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흥부전》에서 볼 수 있는 의외의 대목 중 하나는 놀부에게 쫓겨나기 전 흥부의 모습이다. 놀부의 말을 빌리면 그는 글만 읽으며 자랐다. 동네에서 외상술을 마시고 노름을 즐기면서 자식만 줄줄이 낳았다. 그에 비해 놀부는 매일 일하며 집안 살림을 일으키고 재산을 장만해 냈다. 21세기 청소년에게 놀부의 부와 흥부의 가난은 그들의 인성과 별개의 문제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흥부는 곧 현실과 마주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사회적 기준이 신분과 윤리에서 돈으로 이동하는 조선 후기의 상황을 인식한다. 사계절을 잠시도 놀지 않고 온갖 품을 팔며 매를 대신 맞아 주는 일까지 맡는다. 다만 이렇게 애써도 끼니가 간데없는 형편에 처한다. 흥부가 가난한 건 결코 게을러서가 아니다. 그래서 《흥부전》은 흥부의 빈곤을 작품 전반부 내내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죽도록 일해도 죽느니만 못한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서 가난에 찌든 흥부를 세밀하게 드러내는 일은 그 자체로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고발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실하고 선해도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아무리 악해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현실은 부조리하다. 부자가 된 흥부와 거지가 된 놀부는 이 선악과 빈부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 낸 결말이다. 뜨거운 로맨스도 화끈한 영웅담도 신비한 귀신 이야기도 아니지만, 《흥부전》이 지금까지 읽히는 고전인 이유다.
시르렁 실건 톱질 타고 내닫는
한바탕 난장이 펼쳐진다
처절한 가난도, 지독한 심술도
덥석 집어 웃음 속에 풍덩!풍요로운 삶에 대한 꿈, 양반 지주의 억압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장면으로 변주되며 뻗어 나간다. 생쥐가 쌀알을 얻으려고 밤낮 보름을 다니다 다리에 종기가 날 만큼 가난했던 흥부네 집에는 평생 써도 줄지 않는 쌀이 생긴다. 놀부에게 붙잡혀 개천 물에 빠졌던 봉사는 박에서 무리를 지어 나와 놀부의 재산을 탈탈 털어 간다. 흥부 박은 초막집을 꽉꽉 얽어 비바람을 막아 주지만, 놀부 박은 쭉쭉 자라 온 동네 지붕을 무너뜨려 놀부가 수천 냥을 물게 한다.
《흥부전》이 주는 즐거움은 처절한 가난도 지독한 심술도 웃음으로 풀어내는 찰진 입담을 통해 극대화된다. 매품을 그만두라며 오열하는 아내 앞에서 흥부는 “아, 대관절 볼기 이것 두었다가 어디다 쓸 것이오? 아 이렇게 궁한 판에 매품이나 팔아먹제” 하며 능청을 떤다. 놀부의 악행은 ‘옹기 가게 돌팔매질, 비단 가게 물총질, 소리하는 데 잔소리하기, 풍류하는 데 나발 불기’ 등 재치 있는 말솜씨로 그려져 실소를 자아낸다. 박에서 나온 이들에게 돈을 뜯기던 놀부가 기가 막혀 “나온 걸음에 잘들 놀아 보아라!” 악을 쓰자, 놀이패가 아랑곳없이 “해금 소리는 고개고개, 퉁소 소리는 띠루디” “징, 꽹과리, 북장구를 신명 내어 짓뚜드리”며 소동을 벌이는 대목에서는 폭소가 절로 난다.
서해문집 《흥부전》에서 느낄 수 있는 또 한 가지 재미는 서로 다른 이본들의 특징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김연수 창본 ‘흥보가’는 남산만큼 쌓인 하얀 쌀밥, 화려한 청홍 비단, 용과 봉황을 새긴 장롱, 은요강과 순금 대야 등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날기 공부 마친 흥부 제비가 강남에서 은혜 갚는 박씨를 물고 돌아오는 장면도 섬세하고 아름답다. 한편 경판 25장본 ‘흥부전’은 ‘놀부전’으로 보일 정도로 놀부를 응징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놀부의 돈을 뺏을 뿐만 아니라 덜미를 잡고 뺨을 치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두들기기까지 한다. 결말 또한 상대적으로 양반 취향이 많이 반영된 김연수 창본과 달리 냉소적이다. 놀부의 반성도, 흥부와의 화해도 없다.
