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잊힌 논문, 잃어버린 인터뷰, 묻힌 증거로 가득한 연구
1300페이지 분량의 녹취록 분석
“아렌트는 지나치게 성급하고 위험했다”
★독일 NDR 도서상★
★『뉴욕타임스』 2011 최고의 책★
★유대인 전국 도서상 최종 후보★
★컨딜 역사문학상 최종 후보★
왜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 중요한가1906년 10월 14일, 한나 아렌트가 태어났다. 그보다 7개월 앞선 3월 19일, 아돌프 아이히만이 세상의 빛을 봤다. 동갑내기 두 사람은 유대인 학살을 둘러싼 피해자-가해자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주인공 삼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아이히만 역시 자신을 주인공 삼아 『다른 이들이 말했고, 이제 내가 말할 차례다!』를 썼다.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 재판을 참관한 뒤 이 책을 썼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문서고에서 굽은 등을 하고 아이히만이 남긴 자료를 추적하며 읽고 해석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을 쓴 슈탕네트가 그중 한 명이다. 아이히만이 악필로 쓴 원고를 잇는다면 길이가 총 240킬로미터에 달하는데, 그녀는 이 자료들을 손에 넣는 대로 읽었다. 그러고는 “아렌트가 너무 성급하고 무엇보다 위험”했다고 평가한다. 아렌트 책 출간 이후 50년 만의 반박이다. 이런 평가는 아렌트의 저술 이후 수십 년간 연구가 누적됐고, 자료가 계속 수집됐으며, 통계 데이터가 산출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제 고쳐 말하자면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의 상징이 아니라, 매우 노련하고 체계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예루살렘 법원에 서기 전 아이히만의 생을 쫓는다. 아렌트의 책은 현재적 가치를 여전히 갖는다. 다만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광적인 칸트 애호가로서 쓴 상세한 기록물은 물론이고, 급진적 신학자 윌리엄 헐과 종교철학을 두고 논쟁한 사실도 알지 못했다. 또한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자신의 최후 진술을 대부분 칸트의 말로 채웠다가 변호사에게 제지당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철학도처럼 보이려 한다는 점은 간파했지만, 이것이 어리석은 허영심과 철학 지식의 부족에서 비롯됐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아이히만이 망명지 아르헨티나에서 가졌던 대담의 녹음테이프와 녹취록의 존재는 오랫동안 알려져왔지만, 그 품질이 좋지 않아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슈탕네트는 이 테이프들을 해독하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자료들과 함께 정리해 아이히만에 대한 완전한 분석을 제공하려 한다.
850쪽이 넘는 이 책의 전반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이히만의 모습과 전후의 도주생활을 조명한다. 그는 신분증 위조, 여러 개의 가명, 도주 경로에 대한 거짓말 흘리기 작전 등으로 도피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 정착해서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이름과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고, 유대인 1030만 명이 아니라 600만 명밖에 죽이지 못한 것이 통탄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족을 아낀 그는 도주 기간에 아내와의 사이에서 넷째를 출산하기까지 했다.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언급했듯이 “참으로 적당한 정신적 재능”과 “판단 능력의 부재” 및 “자기표현에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에서 아이히만을 300시간 동안 심문했던 아브너 레스는 그를 “충분한 지식을 갖추었고, 매우 지적이며 노련하다”고 묘사했다. 아이히만은 모든 텍스트를 자신의 쓸모에 따라 왜곡하는 지적 체계를 가졌지만, 어쨌든 그는 칸트 외에도 니체, 플라톤, 쇼펜하우어를 인용하고 심지어 유대인인 스피노자의 텍스트까지 끌어들여 자기 변론을 하던 사람이었다.
삼림감시원, 양계장 주인, 토끼 사육자, 벤츠 노동자로서의 아이히만 아이히만은 유대인 문제 담당관으로서 보안국을 운영했고, 1942년 반제회의 이후 독일의 유대인 말살 정책을 계획·실행했으며, 특히 헝가리 유대인 4분의 3이 사망한 데 대한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그는 15년간 자유로운 삶을 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전후에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정보가 아직 불충분했다. 이런 무지 덕분에 나치 인사들은 큰 처벌은 받지 않았고, 게다가 정보기관과 경찰의 무능, 무관심, 공모까지 더해졌다. 공모는 여러 수준에서 이뤄졌다. 이들은 정치적 전복 계획을 세웠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연결망을 구축했으며, 나치의 찬란한 세계관을 옹호하기 위해 문서들을 위조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바로 아이히만이 있었다.
