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최인홍의 시에는 자연의 서사적 숨결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의 시편 전반에 펼쳐낸 시인의 주변적 요소 즉 그가 태어나서 성장한 배경이 마치 한편의 장편영화가 그렇듯 읽는 이에게 연속적인 파노라마로 장착한다. 시인이 살아낸 시간과 공간에서 만나는 경험적 세계의 이야기가 대체로 순연한 것이 그러하다. 그가 마주한 세계의 대부분은 자연물이거나 또는 그 자연물에 닿아있는 삶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독자를 그 세계로 진입하게 한다. 시인의 주변부적 삶을 형성하는 대부분은 산이거나 강이거나 바다이거나 암자 또는 푸르른 나무들이며 꽃과 이웃이 되는 것도 그렇다. 시인에게 경험되어진 시간과 공간의 무게는 그 어떤 복잡한 과정도 필요하지 않다. 그가 가진 기억의 회로를 통해 선명한 이미지로 발현되는 지난 시간의 여정과 그 시간이 빚어낸 기억 저 너머의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시 전편을 관통, 즉 관류하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낯을 가리기도 한다.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만날 때 비로소 아는 척하는 것도 그렇다. 기억은 매 순간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요구하면서 누구에게나 있는 자신만의 시간과 그 시간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특별한 산물이다. 각 개인에게 있어 기억은 경험되어진 과거의 일들을 공감각적으로 구현하며 특별한 정서적 공간에 놓일 때 시간과 공간이 연속성을 이루며 대상화를 이루는 것 또한 그렇다.
비우기 위해
흐르는 땀으로 세례를 하며 오른
설악의 정상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서 있는 눈잣나무와 마주한다
탁 트인 하늘로 마음의 뿌리를 뻗어
사철 푸른 희망을 놓지 않는 곳
지친 몸을 정상석 옆 바위에 맡기면
동해의 펄떡이는 파도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소양강 싱싱한 윤슬이 등을 토닥이는 곳
금강과 태백을 넘어온 녹색 바람이
어깨동무하는 곳
축축한 영혼을 보송하게 일으켜 세우는
대청봉에서
사방을 아우르는 강원의 품을 본다
―「대청봉에서」 전문
파도를 내려놓은
바다와 나란히 걷는다
직선을 버린
바람이 어깨동무를 한다
맨발 가득 달라붙는 모래가
긴 세월 구두에 휘둘리며 걸어온
굳은 발을 어루만진다
바다로 드는 갈매기 떼가
내 안의 묵은 슬픔들을
싱싱한 물속으로 데려간다
―「하조대 해변에서」 전문
시「대청봉」에서 만난 세상은 온통 비우기이다.‘비우기 위해/ 흐르는 땀으로 세례를 하며 오른/ 설악의 정상’에 올라 자신과 마주한 시인은 내 속에 가득한 그 무엇을 지금, 이 순간 비워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설악의 정상’에서이다.
설악산은 속초시와 양양군, 고성군과 인제군에 걸쳐 있는 태백산맥의 한 부분으로 해발 1,708미터로 우리나라에서 한라산과 지리산 다음으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그 설악의 정상인 대청봉에 시인은 서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한없이 작아진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겸허히 비우기를 한다. ‘비우기 위해/ 흐르는 땀으로 세례를 하며 오른/ 설악의 정상’에 오른 시인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서 있는 눈잣나무와 마주’하면서 자신을 돌아본다.
시인이 마주한 세계는 ‘사철 희망을 놓지 않는 곳’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지친 몸을 정상석 옆 바위에 맡기면/ 동해의 펄떡이는 파도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소양강 싱싱한 윤슬이 등을 토닥이는 곳/ 금강과 태백을 넘어온 녹색 바람이/ 어깨동무 하는 곳’이라는 것을. 이 땅의 산악인이 아닐지라도 설악산 대청봉 이름은 거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큰마음을 먹어야만 갈 수 있는 곳, 굳이 시간을 내어야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파도를 내려놓은/ 바다와 나란히 걷는다// 직선을 버린/ 바람이 어깨동무를 한다// 맨발 가득 달라붙는 모래가/긴 세월 구두에 휘둘리며 걸어온/ 굳은 발을 어루만진다// 바다로 드는 갈매기 떼가/ 내 안의 묵은 슬픔들을/ 싱싱한 물속으로 데려간다’(「하조대 해변」전문)에서는 가까이, 보다 더 가까이 놓인 자신과 마주한다.
한결 순연해진 바다를 보며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관통하며 그 속에서 여전히 어찌할 수 없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긴 세월 구두에 휘둘리며 걸어온 굳은 발’이라는 표현에서 여전히 놓을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만나야만 하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곧 ‘바다로 드는 갈매기 떼가’ 내 안의 오래된 슬픔들을, 진작 털어내지 못한 슬픔들을 ‘싱싱한 물속’으로 데려가는 것과 마주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시간 속에 놓이게 된다.
