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구경꾼이 될 것인가, 주체가 될 것인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던 자유인들의 반란!
마르크스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기 드보르의 테제!
억압체제를 괴멸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엇인가?
우리를 주체가 아닌, 구경꾼으로 만드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극복하는 방법은?
세계를 관조하는 ‘구경꾼’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
《구경꾼 VS 주체》란 제목이 붙은 ‘강신주의 역사철학·정치철학 강의’ 세 번째 권은 프랑스 상황주의자이자 아방가르드 예술가, 영화감독이었던 기 드보르의 테제를 바탕으로 1960년대 학생운동과 냉전체제를 살피고 있다. 전작 《철학 VS 실천》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착취를 강요해온 억압체제의 본질을 벗겨내면서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 삶과 사랑의 주인으로서 억압체제와 싸운 사람들을 되살려낸다. 책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즉 평의회코뮌주의의 중요성이다. 저자는 생산하는 사람인 노동자에게 물적 생산수단뿐만 아니라 정치수단도 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왕족이나 귀족, 혹은 지주나 자본가 등이 생산을 기획하고 통제했다면, 이제는 다수 노동계급이 스스로 생산을 조율해야 한다는 것. 대표 선출뿐만 아니라 소환마저 결정할 수 있는 평의회를 통해 노동계급이 자신의 지성과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도 결정해야 한다는 것. 저자는 바로 이것이 평의회코뮌주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사회의 이념이면서, 파리코뮌에서 실현된 코뮌사회이기도 하다. 소수의 지배계급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 모두가 주인이 되는 사회다. 그러면서 저자는 노동계급이 파편화된 개인으로 세계를 관조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동안 여러 저작을 통해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주장해왔던 저자의 철학이 이 책에 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쇼스타코비치, 마리오 사비오, 존 바에즈, 김민기…
인간사회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
“1968년 세계는 부르주아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그리고 평의회코뮌주의로 삼분되어 있었다. 평의회코뮌주의의 깃발이 다시 펄럭일 조짐이 보이자, 부르주아자본주의와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간신히 소생하고 있던 그 공동의 적을 그야말로 유린한다. 평의회코뮌주의를 방치했다가는 노동계급이 생산수단과 정치수단의 독점이 억압체제의 명줄이라는 걸 알아버릴 수도 있다는 미국과 소련의 공통된 조바심과 우려 때문이었다. 68혁명을 괴멸시킨 뒤, 두 억압체제는 1968년 파리와 프라하에서 싹텄던 평의회코뮌주의를 지우는 이데올로기 작업을 본격화한다. 평의회코뮌주의를 축소하고, 왜곡하고, 비하하고, 때로는 은폐하려고 했던 억압체제의 작업은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
68혁명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학생운동은 평의회코뮌주의를 되살려내려는 투쟁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1960년대에 서구권은 부르주아자본주의체제가, 동구권은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가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젊은 지성들은 이 두 체제가 모두 자본주의체제에 지나지 않다는 걸 통찰하고 있었고, 이를 해체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당시의 학생운동을 냉전체제로까지 이어진 5000여 년의 억압체제를 극복하려 했던 혁명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기 드보르와 그의 주저 《스펙타클의 사회》, 그리고 그가 이끌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그동안 망각되었던 기 드보르를 재조명하고, 《스펙타클의 사회》가 부르주아자본주의체제뿐만 아니라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를 공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추켜세우며 자세히 분석한다.
