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걷기 전까지는, 어떤 이야기도 시작되지 않는다
정기현 첫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출간읽고 나면, 무언가 하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야기는 멀어진 친구에게 연락해 그동안 말하지 못한 감정을 털어놓고 싶게 한다. 또 어떤 이야기는 허기를 자극하며 당장 냉장고를 열고 이야기 속 음식처럼 뭔가를 만들고 싶게 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우리가 한없이 미뤄온 고백과 용서, 또 수용과 수긍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그렇다면 정기현의 소설은 무엇을 하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일까? 단연, 걷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
그의 소설은 운동화 끈을 조여 묶고 물병을 배낭에 챙겨 바깥으로 향하도록 이끈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권태로워진 길을 새로운 마음으로 탐색하도록 만든다. 그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자주 걷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걷는다는 건, 오래 누워 있던 마음을 일으켜 세워 다시 움직이고 살아나도록 만드는 일. 그러니까 정기현의 소설은 무기력에 휩싸여 멈춰버린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
2023년 가을 단편소설 「농부의 피」로 데뷔한 정기현의 첫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산뜻한 두 발의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2024년 가을 문학과지성사가 주관하는 ‘이 계절의 소설’에 선정되고, 2025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단편소설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이미 읽어본 독자라면, 이러한 설명을 단숨에 이해하리라. 걷는 동안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물결, 그리고 길에서 마주치는 우연한 흔적들이 특유의 리드미컬한 문장에 실려 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따라가다보면, 우리도 두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걸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누워 있던 마음을 슬쩍 일으켜 세우는
웃긴데 왠지 슬픈 여덟 편의 이야기“나는 점점 희미해지고 발에서만 자세하다.”
큰 발이 주는 묘한 슬픔 「빅풋」
기은은 중학교 때 친구 새미의 실종 소식을 듣는다. 키는 작지만 발만큼은 290밀리미터로 무척 큰 새미. 기은은 새미네 신발장 안에서 거대한 신발을 본 뒤로 자꾸만 새미가 떠오른다. 새미가 남긴 일기를 읽으며 두 발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시간. 큰 발자국은 어딘가에 남아 있지 않을까? 그걸 따라가면 새미가 나타나지 않을까?
“드디어 내게도 특별한 일이 생겼구나 싶어서요. 호들갑 떨면 모든 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고요가 깨지는 순간 「발밑의 일」
소인(小人) 새미는 임준섭의 집에 몰래 숨어든다. 이 집의 고요가 마음에 든다. 인간에게 들켜서는 안 되지만, 그에게는 정체를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새미. 저기, 하고 그를 부르고, 손으로 자신의 몸을 살짝 쥐어보게 허락하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차분하기만 하다. 마치 이 고요가 깨져 기쁜 사람처럼.
“그러자 마음에 슬픔이 깃들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 「슬픈 마음 있는 사람」 동네에서 발견되는 ‘김병철 들어라’ 낙서들, 여기엔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 걸까? 기은은 산책을 하다가 어떤 날엔 한국오카리나박물관을 발견하고, 또 어떤 날은 동네 노인들로부터 김병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때마다 기은은 준영에게 이 모든 걸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되는데. 그건 어쩐지 슬픈 마음.
“작은 멧돼지도 이어 새미를 등에 태웠다. 둥실둥실 구름에 실려가는 기분이었다.”
여름방학에 꾸었던 꿈 「검은 강에 둥실」 여름방학을 맞아 할머니 집에 간 새미. 하지만 할머니는 나름의 루틴으로 바쁘고, 새미는 무료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새미는 할아버지 무덤가에서 말하는 멧돼지들을 발견한다. 그 멧돼지 등에 타고 무덤 아래로 내려가는 길. 예쁜 옷을 입고 곱게 화장한 할머니와 키스하는 외국인 뱃사공 카론. 훗날 새미는 이 여름을 어떻게 기억할까.
“파쿠르가 파쿠르 울 때 파쿠르를 하면 원하는 세계에 떨어질 수 있어요.”
뻐꾸기와 파쿠르의 상상력 「마음대로 우는 벽세계」고장난 뻐꾸기시계를 챙겨 공원에 간 기은. 파쿠르를 하던 아이들 무리가 그에게 다가와 말한다. “오, 시발. 맞잖아. 파쿠르잖아.” 아이들은 시계가 파쿠르, 하고 울 때 파쿠르를 하면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며 시계를 빌려달라고 조른다. 문득 아빠의 큰 슬픔을 떠올리는 기은. 그렇다면 어디 한번 해볼까?
“맛있는 흙……”
운명은 발견되기를 기다린다 「농부의 피」골목길을 걷다가 비옥한 땅을 발견한 승주. 그 순간 그는 운명을 깨닫는다, 자신에게 농부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흙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보면서도, 물이 스며드는 정도가 참 적당하다며 흡족해할 만큼 ‘천생 농부’인 승주.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에게 놀라운 일들이 찾아오는데……
“음음…… 어디로부터 내려온 멜로디일까 이것은?”