불을 잊은 지 오래된 아궁이에/ 재가 되지 못한 땔감이/ 숯으로 뒹군다//
아궁이 속에 묻힌 / 숯덩이를/ 뒤적이는 손길에/ 삭은 기둥 삐걱대는 아픔으로/ 언집이 뒤척인다//
후우/ 부드러운 입김에/ 피어나는 불꽃/ 아궁이가 환해진다//
타오르기를 잊은 채/ 재에 묻힌 숯덩이를/ 뜨겁게 살려내는 가슴//
온돌 구석구석을 돌아/ 집 한 채/ 온기로 품는다//
―「언집, 온기로 품다 ―수콩이네 뜨락 ․ 4」 전문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화단을 덮은 비닐 귀퉁이가/ 흙을 비집고 바람에 펄럭인다//
덜 삭은 슬픔 같은/ 짙은 거름의 냄새를/ 푸득푸득 잔기침으로 뱉어내더니/ 이랑으로 파고드는 바람을 견디지 못해/ 어설픈 위로처럼 찢어져 너덜거린다//
화단을/ 끝까지 보듬고 지켜줄 수 있도록/ 비닐 가장자리에/ 누름돌을 놓아야 했다/ 거름이 충분히 삭아/ 온전히 꽃들만을 피워 올릴 수 있도록//
새로 재단한 비닐로 화단을 덮는다/ 비닐 가장자리를/ 흙으로 박음질하고 / 골고루 누름돌을 놓는다/ 그 어떤 바람에도 상처입지 않도록
―「누름돌을 놓다」 전문
이 시는, 이제는 빈집이 되어버린, 한때 뜨겁게 달아올랐던 온돌에 옹기종기 모인 식구들이 겨울밤을 따뜻하게 보냈던 그때의 시절을 상기시키는 아름다운 시다. 소박한 농촌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낸 ‘온돌’이 있는, 그래서 아궁이를 통해 불꽃을 일으키는 긍정의 삶을 살아낸 ‘집 한 채’에 든 따뜻한 가족들의 결속을 고요히 들여다볼 수 있다.
곧 이 시는 「누름돌을 놓다」에서 확장을 이룬다. ‘누름돌’이란 말 그대로 바닥을 누르는 돌일 터인데 그 목적이 ‘잡초’가 자라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누름돌은 제 역할을 넘어 ‘거름이 충분히 삭아/ 온전히 꽃들만을 피워올릴 수 있도록’애를 써야 한다. 방해꾼인 잡초뿐만 아니라 ‘그 어떤 바람에도 상처입지 않도록’ 바닥을 지켜내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이 들여다본 삶의 터, 즉 생명을 꽃피우고 지켜내어야 하는 곳엔 꼭 필요한 누름돌을 놓아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생명’에 있음을 본다.
최인홍의 시집 『그물코를 깁다』에서 시의 전편을 관류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연의 서사적 숨결의 마디 마디는 시인의 경험적 세계에서 이루어져 있음을 다시 확인한다.
그의 경험적 세계는 절대적이면서 자연 친화적이다. 그를 둘러싼 푸른 나무들이며 꽃 그리고 강과 바다, 그리고 결코 인위적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소박한 삶을 통해 그 어떤 것에도 치장되지 않은 생명의 강인함이 초록의 풀밭처럼 활짝 펼쳐져 있음을 보았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최인홍
강원 고성 출생으로 1992년 『문학세계』시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하였다. 강원특별자치도교육청 학교문화예술담당 장학관을 거쳐 대룡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후 춘천과 동해바다를 오가며 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내린문학회장, 수향시낭송회장, 재능시낭송협회강원지회장, 한국문인협회강원지회 이사, 인제문화예술단체연합회장을 지냈다. 강원문화예술지원사업 예술창작활동지원금을 수혜하였다. 시집으로 『그물코를 깁다』가 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 삼악시, 수향시, 내린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낭송교육자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물레길
하조대 해변에서 13/ 대청봉에서 14/ 삼악산 15/ 오세암에서 16/ 여름 미천골에서 17/ 턱걸이 폭포 18/ 관음송 그늘에서 20/ 혼자여서 골똘하다 22/ 김부리의 가을 24/ 개인약수 26/ 상원사 가을 노래 27/ 금학산에 올라 28/ 내린천 30/ 하늘벽 32/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서 34/ 겨울 용대리는 바다가 된다 36/ 물레길 38/ 방태산 계곡에서 40/ 품안에 들다 41/
제2부 갈색 묵언
뿌리를 밟으면 온 몸이 저리다 45/ 시간의 안쪽 46/ 수행 47/ 갈색 묵언 48/ 폐차 50/ 그물코를 깁다 52/ 항아리 54/ 눈 내리는 해변 56/ 섬 속의 바다 58/ 빙어에게 59/ 휴지를 태우며 60/ 종이컵 62/ 눈 64/ 몽돌 66/ 눈부신 오후 68/ 독경讀經 69/ 삽을 내려놓다 70/ 그렇게 72/
제3부
고향의 강 75/ 아버지 76/ 더덕 77/ 한식 78/ 청명 80/ 택배 81/ 어머니의 의자 82/ 귀로에서 84/ 외할머니 산소에서 86/ 5월의 비 88/ 폐교 89/ 장항아리 90/ 늦은 독해 91/ 노송에 기대어 92/ 냉장고를 바꾸다 94/ 적기適期 96/ 따뜻한 밥상에 앉고 싶다 97/ 봄날 98/
제4부 바람의 흔적
사랑 101/ 누름돌을 놓다 102/ 수국 104/ 달맞이꽃 105/ 진달래꽃 106/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07/ 복수초 108/ 애기똥풀꽃 109/ 물봉선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110/ 비 내리는 밤 111/ 잊혀진 문을 찾다 ―수콩이네 뜨락·1 112/ 불면의 밤 ―수콩이네 뜨락·3 114/ 언집, 온기로 품다 ―수콩이네 뜨락·4 116/ 마디가 모여 자란다 ―수콩이네 뜨락·5 118/ 바람의 흔적 ―수콩이네 뜨락·7 120/ 역류 ―수콩이네 뜨락·9 121/ 가을 산이 내게 ―수콩이네 뜨락·10 122/ 파도의 끝 124/ 너의 뒤척임 속으로 125/
작품해설 : 박해림(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