아이히만은 전직 나치 조직의 도움을 받아 오스트리아로 이주하면서 오토 헤닝거라는 새 이름과 집토끼 사육사라는 직업을 얻었다. 취미로 바이올린을 켰던 아이히만은 이 시기 악기 연주로 현지 여성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히틀러 아래에서 경력을 쌓은 것은 우연일 뿐, 사악한 것은 나치 정권하의 다른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했다. 1950년 오토 헤닝거는 돌연 유럽에서 종적을 감췄다. 대신 아르헨티나에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인물이 출현했다. 브로커들이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만들어준 것이다. 클레멘트는 수력발전소 프로젝트에 들어가 측량팀을 이끌었다. 또 그는 말을 타고 팜파스 지역을 유랑하며, 아콩카과산 등정을 할 만큼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아이히만의 사망신고를 했던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이쪽으로 건너와 남편과 재회했다. 헤어져 산 지 7년 만이었다. 부부는 금슬이 좋아 곧 넷째 아들을 얻었다. 그렇게 평생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살면 아이히만은 꼬리가 밟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문제 담당관으로 존재감을 발휘했던 그는 전원생활에 만족 못 하고 활동반경을 점점 넓혔다. 그리고 타국에서 나치 인사나 극우 언론인과 만나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다. 이 책에서 주요 자료가 되는 사선과의 대담은 1957년에 시작되는데, 두 사람이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르헨티나가 나치 전력을 가진 독일 이주민 사회와 깊이 연루된 사실을 숨기려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이히만은 언론인 사선에게 끌렸는데, 이유는 사선이 저술가이기 때문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사선은 모던한 문체를 썼고, 독자를 사로잡는 비법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극우 잡지 『길』을 통해 아르헨티나에서뿐만 아니라 전후 독일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었다.
저자가 되려 하고 독자를 포섭하려는 욕망, 그리고 극우 사상에 대한 집념은 아이히만과 사선의 공통점이었다. 특히 사선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유대인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책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와 증언을 아이히만에게서 얻어내려 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홀로코스트 범죄의 윤곽이 점점 드러나면서 전 나치들의 은신처로 숨통이 조여오기 시작한다. 1959년 2월 먼저 요제프 멩겔레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 그는 곧바로 파라과이로 숨었다. 대중이 대량학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자 이제 신문에 아이히만의 이름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해 3월 20일에도 아이히만은 옛 나치 동료의 도움으로 벤츠에서 창고 노동자 자리를 얻었다. 아이히만은 사교적이어서 벤츠에서도 친구들을 금세 사귀었다. 매일 왕복 네 시간 걸려 통근하던 그는 주말이면 아들들과 함께 본인 소유의 작은 땅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 시기 아이히만은 많이 읽고, 종종 바이올린도 켰다.
가해자, 기록자, 저술가로서의 아이히만 전후 아이히만의 주 무대는 아르헨티나다. 이곳은 전후 나치 인사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나라 중 하나다. 이들이 향수에 젖을 수 있게 이곳에는 최신 신문과 책들이 갖춰져 있었고, 정치적 입장과 직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회합을 가졌다. 아이히만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집을 구했는데, 나치의 핵심 인물들을 도피시키고, 직업을 알선하고, 부동산 중개까지 해주는 나치즘 신봉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전직 나치 정책의 실행자는 역사의 현장을 증언해줄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아이히만과 쌍벽을 이룬 사람은 빌럼 사선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친위대 종군 기자인 그는 고유의 문체를 가진 필자로 활약했다. 그는 이른바 ‘사선 서클’을 이끌면서 매주 아이히만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고 논쟁을 벌이며, 이 모든 내용을 녹음했다. 이 책의 후반부는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머문 지 7년째인 1957년 4월경부터 시작해 10월 중순까지 이어진 레코딩 작업이 주를 이룬다. 거기서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이 독일의 이익을 위해 역사적으로 필요한 정책이었다면서 자신의 활약상을 자랑스레 떠벌인다.
