1199쪽
러일전쟁은 조선전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전시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영내에 침입해 진해만, 부산, 마산, 인천, 서울, 평양을 점령하고, 대한제국 황제에게 사실상의 보호국화를 강요하는 의정서에 조인하게 했다. 인천과 뤼순에서 러시아 함선에 대한 공격이 동시에 시작되었는데, 이 공격은 무엇보다도 대한제국 황제에게 러시아의 보호는 없을 것이라는 의미의 결정타를 날려 황제를 체념시키는 역할을 했다. 조선 장악이 끝나자 전쟁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에서 본격적인 러일전쟁으로 진화해 간다. 일본은 선전포고에서 “한국의 보호”를 위해서 러시아와 싸운다고 선언했지만, 사실은 일본이 조선을 자국의 지배하에 두고 보호국으로 삼고 나서, 러시아에게 그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추진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항의의 선전포고를 발한 모양새였으므로 완전히 수동적인 자세였다. 러시아가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러일전쟁의 뿌리에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망이 있었다. 메이지유신을 성취한 일본인들은 문명개화, 부국강병에 앞서 영토의 확장을 꿈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조선을 일본이 획득해야 할 목표로 인식하게 되었다. 동시에 러시아와의 대항을 의식하면서, 러시아의 침략이 닥쳐왔기 때문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조선에 개입해 조선을 지키고 일본 자신도 지켜야 하는 안전보장 상의 필요를 처음부터 강조했다.
러시아의 조선 침략이란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것을 반복해서 논의함으로써, 이웃나라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지닌 일본에 정당화의 대의명분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러시아는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개전 전의 러일교섭 시의주장을 되풀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통하지 않았다. 8월 9일부터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의의 서두에 고무라는 12개 항목의 강화조건을 선언했다. 그 제1항은 “러시아국은 일본국이 한국의 정사(政事)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우월한 이익을 지니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국이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취함에 있어서 이를 방해하거나 또는 이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이었다. 12일 비테는 각 항목에 관한 회답서를 제출했다. 그 제1항의 한국 처분의 자유에 관해서 “하등 이의가 없다”면서 일본이 한국에서 “우월한 이익”을 지니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이 취하는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방해하거나 또는 이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할 각오다”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훈령에 따라서 “전술한 일본국의 조치 및 실행을 위해서 한국 황제의 주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라 주장했고, 또한 “한국에 인접하는 러시아국 영토의 안전을 침박할 만한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유보를 달았다.
이에 대해서 오후에 격렬한 설전이 전개되었다. 고무라는, 러시아가 “일본이 한국에서 충분히 자유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긴요하다”면서 “한국 황제의 주권 운운하는 자구(字句)는 삭제하는 데 동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테가 말하는 것처럼 “한국의 주권을 전적으로 그대로 계속 보유하게 한다는 주지에는 단연코 동의할 수가 없다…… 도대체 한국의 주권이란 것은 이미 그리고 오늘날에도 완전한 것이 아니다. 일본은 이미 동 국가와 협약을 체결해 동 국가 주권의 일부는 일본에게 위임되었고, 한국은 외교상 일본의 승낙이 없이는 타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는 지위에 있다”며 극히 노골적이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와다 하루키
1938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한 후 1998년까지 도쿄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및 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도쿄대학교 명예교수, 도호쿠대학교(東北大学) 동북아시아연구센터 방문교수다. 러시아사·소련사, 조선사·현대북한사 등 동북아국제관계사가 주요 연구분야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민주화운동일본연대회의(韓國民主化運動日本連帶會議)와 연대위원회(連帶委員會)에서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아시아여성기금의발기인, 운영심의회위원, 이사, 전무이사,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2016년부터는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日朝?交促進國民協會)의 이사 및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니콜라이 러셀: 국경을 초월한 나로드니키』(1973),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1992), 『역사로서의 사회주의』(1994), 『한국전쟁』(1999), 『북조선』(2002),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2004), 『한일 100년사』(2015),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2013), 『북한 현대사』(2014), 『‘평화국가의 탄생: 전후 일본의 원점과 변용』(2015), 『스탈린 비판 1953-1956년』(2016),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2016),『러시아혁명, 페트로그라드 1917년 2월』(2018), 『아베 수상은 납치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2018) 등이 있다.
