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불같은 열정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적 감성으로 써내려간 시인의 첫 소설. 자신이 생의 어떤 시기에 있던 소극적 초탈이나 관조가 아닌 강렬하게 느끼고 행동하고 사랑하려는 남자 TJ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나기 힘든 어둡고 참혹한 과거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여인 넬라의 지극한 사랑 이야기. 그들에겐 설렘도 두려움도,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아픔도 전부 생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지구의 끝, 처녀지와 같은 파타고니아에서 초신성의 폭발처럼 강렬한 흔적을 남긴 어른들의 사랑에 체면과 가식의 옷을 벗고 빠져 보자!
출판사 리뷰
“광활한 대지와 설산, 거대한 빙하와 호수, 세상의 끝
파타고니아에서 마지막 사랑과 첫사랑의 운명적 조우”
누구에게나 늘 쓰는 비밀번호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일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기념일이거나 하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비밀번호가. 소설 속 남자 주인공 TJ의 비밀번호는 1520이다. 1520년은 마젤란이 천신만고 끝에 대서양에서 태평양을 잇는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한 해이며,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이 아로새겨진 땅인 파타고니아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해이기 때문이다. 혼자 집에서 뒹굴던 어린 시절 두꺼운 지질의 지도책에서 처음 접한 파타고니아는 일생 동안 그에게 아주 특별했던 것이다. 한 번이라도, 반드시 그 땅에 발을 디디리라고 결심할 정도로.
TJ는 너무도 멀어 늘어가는 나이와 함께 점점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지던 파타고니아에 갈 기회를 얻자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함께 가기를 거절한 아내 때문에 받게 될 시선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떠난다.
더 이상 좌초된 배처럼 살지 않기 위해,
사랑이 없는 평안과 무관심이 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아름답지만 향기는 없고 건드리면 금방 부서져 버릴 드라이플라워 같은 시간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떠났다. 파타고니아로!
광활한 대지와 설산, 거대한 빙하와 호수, 세상의 끝 순수의 땅 파타고니아에서 첫날 아침 그가 느낀 바람의 감촉, 얼음 씹은 뒤처럼 깔끔한 대기의 맛은 그에게 무언가 일어날 일을 말해주는 듯 했으며 그는 기대대로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선물을 만난다. 갈색의 대지 위의 목장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왔다는 여인을. 넬라를!
은퇴 후 평생 소원하던 그림에 전념했지만 최근 좌절에 빠져 있는 화가인 TJ는 한눈에 넬라에게 사로잡혀 그녀를 단숨에 그려 냈고, 넬라는 남몰래 그 스케치에 눈길을 주었다. TJ는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의 애독자였고, 넬라의 고향은 바로 그 다리가 있는 도시 비셰그라드였다. 당연히 그들은 다음 날을 약속했으며, 두 사람의 도시 엘 칼라파테에서 꿈에서조차 없었던 깜짝 선물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TJ는 더 머물겠다는 결심도, 다시 보자는 제안도, 미래에 대한 아무런 약속도 하지 못하고 넬라와 함께 올려다 본 파타고니아의 별들을 뒤로 하고 엘 칼라파테를 떠난다.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의 문을 활짝 연 기적 같은 1년, 자신의 삶을 길지 않은 끈에 묶인 가축처럼 만든 참혹한 기억을 마주하고 그 장막을 걷어내는 넬라, 그 곁의 TJ”
언제든 넬라를 먹먹한 시선 너머의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그 무언가는 수많은 흡판이 달린 괴물이었으며 기억의 어떤 검은 원천이었다. 두 번째 쳅터 ‘지구 반대편에서’는 넬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자신을 먼저 남김없이 꺼내 보였던 TJ의 편지는 결국 넬라의 닫힌 문을 연다. 넬라의 편지는 때로는 감성적으로는, 때로는 넘치는 드리나강의 급류처럼, 사랑과 고통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넬라는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뱉어내면서도 자신이 바뀌지 않는 사람이라고 미안해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의 1년은 그녀를 이미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녀만 모를 뿐.
“상처 난 곳, 깨어진 곳, 비어진 곳을 메우는 영원한 사랑을 향한 성장 소설”
TJ는 아마도 문득, 날을 잡았다. 파타고니아로 돌아갈 날을. 다시 되풀이되는 진열장 속 습관의 나날을 견디는 고행이 끝났다고 느꼈을까, 아니면 달라진 넬라를 확신한 것일까. 그는 돌아가 넬라를 만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차곡차곡, 계단을 밟듯 조심스럽게 사랑을 한다. 엘 칼라파테에서, 엘 찰튼의 깊고 깊은 피츠로이 산기슭에서,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에서, 그리고 더 없이 아름다운 호수의 도시 바릴로체에서. 아니, 그들은 조심스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더 말할 나위 없이 정열적으로 사랑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TJ와 넬라는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서로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들에게는 넘지 못할 산이 있었으며, TJ는 그 산을 외면한 자신의 무책임을, 윤리적 나태함을 점점 무겁게 느낀다. 정한 사람은 없어도 정한 날짜가 있는 것 같은 유예의 나날을 보내던 TJ에게 급작스럽게 떨어진 거대한 바위. 그들은 믿을 수 없었지만, 삶을 바꾸는 일은 언제나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던가. 과연 두 사람은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인가.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이 소설 속에는 파타고니아의 아름다운 전경, 강렬하지만 서로를 지극히 배려하는 사랑, 드리나강의 다리가 본 보스니아의 비극적 역사가 시인의 필치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참혹한 개인사를 극복하는 한 여인과 영원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어야 하는 한 남자의 사랑을 통한 성장기가 함께 담겨 있다. 일독의 감동은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빈 곳이 더 비어지면서 그를 힘들게 하진 않았지만 채워지진 않았다. 진정 살아 있는 삶을 위해서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는 나이가 던진 범용의 그물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고착과 좌초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지는 시선이 식탁 위의 스케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 먼 우주의 한구석에서 일어난 초신성의 폭발처럼 그녀의 눈빛이 그의 작은 손 위에서 반짝, 터지고 있었던 건 몰랐다.
그는 두 장의 드로잉페이퍼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넬라가 환하게 웃었다. 한밤중에도 셀 수 없는 빛깔의 구름 위를 걷던 한 남자의 오랜 집중의 결과물을 함께 보며 두 사람은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생각도, 어떤 사람도, 어떤 소음도 끼어들지 못했다.
“당신 참 좋은 사람이에요. 이런 그림, 이걸 위해 쓴 시간들로 나를 기쁘게 해 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넬라가 이제껏 본 것 중 가장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이 담겼다고 느껴도 좋을 만큼.
동시에 테이블 위에 있던 그의 손 위에 아주 잠깐, 그녀의 손을 얹었다 가져갔다. 1초일까, 2초일까, 아니면 1초도 안 되는 순간일까. 그러나 느낌은 길었다. 손끝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경추를 뚫고 오직 넬라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대뇌피질에 전해진 언어들. 소리 없는 언어의 많은 뜻. 성급하게 넬라의 손을 마주 잡지 않은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만약에 그랬다면 TJ는 넬라의 깊은 침묵의 말을 중간에 끊어 버려 그녀가 전해 주려는 많은 의미를 하나도 읽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인구
• 시인. 강원도 원주 출생.• 시집으로 『늦은 고백』(2006), 『그대의 힘』(2013), 『거기 그곳에서』(2017), 『달의 빈자리』(2021) 등이 있다.
목차
프롤로그
Ⅰ. 한 시간 그리고 한나절
Ⅱ. 지구 반대편에서
Ⅲ. 다시 파타고니아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