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프랑스 철학자 클레르 마랭의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오늘 세계의 현실과 거기에 놓인 우리의 실존이 겪는 첨예한 딜레마를 가로지르는 질문의 책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바라는 자신의 자리(제자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기에 자리는 질문이 된다. 결여된 것은 과잉으로 존재하며 주어진 자리에서 우리는 늘 흘러넘친다.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와 잘 맞는 세계라는 환상에 머물 때보다 척박한 자리에서 한계 밖으로 흘러넘치는 자신을 자각할 때 실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다시, 우리는 자리의 존재이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존재인 것이다.자리 옮김의 사유의 거의 모든 측면을 섬세히 다루면서, 위압적인 훈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듯 대화를 제안하는 그녀의 철학적·문학적 에세이가 존재의 자리를 찾는 여행에서 길 잃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출판사 리뷰
‘발 없는 새’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의 대사에 등장하지만, 뿌리 뽑힌 청춘의 불안에 대한 은유이지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자리의 존재들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리를 찾아 기꺼이 이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람의 실존이 요구하는 자리는 생존의 욕구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시몬 베유가 “뿌리 내림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인간 영혼의 욕구”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실존의 깊이와 충일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에 닿고자 하는 포기할 수 없는 갈망과 고뇌를 환기시키는 말로 이해해도 되리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뿌리 내림을 위해서 뿌리 뽑힘을 감수하려 한다. 자신의 실존의 여러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일치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와 진심으로 화해하기 위해서.
그런데 우리는 이렇듯 준거점이자 출발점, 근원이 되어 줄 자리를 염원하지만, 그런 자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 세상은 당신을 위해 어떤 공간도 만들지 않았다”고 날마다 위협하는 세계를 통과하는 우리는 이 세계의 질서가 허용하는 자리를 찾아 분주하고, 퍼즐의 빠진 조각이 자신임을 주장하고, 주어진 자리를 통해 규정되고 식별되기를 바랄 뿐 아닌가? 그 사이 이동하는 법도 잊은 채 고정된 자리에 붙박인 존재가 되고 나아가 대체 가능한 노동 상품이 되었을 뿐 아닌가? 모든 순간을 예측할 수 있을 때, 삶의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될지 정해져 있을 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게임을 하고 싶을까? 프랑스 철학자 클레르 마랭의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오늘 세계의 현실과 거기에 놓인 우리의 실존이 겪는 첨예한 딜레마를 가로지르는 질문의 책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바라는 자신의 자리(제자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기에 자리는 질문이 된다. 결여된 것은 과잉으로 존재하며 주어진 자리에서 우리는 늘 흘러넘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와 잘 맞는 세계라는 환상에 머물 때보다 척박한 자리에서 한계 밖으로 흘러넘치는 자신을 자각할 때 실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다시, 우리는 자리의 존재이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존재인 것이다. 자리 옮김의 사유의 거의 모든 측면을 섬세히 다루면서, 위압적인 훈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듯 대화를 제안하는 그녀의 철학적·문학적 에세이가 존재의 자리를 찾는 여행에서 길 잃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독자들의 손에 가닿기를 바란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자리의 존재들이다. 그런데...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자리의 존재들이다. 한자리에 있으면서도 더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 땅속을 파고드는 식물도 마찬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은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더 나은 생존의 자리를 찾아 기꺼이 이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 역시 유한한 몸을 지니고 있기에 공간과 장소가 필요하지만, 인간 실존의 경우 자리는 단순한 생존의 차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회 내 존재로서 우리는 어딘가에서 무엇으로 자리 잡아야 하고, 더불어 영혼을 지니고 있기에 역할과 정체성을 차지해야 한다. “뿌리 내림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인간 영혼의 욕구”라는 시몬 베유의 말처럼, 인간은 마음 깊은 곳에 실존의 깊이와 충일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에 닿고자 하는 포기할 수 없는 갈망과 고뇌를 지니고 있지만, 진정한 뿌리 내림을 위해서 뿌리 뽑힘을 감수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한마디로 자리의 문제는 우리의 의지를 벗어난 것으로 느껴지고,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고, 자산이 아니라 외부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대부분의 우리는 어릴 적부터 “제 분수를 알아야” 하고 “현재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다. 안 그러면 지금의 자리에서도 내침을 당하고 불행해질 테니까. “당신이 사는 아파트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는 광고 문구를 삶의 격언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그래서 자리를 둘러싼 전쟁은 현재진행형이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치열한 전쟁터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자리(장소)는 중립적이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인간에게 자리는 지리적·계층적·사회적·정치적 자리이며, 위치에 따라 의식의 내면의 색조가 달라지고 부침을 거듭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젠더·계급·인종·종교 등을 이유로 배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얻기 위해 맞서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적·정치적 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자리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 수 없다. 정치적 유토피아는 평등한 자리의 분배를 약속할 뿐 인간 존재의 다양한 차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는 없다. 자리가 인간의 실존과 일치한다는 생각은 환상이고 일종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은 과거에는 계급의식을 일깨우는 언명이었지만 이제는 자본주의의 명제로 더 빈번히 사용된다. 앞서의 아파트 광고처럼. 질서 정연하고 계획된 세계에선 자리가 개개인의 인격과 가치를 온전히 반영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인간 존재에 대한 몰이해이고 착각이다. 우리는 삶이 유지되기를 바랄 뿐 아니라 삶이 영위되기를 바란다. 어떤 자리에 있다고 해서 자신이 제자리에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제자리에 있다”는 감각은 실존의 여러 요소가 만들어 내는 일치의 음악 같은 것이어서 오로지 자신만이 알 수 있다.