사선은 아이히만과의 대화를 녹음함과 동시에 보조원들에게 타이핑하도록 했다. 오늘날 아이히만에 관한 주요 자료는 녹음 원본 파일, 타자화된 녹취록, 녹취록 사본, 아이히만의 저술, 그리고 아이히만의 방대한 메모들이다. 녹취록은 1300쪽 분량이고, 녹음테이프는 29시간 분량에 달해 신뢰할 만한 1차 사료가 되며, 이로써 우리는 사선의 집 거실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여기 참석한 멤버들은 친위대 대원, 나치당 지구당 위원장, 나치 외무부 ‘유대인과’ 직원, 작가, 독일군 공군 조종사, 괴벨스 언론 담당 부관, 독일 외무부 장관 아들 등이었다. 집단 총살, 죽음으로 이끄는 강제노역, 굶주림과 가스실을 통한 살인 모두를 조망할 수 있는 인물로 아이히만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히만은 명성을 스스로 만들어내 이들의 시선을 끌면서 그에 소속되는 입장권을 얻어냈다.
모임의 분위기는 마치 세미나 같았다. 잡담은 일절 없고 종이 바스락대는 소리와 배려로 가득 찬 존중만 있었다. 참석자들은 매번 여러 시간 역사이론을 논하며, 문서와 전문 서적을 지칠 때까지 읽고 토론했다. 사선은 다음 모임 때까지 읽을 과제를 나눠주면서 준비를 잘해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사선 서클에서 드러낸 본모습을 은폐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민족사회주의자가 아니고 지난 15년간 품행을 가다듬으며 정치와는 거리가 먼 조용한 시민으로 지내왔고, 또 반유대주의 같은 일체의 적개심을 버린 지 오래라는 방어 전략을 폈다.
그는 이스라엘 첩보 요원에게 납치돼 예루살렘 감옥에 수감되자 자기 변론을 준비하며 사선 서클에서 연습했던 토론과 대화 기술을 모두 활용하게 된다. 즉 그 대담은 결과적으로 아이히만에게 재판 예행연습이 되어준다.
아이히만은 감옥에서도 끊임없이 읽고 기록하면서 저자가 되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책의 장정과 표지는 진주색이나 비둘기색 한 가지로 유지되어야 하며, 명확하고 직선적이고 매력적인 서체가 사용되어야 한다.” 재판 후 평결을 기다리면서 그는 표지 색깔, 글꼴뿐 아니라 잠재적 편집자나 기증본에 대한 의견까지 덧붙였다.
아이히만의 심문 내용은 총 3564쪽에 달했다. 이 자료가 공개되리라는 것은 자명했기에 아이히만은 이때부터 최종 텍스트를 수정하는 데 몰두했다. 맞춤한 변명들이 보태졌기에, 이때의 진술을 1957년에 기록된 『아르헨티나 문서』와 비교해보면 미묘하게 모순되는 점들이 드러난다. 결국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이 남긴 기록은 원고, 진술 기록, 편지, 개인 서류, 이념적인 글, 개인적 메모, 여백에 적은 수천 개의 메모 등 총 8000쪽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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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자기 연출에 능했다. 따라서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의 진정한 광기가 1945년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나치의 패배 이후 가면을 쓴 그는 예루살렘 법정에 서기 전 15년간 모두를 속일 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1957년에 기록된 『아이히만 문서』의 저자는 아이히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슈탕네트는 이 문헌들을 읽으려는 이들에게 주의를 준다. 여기서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직접 얻길 기대해서는 안 되는데, 아이히만처럼 오로지 이해관계만 생각했던 사람이 신뢰할 만한 목격자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문서에서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이히만의 사고방식’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그 자신이 진실이라 여기는 심연 위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바로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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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범죄자들을 정확히 어떤 위치에 놓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의견이 크게 갈린다. 일부 학자는 그가 평범한 사람인데 전체주의 체제에서 사유 능력 없는 살인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일부 학자는 그를 절멸 의도를 가진 과격한 반유대주의자로 보았다. 또 다른 어떤 학자들은 나치 정권을 이용해 그저 자신의 사디즘을 위한 구실을 마련했던 정신병자로 그를 간주했다. 그 결과 아이히만에 대해 여러 모순된 이미지가 마구 생겨났다. 그것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를 둘러싼 논쟁에서 더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제껏 논의에서 빠진 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론이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현상’ 그리고 생애 여러 시기의 아이히만의 이미지에 대한 시각이 빠졌다.
그런 방식의 삶에 속아 아이히만을 정치적으로는 다소 천박하지만 학문에는 관심 많은 문예 애호가로 오인하기 쉽다. 특히 카페에서 잡담하고 텍스트를 작성하며 발표하거나 동료들과 전문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와중에도 유대인을 고발하기 위해 꼼꼼히 일하면서 반유대주의 선전 작업을 수행하고 게슈타포와 함께 체포하고 조사한 일들이 사료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그러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