책은 역사철학을 다루는 네 개의 장, 그리고 정치철학을 다루는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역사철학 네 개의 장이다. 쇼스타코비치를 다루는 장에서는 1917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했던 2월혁명과 10월혁명을 집중 해부한다. 그러면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평의회코뮌주의자의 가면을 필요에 따라 썼던 정당 중심 코뮌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밝힌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하지 않고, 소수의 엘리트 중심 혁명을 지향했다. 그래서 저자는 10월혁명이 ‘쿠데타’에 불과하다고 언급한다. 실제로 레닌과 트로츠키 등 볼셰비키가 지향했던 정당코뮌주의가 스탈린을 통해 국가코뮌주의, 혹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변질되면서 러시아 노동계급은 노동계급의 정부가 노동계급을 배신할 수도 있다는 전대미문의 비참한 경험을 하게 된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바로 배신당하고 능욕당한 페트로그라드와 그 안의 노동계급에게 바치는 엘레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리오 사비오와 존 바에즈를 다루는 장에서는 1964년 미국의 학생운동과 저항운동의 다양한 단면들을 알려준다.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부르주아자본주의체제와 이 체제에 포획된 대학 교육에 저항했고, 또 다른 일부는 부르주아자본주의를 벗어난 자유로운 삶, 히피로서의 삶을 도모했다. 이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흑인 인권운동, 학생운동, 반전운동 등에 늘 음악으로 함께한 존 바에즈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역사철학 나머지 두 개 장은 한국사회를 다룬다. 분단과 독재의 계보학을 다루는 장에서는 분단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동시에 냉전체제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고 했던 김일성과 이승만의 야욕에 기인한다는 사실, 그리고 김일성과 이승만은 남북의 적대를 이용해 독재를 공고히 했다는 사실이 해명된다. 특히나 이 대목에서 점령군이었던 미군정청에 맞섰던 1947년 10월항쟁, 즉 10월 대구항쟁이 가진 역사적 의의가 크게 조명된다. 향후 남한에서의 모든 저항운동은 당시 ‘조선의 블라디보스토크’라고 불렸던 대구에서 일어난 10월항쟁의 변주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정주와 김민기를 다룬 장은 서정주의 시세계와 김민기의 음악세계를 따라 1961년 박정희의 5월 쿠데타 이후 오랜 군부독재를 종식시켰던 1987년 6월항쟁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친일, 친이승만, 친박정희, 친전두환, 친노태우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서정주! 소수 지배계급의 독재와 위선을 폭로하고 동학이 지향했던 ‘님들의 공동체’를 동경했으며, 공장의 노동자로 그리고 들판의 농부로 삶을 영위했고 마침내는 인문적 자연주의자로 성장한 김민기! ‘딴따라가 되어버린 시인’ 서정주의 시들에는 우리의 서글프고 남루한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면, ‘시인이 되어버린 가수’ 김민기의 노랫말 속에는 갑오농민전쟁부터 이어져오는 미래의 희망이 길어 올려져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스펙타클의 사회》, 자본주의체제를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서
기 드보르의 1967년 저작 《스펙타클의 사회》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현대적 생산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타클의 거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첫 문장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유함은 상품의 거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를 패러디한 것이다. 마르크스에게는 ‘상품’이었던 것이 기 드보르에게는 ‘스펙타클’로 변한 것이다. ‘상품의 논리’로 충분히 해명되어 극복될 수 있었던 19세기 자본주의사회와 달리, 20세기 자본주의사회를 돌파하려면 ‘스펙타클’ 개념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기 드보르의 생각이었다.
《자본론》이 출간된 지 100년째 되던 해에 출간된 《스펙타클의 사회》는 총 221개의 방대한 테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이 나온 1967년, 세상은 전혀 바뀌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체제라는 늪에 더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물질적 풍요라는 장밋빛 전망을 노동계급에게 심어주는 데 성공한 자본주의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으로 탄생한 역사상 최초의 노동계급 정부, 즉 피억압자의 정부도 이런 흐름을 막지 못했다. 아니 막기는커녕 노동계급 정부는 러시아혁명을 왜곡하고 배신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기 드보르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스펙타클의 사회》에 온전히 담아놓았다.
‘스펙타클’은 우리를 삶의 주체가 아닌, 체제의 구경꾼으로 만드는 수많은 현란함을 상징한다. 신이라는 스펙타클, 스타라는 스펙타클, 발전과 성장이라는 스펙타클, 지도자라는 스펙타클, 돈이라는 스펙타클 등등. 억압체제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쇼’나 ‘볼거리’를 의미하는 이런 스펙타클에 휩싸여 있다는 게 기 드보르의 진단이다. 억압체제는 하늘과 땅, 왕과 백성, 대통령과 국민, 신과 인간, 도시와 시골, 부자와 빈자,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아들, 선생과 학생, 지주와 소작농, 자본가와 노동자 등등으로 세계를 분절하고, 전자가 세계를 대표하고 후자보다 우월하다고 강요한다. 억압체제가 허구적으로 날조한 바로 이 세계가 스펙타클의 세계다. 그래서 기 드보르는 말한다. “스펙타클을 통해 세계의 한 부분은 세계를 대표하고, 세계보다 우월하게 된다”고. 이런 스펙타클의 세계를 당연한 질서, 즉 불변하는 질서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세계에 대한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다수는 탁월한 소수를 숭배하고 스스로를 멸시하게 된다. 화려한 스펙타클에 사로잡혀 자신이 소비자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고, 좋은 지도자라는 스펙타클에 사로잡혀 자신이 유권자이기 이전에 피지배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자본주의체제는 이런 스펙타클을 통해 구경꾼들로부터 열렬한 거짓 반응을 이끌어내고 그들을 체제에 복무하게 만든다.