《흥부전》은 오랜 기간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구비 문학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흥겨운 운율과 통쾌한 익살, 생동감 넘치는 의성어와 의태어, 풍성한 토속어와 사투리, 심술과 빈곤의 해학이 가득한 한바탕 난장을 즐겨 보자.

흥보가 한 궤를 가만히 열고 보니, 아, 쌀이 하나 수북이 들고, 또 한 궤를 딱 열고 보니, 거기는 그냥 돈이 하나 가뜩 들었는데, 궤 뚜껑 속에다가 ‘쌀은 평생을 두고 퍼내 먹어도 줄지 않는다’ 썼으며, 또 돈궤에도 ‘이 돈은 평생을 두고 꺼내서 써도 줄지 않는다’ 하거늘, 흥보가 좋아라고 궤 두 짝을 떨어 붓기 시작을 하는데.
흥보가 좋아라고, 흥보가 좋아라고, 궤 두 짝을 떨어 붓고 닫쳐 놨다 열고 보면 도로 하나 가득하고, 쌀과 돈을 떨어 붓고 닫쳐 놨다 열고 보면 도로 하나 가득하고, 툭툭 떨고 돌아섰다 돌아보면 도로 하나 가득하고, 떨어 붓고 나면 도로 수북, 떨어 붓고 나면 도로 가득.
“아이고, 좋아 죽겄다. 일 년 삼백육십 일을 그저 꾸역꾸역 나오느라!”
실건 실건 실건 실근 실근, 박이 활짝 벌어지니 뜻밖에 박통 속에서 노인 한 분 내닫는데 차린 복색 괴짜로구나. 다 떨어진 헌 베 바지 깊은 살이 다 보이고, 삼승 삼베 적삼 위에다 개가죽 묵은 배자 무릎까지 덜렁덜렁. 구멍 뺑뺑 중치막은 아랫단 황토 묻고, 떨어진 관에다 석 자 절반 되는 헌 베주머니 전 재산을 넣어 차고, 곱돌 깎아 만든 담뱃대 가운데 쥐고 놀보 놈 안방으로 제집같이 들오는데, 토깽이 얼굴에다가 빈대코가 맵시 있고, 뱁새눈 병치입에 목소리는 장히 크다. 두 눈을 부릅뜨고 놀보 놈을 바라보며,
“네 이놈, 놀보 놈아! 네 할애비 덜렁쇠, 네 할미 허천덱이, 네 아비 껄덕쇠, 네 어미 빨닥례가 모두 내 집 종일러니, 병자년 팔월 과거 보려고 서울 올라간 이후로 내 집 사랑이 비었을 제, 흉악한 네 아비 놈 가산 모두 도적하여 간 곳 모르게 된 뒤에 종적을 몰랐는데, 제비 편에 소식 듣고 천 리를 멀다 않고 예 왔노라. 네 가솔, 네 가산을 박통 속에다 급히 담아 내 집에 가서 시중들라.”
…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내어 주며,
“너야, 돈이든 곡식이든 뭘로 채우든지 이 주머니만 가득 채워 오너라.”
놀보 놈 속마음으로, 저 양반 저 억지에 많이 달라 하거든 이 일을 어찌할꼬 잔뜩 염려하였다가 주머니만 채워 오라니 얼마나 좋던지,
“하이고, 예. 예. 그리 하오리다.”
주머니를 들고 제 방으로 들어가 엽전 가뜩 담긴 주머니를 그 주머니에다 대고 조르르르르르 부어 놓으니, 놀보 돈주머니는 홀쭉하니 없어졌는데 생원님이 준 주머니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고 가뿐한지라. 놀보 어이없어,
“음마, 요런 잡것 좀 보소,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