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서로 다른 생명들의 오롯한 삶을 위한 ‘다른 억양 읽기’ 55가지 이야기!
-다양한 사물의 ‘다른 억양’에 대한 따뜻하고 넓고 깊은 존중과 이해를 느낀다.
하나의 창으로는 편견만을 자라게 할 뿐이다. “윤재경 작가는 《다른 억양 읽기》를 통해 시간의 배를 타고 항해하는 과정을 그렸다. 그는 거대한 세계를 모두 항해하겠다는 욕심을 내지 않았지만, 그가 항해한 시간은 우리가 익히 아는 시간의 모습 말고도 전혀 다른 시간의 모습도 들어 있다. 어느 자리에 머문 시간과 맺은 깊은 내연을 파고 들어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시간의 바다에 모든 것이 녹아들므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가득한 거대한 바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의 바다는 ‘돌아온 시간’, ‘늘 그곳에 있었던 시간’, ‘한때의 시간’이란 해류가 서로 섞이면서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문화적 기수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다른 시간의 독행(獨行)과 섞임, 동행을 구분하는 일은 어렵다. 그런데 구분해야만 삶의 시간을 이해하는 여러 창을 갖게 된다. 하나의 창으로는 편견만을 자라게 할 뿐이다.
윤재경 작가의 《다른 억양 읽기》는 그래서 빛난다. 그는 시간의 모든 면을 깊어지고 깊어지는 공간에서 읽어내고 있다. 그는 시간이 품은 공간성의 본질까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 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수필가) <추천사> 중에서
■ 억양의 차이를 포착하는 일이 사물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방식이고 능력이다. 이번에 펴낸 윤재경 작가의 첫 에세이집 《다른 억양 읽기》는 오랜 동안 공직(한국전력)과 교직에 있다가 귀향하여 정원을 가꾸며 사는 55가지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는 이 책의 집필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모든 사물은 자기만의 색, 이미지, 형질이 있고 변화하는 속성이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을 각인하는 일이다. 시간을 각인하려면 사물의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데, 순간은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달라서 억양이 생긴다.
시간을 각인하는 일은 사물의 억양을 포착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지만, 사물도 자체의 삶이 있어서 억양이 달라진다. 달라지지 않는다 해도 사물을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억양은 달리 인지된다. 우리의 시선이나 감각이 사물과 만나는 지점이 순간의 억양인 셈이다.
사물의 억양은 문명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즉 문명의 억양과 자연의 억양으로 나눌 수 있다. 문명의 억양이 사회적 시간에 존재한다면, 자연의 억양은 자연적 시간에 존재한다. 둘로 나누기는 했지만, 겹친 부분이 많다.
도시에서는 문명의 억양이 우세하게 작동하고, 시골에서는 자연의 억양이 우세하게 작동한다. 매미 소리도 도시에서는 우악스럽게 들리고 시골에서는 즐겁게 들릴 수 있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자연을 주름지게 하거나 그늘지게 한다. 그 억양의 차이를 포착하는 일이 사물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방식이고 능력이다.
‘세계’라는 오케스트라 안에는, 음(音)을 내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악기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현재 들리는 악기의 음은 일부다. 연주되어도 듣지 못하는 악기의 음이나 연주되지 않고 있는 악기의 음이 ‘세계의 음’을 이루고 있다. 세계는 순간의 억양에 의해 규정된 박자 위에서 통제된다.”
총 4부로 나눠 구성된 이 책은 각 장마다 13~14꼭지의 글을 수록했는데, 어느 꼭지 원고를 읽더라도 저자가 바라보는 제목처럼 다양한 사물의 ‘다른 억양’에 따뜻하고 넓고 깊은 존중과 이해가 느껴진다.
자신의 공간과 시간이 세계의 중심임을 깨닫는 시간이 협애(狹隘)한 그늘을 만들지 않고
따뜻하고 존중하는 넓은 그늘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다른 억양 읽기》는 4부로 구성했다. 1부와 2부는 현재의 이야기를, 3부는 과거의 이야기를, 4부는 미래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른 생명들이 오롯한 삶을 살기 위한 억양들을 읽었다.
1부는 자연의 억양을 찾아 각인한 이야기다. 황토방을 짓고 안수산에서 해 뜨는 위치로 계절과 시간을 만나고, 사물들의 언어를 배운다. 복수초가 피면 나무 전지를 서두르라는 신호다. 산개구리가 울면 입춘임을 몸이 알아챈다. 냉이와 쑥이 자라면 마을 사람들이 캐러 온다. 자연의 시계와 억양에 따라 사는 모습이다.
