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태초에 I가 있었다. 먹고사느라 이런저런 일을 겪고,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대끼다 보면 사회인으로서의 매너와 스킬이 점차 숙련된다. 이른바 후천적 E, 생계형 E로 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나 원래 되게 낯가리는데? 나 원래 말수 없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마음속 항변은 생계형 E로 살아가는 이 땅의 I들이 '어른의 삶을 살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짠내 나는 고군분투를 해왔는지 고스란히 보여준다.친구가 왜 이렇게 없냐는 질문을 취업 면접에서 받은 사람, 6명 이상 모이면 누굴 보고 말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사람, 불편한 사람과 아이스라떼를 마시면 꼭 탈이 나는 사람, 이 책의 저자 황유미는 그런 사람이다. 내향인 중에서도 상위 그룹에 속하는 이런 사람이 광고회사에 들어간다. 각양각색 대문자 E들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곳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 생각만 해도 벌써 피로가 몰려온다. 그녀의 미래는 우리의 짐작대로다. 회사 안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인간관계의 고충을 고스란히 겪는 동안, 일과 관계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찾기 위해 홀로 분투하다 5년 후 회사를 떠난다.회사는 온갖 특이한 이력을 지닌 다재다능한 인싸의 각축장이었고, 나는 어쩌다 핵인싸의 파티에 끌려온 아싸처럼 어색함을 느꼈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한 이래로 언제나 혼자 노는 게 가장 재밌었던 나 같은 내향인이 낄 만한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닌가, 라는 근원적인 의심을 한 채 시작한 회사생활이었지만 새로운 조직에 적응하느라 처음 2년 정도는 고민할 틈도 없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친구가 많지는 않아도, 아예 없지는 않았던 학창 시절처럼 회사에서도 비슷한 애들을 찾아 어울리니 외롭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혼자가 익숙한 내향인이라고 해서 회사생활에 딱히 어려움을 겪거나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었다. 철석같이 그렇게 믿었다. 문제는 똑같은 환경에서 같은 일을 해도 자기 성향에 맞는 사람들은 더 오래 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일단은 하겠는데 앞으로는?지금은 괜찮지만 5년 후, 10년 후까지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불안이 점점 더 커졌다.-'친구가 별로 없네요?' 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화충격을 느꼈다. 어떻게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얘기를 하는 거지? 약점이 될 법한 이야기마저도 점심 저녁으로 거리낌없이 털어놓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화들짝 놀란 마음을 감추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러셨군요. 맞죠. 힘들겠어요. 그 시절 나와 관계를 맺었던 이들은 사람이 아닌 자동응답기를 앞에 두고 혼잣말을 쏟아내고 있다는 언짢은 기분을 느꼈을 수도 있다. 어떤 동료는 "당신은 로봇입니까?"라는 뼈 있는 말로 놀리기도 했다. 상호작용이 필요한 대화에서 자주 미끄러지는 기분을 느끼다 보니 동료와 가장 많은 대화가 오가는 점심시간마저 달갑지 않았다. - '그런 솔직함은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중에서
업무상 이유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만남은 피할 수 없으니 내가 먼저 장소를 제안했다. 나에게 익숙하면서 편안한 환경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약속 장소를 정하는 일은 성가시다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잘 아는 곳이 있는데요"라는 말로 운을 떼면 상대는 좋아했다. 낯선 환경에서 불편한 사람과 대면할 때마다 몸이 먼저 반응해버리는 체질 때문에 곤란한 일도 많았지만, 나에게 불편한 요소를 하나라도 제거하려고 노력하면서 아등바등 사회생활의 수명을 연장해갔다. 사람이 불편하면 장소와 메뉴라도 내 마음이 편안한 쪽으로 골랐고, 소화하기 힘든 메뉴를 먹어야 하는 날엔 대화를 주도하고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면서 음식을 덜 먹었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 끝에, 불편한 사람과는 굳이 관계를 이어가려 노력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단순한 이치를 깨달았다(그걸 이제야!). -'사회생활이란 불편한 사람과 밥 먹는 것'
작가 소개
지은이 : 황유미
종합광고대행사 제일기획에서 5년간 AE로 일한 후 소설집 《피구왕 서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집에 가고 싶어지는 내향인. 대체로 혼자 일하지만, 종종 왁자지껄한 팀플레이의 순간을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