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누가 저 사유를 내다 버린 걸까
허옇게 뒤집어쓴 눈으로
강가에 홀로 앉아있는 나무 의자
누가 쓸쓸한 저 사유를 내다 버린 걸까
차고 냉랭한 의자도 한 번쯤은
누군가의 안식이었을 터,
마치 혹한을 견디는 것이 사유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직은 성성한 네 다리가 의연하다
의자의 전언이 강을 건너 내게로 온다
몇 번이고 나는 그 의자에게로 걸어가고 싶었다
식은 햇빛 한 장 걸친 의자의 눈을 털고
오랫동안 시 한 수 적지 못한 냉기의 몸을
부려놓고 싶었다
핸드폰을 열고 먼저 그를 담는다
고독한 사유 한 컷!
제 몸에 눈을 받아 앉혀놓고 강물을 베끼는
의자의 시위 곁으로 나는 천천히 몸을 돌린다
유령사회
산으로 오르는 나뭇잎마다 세상의 이력이 묻어있다
무수한 손가락 지문이 남긴 문서들
쌓인 서적으로 이력을 올리는 학문도 낙관을 잃어가고
가지마다 값없이 걸려 있는 담론들만 싱싱하게 죽어간다
귀에 걸고 다니는 정보가 생체리듬이 되고
몸속에 삽입된 바코드가 세상을 끌고 다니는 유령사회
어떤 메시지도 신통치 않은 오직 이식된 속도로만
자신을 팔고 사는 몸이 황금인 세상
푸른 대지와 산과 바다와 사막도 오염된 속도로 쓰나미가 되고
과장된 노래와 춤이 광채가 되는 땅에
지식과 지혜는 다만 사전에 박힌 기호일 뿐,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자연과
똑같은 욕망이 똑같은 창조의 이름으로 들썩인다
책장을 넘어 세상으로 넘치는 문자의 불온을 모르는 척할까
나와 너는 없고 우리와 세상은 없고
세계와 우주는 없고 오호라! 오호라!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영주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시집 『아버지의 도시』 『말향고래』 『달에서 지구를 보듯』 『바당봉봉』 『통로는 내일모레야』 『달에서 모일까요』 단국대 문예창작학과 박사 졸업단국대, 강원대, 조선대, 광주대, 초당대(전 시간강사 : 인문학과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