우리는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자리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그 질서에 갇힌다는 생각으로 불안해한다. 사회적 목록의 일원이라는 점에 안도하면서도, 하나의 계열에 기입된다는 것은 우리가 대체 가능하다는 의미한다는 사실 앞에서 경악한다. “이 세상은 당신을 위해 어떤 공간도 만들지 않았다”고 위협하며 언제든 인간은 대체될 수 있는 노동 상품이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현실에서 실존의 충일함을 희구하는 제자리 찾기는 가능할까.
모든 순간을 예측할 수 있을 때, 삶의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될지 정해져 있을 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게임을 하고 싶을까?
우리는 안정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곳, 범할 수 없는 곳, 준거점이자 출발점, 근원이 되어줄 장소를 염원하지만, 이런 장소들은 이 세계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기다리는 자리, 우리에게 맞춤한 제자리, 그런 건 애초에 없다. 고정된 자리는 실상 없으며, 안정적 자리라는 환상은 끊임없이 전치되고 응축되기를 반복한다. 우리를 기다리는 건 사회가 설정한 분류법에 따라 할당한 자리들이다. 모두가 “제자리를 지켜야”하는 “정상적인” 세계에는 폭력성이 내장되어 있다. 자신만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기에 자리(공간)는 질문이 되고 의심이 된다. 우리는 이 세계의 질서에 기입되기 위해 어떤 왜곡이 필요했을까? 어떤 부자연스러운 연기와 책략이 필요했을까? 우리는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에 고정되어 오그라들고 줄어들기를 강요받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을 때, 더듬거리는 실존의 굴욕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잘 맞는 세계라는 환상에 머물 때보다 냉담하고 척박한 자리에 있을 때 우리의 실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며 그때 비로소 자리게임의 대상이 아닌 타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한자리에 고정되지 않고 떠나려 하는가? 그런 의문을 가질 때 우리는 스스로를 퍼즐의 작은 조각으로 생각했던 자신에 대한 의문이 싹튼다. 자신의 자리에서 호흡이 불편해지고 자신이 멜로디 속 잘못된 음표 하나, 기계장치에 끼어든 모래알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떠나려는 사람들은 어렴풋하지만 거의 육체적인 느낌으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음을 안다. 이 몸짓은 일견 잔인한 것이지만, 그것은 존재의 이기심을 넘어선다. 평온함과 친숙함 속에 웅크린 채 그에 안주했던 자신으로부터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축소된 세계의 제한된 실존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향해 발을 내딛으려 할 때, 그는 자리 옮김이 가져올 공간의 시련들을 감수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리 옮김이 가져올 위험을 예감한다. 그들은 표류하고 좌초하고, 계급 횡단자나 이주자처럼 이중 삼중의 고립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그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을 두려워할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꿈속에 있을 때 깨어 있을 때보다 더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이동하는 법을 잊고 있었을 뿐, 우리가 자리의 존재라는 것은 이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재전유하기 위해서. 제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행운과 끈기,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삶의 무질서와 화해하고 받아들일 때 새로운 유쾌한 조합과 비옥한 충돌들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현실의 자리게임의 체스판에는 우리가 놓치는 움직임들이 있고, 말들을 쓰러뜨리는 돌풍이, 말들을 쓸어가 버리는 분노가 있다. 그러나 앞으로, 대각선으로, 혹은 뒤로 이동하는 자리 옮김이 없다면 게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회나 갈림길이 없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안에 방을 지닌다”고 카프카가 말했을 때, 그 방(자리)은 그 자체로 이러한 내적 운동들, 일시적인 충동, 집착의 동요와 충격을 모두 담는 곳이 아닌가?
철학이 시작되는 자리―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제자리는 어떻게 발견되는가?