《스펙타클의 사회》는 정치와 역사를 구경꾼으로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개입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래서 저자는 《스펙타클의 사회》가 냉전의 정점이었던 1960년대에만 유효했던 것이 아니라,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가 거의 소멸한 21세기 현재, 그러니까 신자유주의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재에도 경이로운 통찰력과 소름끼치는 예언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정치철학을 다루는 네 개의 장은 이런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 담긴 테제들을 분석하고 해설한다. 첫 번째 장에서는 스펙타클이란 개념의 윤곽을, 즉 스펙타클이란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명확히 드러낸다. 두 번째 장에서는 스펙타클이 BC 3000년 이래 모든 억압체제가 지배와 착취를 관철했던 기법과 관련된다는 것을 해명한다. 세 번째 장에서는 제도권 사회주의, 즉 정당코뮌주의가 노동계급의 대표를 자임하면서도 어떻게 노동계급을 억압하고 탄압했는지 그 실상을 폭로한다. 마지막 네 번째 장에서는 기 드보르의 평의회코뮌주의, 혹은 그의 정치철학적 통찰이 68혁명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사회’를 꿈꾸는 미래의 모든 혁명에 근본적인 시사점을 준다는 걸 보여준다.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 체 게바라의 모든 것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라도 나는 진정한 혁명은 강렬한 사랑에 의해 인도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한 진정한 혁명가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체 게바라, <쿠바의 사회주의와 인간>)
“항상 자신이 더불어 살고 있는 인간 대중에게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즉 모든 청년 코무니스타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이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인간적이어야 인류의 최선의 자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체 게바라, 〈청년 코무니스타가 되기 위해〉)
‘BRIDGE’에서는 웬만한 단행본보다 더 두꺼운 분량으로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삶과 사유를 다룬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 패권주의를 최초로 좌절시킨 쿠바혁명의 지도자이자, 미국을 핵전쟁의 위험에 던져 넣었던 인물. 한마디로 체 게바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상대했던 최고의 적이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그가 사라지기를 원했다. 체 게바라는 소련이 코뮌주의를 실천한 국가로 보지 않았고, 소련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인간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신을 헌신했던 체 게바라의 거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다. 특히 실천적인 면모로서의 체 게바라의 모습과 더불어 늘 공부하며 실천했던 체 게바라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코만단테 코무니스타! 체 게바라는 코뮌주의의 실천가이자 이론가였던 사람이다. 실천과 이론이 일치되었던 탁월한 혁명가였다.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불렸던 체 게바라의 진면목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체 게바라의 가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표 선출뿐만 아니라 소환마저 결정할 수 있는 평의회를 통해 노동계급은 자신의 지성과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도 결정한다! 바로 이것이 평의회코뮌주의Communisme de conseils다. 1968년 프라하에서도 그리고 파리에서도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젊은 지성들은 이미 대학이란 울타리, 혹은 엘리트주의를 넘어 ‘인간사회’, ‘사회주의’, ‘평의회코뮌주의’를 지향했던 것이다.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 약 8개월 동안 레닌은 그야말로 마르크스의 적장자였고, 파리코뮌의 아들이었으며, 아울러 평의회코뮌주의자였습니다. 레닌은 용의주도한 사람입니다. 1916년 스위스에서 그는 평의회코뮌주의라는 가면을 과거보다 더 정교하게 수선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다듬어져 1917년 10월 쿠데타 이후에 출판된 《국가와 혁명Государство и революцияn》이었죠. 마르크스의 《프랑스내전The Civil War in France》의 주석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국가와 혁명을 철저하게 대립시킵니다. 다시 말해 국가가 폐기되지 않으면 노동계급의 혁명은 완성될 수 없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