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자연주의 문학의 정점이자 펜으로 산 자를 해부한 작가, 에밀 졸라. 그의 뛰어난 단편을 모은 국내 초역 선집 『방앗간 공격』을 빛소굴 세계문학전집으로 선보인다. 차례로 「방앗간 공격」, 「나이스 미쿨랭」, 「올리비에 베카유의 죽음」, 「샤브르 씨의 조개」, 「수르디 부인」 총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이 선집은, 에밀 졸라가 생전에 펴낸 단편집의 대표작들이거나 그의 창작 세계 전체에 비추어 주제가 새로운 작품들을 엄선했고, 공통적으로는 인간 삶의 아이러니와 희비극을 그려내며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들이다.어리석은 전쟁에 휘말려 연인과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끔찍한 고뇌에 빠진 처녀,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끔찍한 학대를 견디다 못해 비참한 사랑에 몸을 던진 여인, 차가운 흙 속에 생매장당한 채 무기력 속에서 공포를 견뎌야 하는 남자, 어린 아내를 만족시키고 싶지만 타고난 지질함을 숨기지 못하는 중년의 신사,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졌지만 그 내면의 척박함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화가……. 이야기꾼 졸라가 들려주는 아이러니의 정수가 『방앗간 공격』에 담겨 있다.50세가량으로 키가 크고 깡마른 장교는 도미니크를 간단히 심문했다. 프랑스어를 유려하게 구사함에도 그는 프로이센 사람답게 경직되어 보였다."당신은 이 고장 사람이오?""아뇨, 벨기에 사람입니다.""그렇다면 왜 무기를 들었소? 당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도미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장교의 눈에 파랗게 질린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프랑수아즈가 보였다. 그녀의 새하얀 이마에 한 줄기 핏자국이 있었다. 두 젊은이를 번갈아 쳐다본 장교는 사태를 대강 짐작하고서 이렇게 덧붙였다."총을 쏜 걸 인정하오?""엉겁결에 무턱대고 쏘았을 뿐입니다." 도미니크가 조용히 대답했다.이런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화약으로 까매진 그의 얼굴이 땀에 젖어 있었고, 찰과상으로 어깨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었다."됐소." 장교가 되풀이했다. "당신은 두 시간 후에 총살될 거요."프랑수아즈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녀의 내면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피였다. 그것은 맹목적 열정이었고, 가장 강한 자가 되고 싶은 격렬한 욕망이었다. 아버지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며 몸을 떨고 복종하는 어머니를 보았을 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오직 경멸뿐이었다. 그녀는 종종 이렇게 되뇌었다. "나한테 저런 남편이 있다면 죽여버릴 거야."
심지어 우울한 슬픔에 젖었던 어느 날 저녁, 그녀는 그가 다른 여자들의 남자가 되지 않도록 차라리 아버지의 손에 죽게 내버려두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처럼 섬세하고, 그처럼 피부가 하얗고, 그녀보다 더 여자 같은 그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빠진 나쁜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아냐, 꼭 구해내야 해, 그 사람이 절대로 모르게. 그러고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야 해. 단지 그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난 행복할 거야.
작가 소개
지은이 : 에밀 졸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엑상프로방스에서 보내다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1858년 파리로 돌아와 생루이 고등중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대학입학자격시험에 두 차례 낙방하자 학업을 포기하고 아셰트 출판사에 취직했다. 1863년부터는 신문에 콩트와 기사를 기고하며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했다.1865년 자전적 중편소설 『클로드의 고백』을 발표했고, 이듬해 출판사를 그만둔 후 본격적으로 평론가이자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1867), 『마들렌 페라』(1868) 등을 출간했으며, 발자크의 ‘인간극’에 영향을 받아 ‘루공마카르 총서’를 구상했다. ‘제2제정기 한 가문의 자연사와 사회사’라는 부제가 붙은 루공마카르 총서는 5대에 걸친 루공가와 마카르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23년간 총 20권의 연작소설로 그려낸 대작이다. 『루공가의 행운』(1871)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한 편씩 발표되어 1893년 『의사 파스칼』을 끝으로 완결되었다. 총서에는 『목로주점』(1877), 『나나』(1880), 『제르미날』(1885), 『대지』(1887), 『인간 짐승』(1890) 등 졸라의 대표작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총서를 통해 졸라는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한다.1894년부터는 3부작 소설 ‘세 도시 이야기’를 집필해나가는 한편, 반유대주의에 기인한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나는 고발한다」(1898)를 발표하며 행동하는 지성의 상징이 되었다. 말년에는 4부작으로 계획한 소설 ‘네 복음서’ 중 『풍요』(1899), 『노동』(1901) 등을 출간했다.(세 번째 권 『진실』(1903)은 사후 출간) 1902년 파리에서 가스 중독 사고로 사망했고, 1908년 유해가 국립묘지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