목차
제6장 새로운 노선의 등장
701 새해의 첫 나날들
704 제2차 해군대학 도상(圖上) 훈련
711 신임 해군상과 신임 군령부장
715 만주철군의 기한이 임박하다
719 극동의 베조브라조프
721 베조브라조프와 보가크
724 극동정책의 신 구상
726 경비대 파견 문제
729 페테르부르크의 보가크 호출과 중앙의 반응
732 4월 8일(3월 26일) 협의회
737 무린암(無隣庵) 회의
742 러청교섭 결렬
744 러시아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다
748 일본 참모본부의 개전론
752 쿠로파트킨의 출발과 보가크 의견서
756 베조브라조프의 상주보고와 황제의 지시
761 5월 20일(7일) 협의회
767 5월 협의회 이후
772 베조브라조프, 극동으로 출발하다
774 일본의 의주(義州) 개방 요구
777 쿠로파트킨 육군상의 일본 방문
780 조선의 반응
782 참모본부와 일곱 박사
789 일본의 쿠로파트킨
794 일본, 대러 방침을 결정하다
800 니콜라이와 아바자의 새로운 방침
802 쿠로파트킨, 일본을 떠나다
805 뤼순(旅順) 회의
819 일본의 반응
822 일본에서 고조되는 개전론
826 차르의 사로프 수도원 방문
828 베조브라조프와 쿠로파트킨의 논쟁
838 극동태수제 도입
제7장 러일교섭
855 교섭 개시
858 일본의 제1차 제안
860 러시아의 사정
864 세 장관의 경질 위기
868 쿠로파트킨, 황제를 수행하다
869 러청교섭의 중단
871 러시아의 회답 준비
878 베조브라조프의 움직임
880 한국 정부, 중립을 추구하다
885 주일 무관의 경고
889 러시아의 제1차 회답
892 가을의 위기
898 러일 해군력 비교
900 러시아 정부의 대응
905 일본의 제2차 서한
912 『도쿄아사히신문』, 교섭 결렬을 촉구하다
914 알렉세예프의 펑톈(奉天) 점령
915 일본과 러시아 군인들의 의견
919 극동특별위원회 설치와 임업회사 문제
926 얻어맞는 수병들, 사살되는 동물들
929 러시아 측의 제2차 서한
935 개전을 촉구하는 일본 여론
940 공상소설 『러일전쟁 하네카와 로쿠로』
945 일본의 제3차 서한
951 일본군의 조선출병에 관한 정보
955 러시아의 12월 특별협의회
964 일본, 대러 작전계획을 결정하다
968 한국에 대한 방침
971 일본과 러시아의 상호 인식
976 주재 무관의 경고 전보
977 러시아의 제3차 서한
제8장 전야
999 뤼순의 긴장
1003 황제와 육군상은 망설이다
1006 가는 해, 오는 해
1007 이탈리아 군함의 매입
1008 구리노 공사와 베조브라조프
1016 베조브라조프의 러일동맹안
1027 일본 정부, 개전을 포함한 최종회답을 결정하다
1031 주재 무관들의 보고와 증원함대
1034 대한제국의 중립선언
1038 러시아 정부 내의 검토
1044 중재 조정의 요청
1046 일본 한국을 죄다
1050 마지막 장관협의
1055 일본의 개전 준비
1057 협의회가 끝난 뒤, 람스도르프
1065 일본, 각의에서 국교 단절을 결정하다
1071 러시아 외상 최후의 몸짓
1076 낭패한 알렉세예프
1079 일본의 단교 통보
1080 일본군 전투행동을 개시하다
1081 “러시아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제9장 개전
1095 1904(메이지37)년 2월 6일(1월 24일) 토요일
1103 2월 7일(1월 25일) 일요일
1112 2월 8일(1월 26일) 월요일
1128 2월 9일(1월 27일) 화요일
1136 2월 10일(1월 28일) 수요일
1143 2월 11일(1월 29일) 목요일
1146 2월 12일(1월 30일) 금요일
1148 2월 13일(1월 31일) 토요일
1150 2월 14일(1일) 일요일
1153 2월 15일(2일) 월요일
1154 2월 16일(3일) 화요일
1155 2월 17일(4일) 수요일
1156 2월 18일(5일) 목요일
1156 2월 19일(6일) 금요일
1157 2월 20일(7일) 토요일
1159 2월 21일(8일) 일요일
1159 2월 22일(9일) 월요일
1162 2월 23일(10일) 화요일
1164 2월 24일(11일) 수요일
1167 2월 25일(12일) 목요일
1168 2월 26일(13일) 금요일
1169 2월 27일(14일) 토요일
1169 2월 28일(15일) 일요일
1172 2월 29일(16일) 월요일
1175 3월 1일(2월 17일) 화요일
1176 3월 2일(2월 18일) 수요일
제10장 러일전쟁은 이렇게 일어났다
1188 일본이 노린 것
1190 조선과 러시아
1192 청일전쟁의 개시와 그 파문
1195 러시아의 만주 진출
1197 가쓰라-고무라 내각의 성립
1198 러일교섭
1200 러시아의 새로운 노선
1202 최후의 순간
1203 국민의 정신은 전쟁에 동원되었다
1206 전쟁의 확대
1207 전쟁이 끝난 뒤
1215 맺는말
1217 옮긴이의 말
1225 참고문헌
1253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