2부는 안수산이 드리운 삶의 억양을 나누는 이야기다. 마을 사람과 함께 신화나 민담이 깃든 나무나 골짜기, 바위 주위를 보살핀다. 안수산 가는 길을 닦고, 그 길을 젊은이들이 오르며 느슨한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과 내용을 담았다.
3부는 문명의 억양에 따라 살아온 삶을 각인한 이야기다. 군대와 직장 생활, 대학 강의, 기업 자문 활동 등 사회적 시간을 보내며 겪은 사건과 스펙터클에 해당할 만한 억양들을 포착했다. 나아가 책과 여행을 통해 삶의 태도와 사회적 책임을 강화했다.
4부는 기후변화 시대라는 거대한 억양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각인하는 이야기다. 성재여행에서 개인 ESG의 활동을 통해 기후변화의 파수꾼이 되는 일이다. 지속가능한 소농을 꿈꾸고, 이를 글로 쓰며 시행하는 과정을 다룬다.”
“《다른 억양 읽기》를 읽는 이들에게, 자신의 공간과 시간이 세계의 중심임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 깨달음이 협애(狹隘)한 그늘을 만들지 않고 따뜻하고 존중하는 넓은 그늘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는 천세진 님의 <추천사> 끝맺음 말처럼, 이 책으로 인해 서로 다른 억양을 이해하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햇빛이 산의 장막 위로 솟으면 상영한 곳과 상영할 곳이 판이하다. 흰 서리가 서서히 녹는다. 돌도 쑥도 젖는다. 냉이와 점나도나물 이 초록의 빛을 상영한다. 대지는 갈색의 땅을 상영하며 되찾는다.
마을 서쪽에서 시작한 파노라마는 산기슭의 연못과 도랑으로 스며온다. 영화는 해가 떠오르는 속도와 진로에 따라 한 박자 느리게 상영된다. 은은한 은빛 세계가 촉촉한 갈색과 초록 세계로 변한다. 이처럼 자연 속에는 자연만의 영화이론이 있다.
햇빛이 상영하는 세계로 나뭇잎이 몸을 펼칠 준비를 서두른다. 밤 추위에 온기를 간직하려 오므렸던 꽃잎이 회색을 걷어내고 자기 색깔을 드러낸다. 도랑물은 빛을 받아 경쾌하게 흐르고 그늘진 곳에 남은 서리가 녹으며 물을 보탠다.
연못에서는 살얼음이 녹은 곳으로 영화가 거꾸로 상영된다. 잔물결이 어른거리며 햇빛과 서리와 물결이 빚어낸 꿈같은 세계가 펼쳐진다. 땅에서 피어나는 김은 위로 오르지만, 연못에서 수면 위를 지나는 김은 유령의 흰 옷자락이다. 옷자락이 수면을 느리게 더듬다 떠오른다.
햇빛이 상영하는 영화는 그리 오래지 않아 막을 내리고, 또 다른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는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저녁 어스름이 되어야 땅에서 올라온 이슬을 만나 서리를 친다. 햇빛의 열과 땅의 온기가 서리를 하늘에 잡아두었다가 밤이 되면 다시 내려보낸다.
-<자연의 영화이론> 중에서
개구리가 서식하는 연못은 안수산에서부터 나지막이 경사져 집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돌리기 위해 만들었다. 자생하는 돌배를 가운데 두고 사방을 동그랗게 팠다. 원과 삼각형의 모양을 만들고 인접한 경사지에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들어섰다. 어릴 적 오징어 게임을 하고 놀았던 마을 가운데 공마당의 형상을 닮았다.
산지 습지에서 조금씩 물이 흘러든다. 평소에는 마르지만, 비가 오거나 눈이 녹으면 물이 모인다. 물이 조금씩 고여 연못을 채운다. 물이 고이듯 덕이 쌓였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응덕지(凝德池)’라 이름 지었다.
덕이란 일상생활이 습관으로 쌓여서 이루어진다. 봄이면 마을 사람들과 지인들이 냉이와 쑥을 캐러 온다. 6월 초순에는 아이들이 ‘매실 따기 체험’을 한다. 젊은이들이 안수산을 찾고 정원을 둘러보며 즐긴다.
-<산개구리가 울 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