우리는 어떤 사회적 공간에 적응하지 않고서는 제자리를 찾을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할당된 자리에서는 제자리에 있다고 느끼지 못하며,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 자리를 바꿔 나간다. 결국 자리의 문제는 자리 옮김의 문제인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클레르 마랭의 철학 에세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오늘 세계의 현실과 거기에 놓인 우리의 실존이 겪는 첨예한 딜레마를 가로지르는 질문의 책이면서 바로 이 자리 옮김의 사유를 시작하기 위한 단서들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첫 테마에서부터 그녀는 정착민과 유목민을 나누는 것은 가짜 양자택일이라고 말한다. 뿌리 내림과 자리 옮김은 기계적으로 분리되거나 따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긴장 속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여정이며, 머묾도 그 여정을 구성하는 정서·사회·지리·정치적 기착지일 뿐이다. 실제로 우리는 결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 위를 걷는 존재이며, 사이의 존재여서 언제나 두 세계 사이, 두 시간성 사이, 자기 자신이 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이 존재하고, 존재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표류와 전복을 겪으면서 미지의 땅에 좌초하는 순간에조차도 자기 자신에 대해 발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세계에 온전하게 머물 수 있는 나만의 자리는 존재하는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제자리는 어떻게 발견되는가? 우리는 영역의 논리, 소속의 논리로 구조화된 공간 안에서도 제자리를 찾아내야 한다. 분별 있게 처신하라고 끊임없이 요구받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러한 요구에 반하여 자신의 참된 차원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한다. 진정한 뿌리 내림을 위해서 뿌리 뽑힘을 감수하면서. 그것이 누구의 요구도 아닌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요구이기 때문에. 자신의 실존이 연주하는 일치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와 자신이 진심으로 화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자리에 있다는 것”의 의미를 사유하는 여행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자리 옮김의 사유’가 지니는 거의 모든 차원―사랑과 접촉, 관계의 문제까지를 포함하여―을 세심하게 검토하고 있는 이 빼어난 철학적·문학적 에세이가 각박한 세계에서도 자신만의 자리를 찾기를 희구하면서 동시에 그 자리가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독자들의 손에 닿기를 바란다.
정착민과 유목민을 나누는 것은 가짜 양자택일이다. 왜냐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여정이며, 머묾도 그 여정을 구성하는 정서·사회·지리·정치적 기착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결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 위를 걷는 존재다. … 우리는 사이의 존재여서 언제나 두 세계 사이, 두 시간성 사이, 자기 자신이 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나만의 자리를 꿈꾼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만의 장소, 적응할 수 있는 질서, 확고한 자리들이 있는 안전한 현실을 꿈꾼다는 것일까? 우리는 친숙함의 양면성을 안다. 그것은 차이의 결핍, 반복, 변화 없는 정체성으로 우리를 메마르고 빈곤한 존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확하게 대립되는 두 가지 도식이 존재한다. 하나는 정체성의 초석이자 기반이라 여겨지는 현실·상징적 장소들로 여기서 자신을 하나의 계보, 뿌리 속에 있다고 여기며, 좌표를 잡고 안심시켜 주는 소유물을 지닌다고 여긴다. 반대로 앙리 미쇼가 그랬던 것처럼, 짐도 집착도 없는 가벼운 여행자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실존 안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적절한 지적처럼 “바깥에 갇힐” 위험성도 있다. 때때로 “감옥은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우발성과 차이가 끼어들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는 의미다. 핀으로 고정시켜 놓은 세계에서는 놀랍거나 예기치 못한 일을 위한 자리가 없다. 촘촘하게 짜인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분류 불가능하지 않으며 진실로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떤 목록에도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유일무이한 것은 세상에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소름 끼치는” 일이다. … 목록에 기입된다는 것은 우리가 대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클레르 마랭
프랑스의 철학자, 에세이스트, 소설가다. 그랑제꼴 준비반의 철학 교사이며, 파리고등사범학교의 협력 연구자로도 활동 중이다. 스물다섯 살에 자가면역질환을 진단받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질병에 대한 에세이와 소설을 썼다. 독자 개개인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그녀의 글은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서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독자들에게 지지를 받으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마랭의 작업은 하나의 단순한 개념에서 출발하여 사적인 영역부터 정치적인 사안까지 삶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는데 그 과정에서 활용하는 방대한 철학·문학 텍스트는 사유에 선명한 구체성과 깊이를 부여해 준다. 저서로 소설 『나를 벗어나』(2008), 에세이 『질병의 폭력, 삶의 폭력』(2008), 『질병, 내밀한 재앙』(2014), 『계승』(2018), 『우리는 무엇이 될 것인가?』(2018), 『단절(들)』(2019), 『내 몸은 정말 내 것인가?』(2020), 『시작: 어디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2023) 등이 있다.
목차
제자리라는 문제
도마뱀 놀이, 볕드는 자리에서 빈둥대기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탈주하기
한자리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
뿌리내리기
줄어드는 삶
공간의 시련
왕국 없는 여왕
제 목소리 찾기
불손한 사람들
침입의 논리
자리의 곤경
“진정한 장소”라는 것
욕망의 불협화음
표류와 흘러넘침
이중생활
내 안에 자리 만들기
안의 공간
내 몸에 깃들어 살기
바로 여기
일곱 가족 게임
가지를 잘라내기
의자 놀이
누락된 자리
자리를 발명하기
유령들
실향민들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어쩌다 있게 된 곳
철새들
소리의 원
자리 옮김을 사유하기
무엇을 위한 자리인가?
책의 여백에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