이 변화가 마음에 들어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교복 재킷 주머니, 치마 주머니, 배낭 앞주머니, 학교와 독서실과 방 책상에 총 여섯 개의 스톱워치를 넣어두고는 매일 공부 시간을 엄격히 셈하는 승주. 외고를 목표로 하던 그에게 노는 아이들 ‘버들치’ 무리가 접근해온다. 그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 때마다, 잠을 줄여 공부 시간을 유지하자고 다짐하는 승주. 어느덧 찾아온 외고 입학 시험의 날!
“저렇게 걷는 것을 ‘산책’이라고 하는 거야.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동네 이곳저곳을 살피며 시간을 보내는 거란다.”
하늘길에서 만난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바람 부는 날」재건축으로 펜스가 쳐진 아파트 단지. 승주는 그 주변을 빙 둘러 출근하는 대신, 그 한가운데로 걸어보기로 한다. 단축된 출근 시간! 거센 바람이 부는 단지 길을 통과해 사무실에 도착한 승주의 어깨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졸고 있다. 또 어느 날엔 소소한 불운이, 또 헛된 희망이…… 다채로운 일들이 펼쳐지는 승주의 출근길.
“귀여운 것 같아요. 뭔가 엉뚱한 것 같기도 하고.”
첫 소설집을 읽는 일은 친구를 사귀는 일과 닮아 있다여덟 편의 소설에는 각기 다른 기은과 새미, 승주가 등장한다.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이 서로 다른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까닭에, 한 편 한 편 독특한 세계를 펼쳐 보이던 소설들은 슬그머니 연결된다. 실종된 큰 발의 새미가 소인이 되어 임준섭의 집에 숨어드는가 하면, ‘김병철 들어라’ 낙서를 찾으며 산책하던 기은이 파쿠르 무리에 둘러싸여 파쿠르를 해보자고 결심하기도 한다. 초콜릿 빛의 흙을 맛보던 승주는 어쩌면 스톱워치를 여섯 개씩 갖추고서 공부하던 십대 시절을 보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한 편씩 읽어나가다보면 어느새 여덟 편 전체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빅풋」 속 새미에게 향하던 “귀여운 것 같아요. 뭔가 엉뚱한 것 같기도 하고”라는 말은, 정기현의 소설 세계 앞에 옮겨두어도 좋을 만큼 자연스럽다. 귀엽고 엉뚱하다는 칭찬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푹 빠져버렸다는 고백. 태연한 표정으로 어딘가 이상하지만 틀림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전하는 소설가에게 그 고백을 건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제 막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신인 작가의 첫 소설집을 읽는 일은 친구를 사귀는 일과 닮아 있는 것 같다. 떨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그 순간이 그저 좋기 때문에. 그를 좀더 알고 싶고, 좀더 다가가고 싶기 때문에. 그러니까 친밀해지고 싶은 마음 말이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읽고 나면, 어느새 정기현이라는 작가와 슬며시 친구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이후에도 한결같이 다정하게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될 만큼.

삶과는 영 무관해 보이는 일을 계속해나가는 사람이 반드시 큰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다. 그따위 일을 왜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세요? 묻고 싶게 만들 만큼 많은 것을 감수하고,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시간을 쏟아붓고, 벌써 현실이 아니라 천국에 온 것처럼 구는 이들. 집 앞 공원 벤치에는 사시사철 하루에 두 번씩 비둘기들에게 식빵을 잘게 찢어 던져주는 노인이 있고, 공원에 모인 다른 노인들은 그 노인이 별종이라며 다 들리도록 빈정거리고, 그럼에도 그 노인은 제임스, 닉, 멀리, 리사, 사마천, 강물, 준지 너는 아까도 먹었는데 또 이렇게 앞으로 오면 어떡하나…… 비둘기들을 소리 내어 호명하며 그날의 몫에 몰두한다.(「빅풋」)
기은은 다시 홀로 벤치에 남아 오늘의 모험을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거여고가교 아래 서늘한 공기에 몸이 식자 머릿속 뒤죽박죽이었던 장면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기은은 오늘 모험을 나선 목적이 김병철의 낙서를 밝혀내는 데 있지 않고 준영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 함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이 출발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연달아 알게 되었는데, 그러자 마음에 슬픔이 깃들었다. 준영을 뒤따라 교회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왠지 그럴 수 없었고 이것은 슬픈 마음이었다. 기은은 자신이 비로소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된 것에 아늑함을 느끼면서도 슬픈 마음을 가지게 된 덕분에 슬픔 속에 한참을 머물다 자리를 떴다.(「슬픈 마음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