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프랑스 혁명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과 처형에는 1793년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단 사흘이면 충분했다. 그는 정식으로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사형이 확정된 상태였다. 이것은 물론 왕비의 재판인 동시에 외국인 여성의 재판이었고, 한 여성과 어머니의 재판이기도 했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이 왜 여전히 인구에 회자될까? 무엇보다 당시 유럽의 분위기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왕과 왕비를 위시해 숱한 귀족과 공포정치를 이끌던 로베스피에르마저 단두대에서 공개 처형을 당하고 그토록 강고하던 신분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국민 주권 시대’를 연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주권이 급작스럽게 왕에서 국민으로 넘어가는 대혼돈의 시기에 ‘왕비’라는 태생적 신분 때문에 더 오래 구세계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연으로, 공소인 푸키에 탱빌과 재판장 에르만 등이 조연으로, 그 외 화가 샤틀레, 구두장이 시몽, 신문 발행인 에베르 등의 주요 배심원·증인들과 죽을 때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스웨덴 귀족 페르센부터 왕비의 가족과 시녀들, 단두대의 처형 담당자 앙리 상송까지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한 편의 비극적 시대극이다.
출판사 리뷰
단 사흘 만에 끝나버린 세기의 정치 재판, 그 진실을 찾아서!
과연 지금 우리 사회의 재판은 얼마나 온당하고 공정한가?
프랑스 혁명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과 처형에는 1793년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단 사흘이면 충분했다. 그는 정식으로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사형이 확정된 상태였다. 이것은 물론 왕비의 재판인 동시에 외국인 여성의 재판이었고, 한 여성과 어머니의 재판이기도 했다.
에마뉘엘 드 바레스키엘은 이 작품에 한 편의 연극을 보듯 매우 입체적인 시각을 부여했다. 그는 출처에 대한 비판을 거치지 않은 자료에는 절대로 의존하지 않겠으며, 스스로 발굴한 기록을 꼼꼼히 분석하는 과학적이고 진지한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문학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려는 열망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얻은 권위에 기대어 작가로서 인간 본성의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을 냉혹하게 조명한다.
―미셸 드 재게르Michel De Jaeghere(언론인, 작가), 『르 피가로 이스투아르Le Figaro Histoire』
이 정밀하고 몽환적이며 훌륭한 문체의 걸작을 읽으면서 향수에 젖을 틈은 없다. 우리는 왕정복고를 꿈꾸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주문에 걸린 듯 과거를 거닐 뿐이다.
―프랑수아 쉬로Franois Sureau(프랑스 작가, 변호사,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라 크루아La Croix』
탈레랑과 푸셰의 전기를 쓴 저자는 정확하고 강렬하며 몽환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계몽주의의 유토피아가 공포정치의 현실 속에서 흔들리고, 두려움에 질린 한 여성이 멍하니 어스름한 곳을 바라본다. ―로랑 르미르Laurent Lemire(언론인, 작가), 『옵세르바퇴르Observateur』
◆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과 처형으로 살펴보는 인간의 본성과 재판의 본질
세계 근대사의 가장 큰 변곡점이었던 프랑스 혁명기 당시의 혁명법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현재 우리 관점에서는 다소 놀랍게도 당시에 이미 배심원 제도가 있었고 재판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그 배심원 대다수가 판사와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는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집에서도 두려움을 느꼈다. 웃으면 공화국의 패배를 기뻐한다고 비난받았고, 울면 공화국의 성공을 슬퍼한다고 비난받았다. 결국 아무 때나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음모를 찾아냈다”는 증언이 증명하듯, 이 책의 배경이 된 시기는 “아직 공포정의 한밤중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 초저녁에 접어들고 있었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이 왜 여전히 인구에 회자될까? 무엇보다 당시 유럽의 분위기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왕과 왕비를 위시해 숱한 귀족과 공포정치를 이끌던 로베스피에르마저 단두대에서 공개 처형을 당하고 그토록 강고하던 신분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국민 주권 시대’를 연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주권이 급작스럽게 왕에서 국민으로 넘어가는 대혼돈의 시기에 ‘왕비’라는 태생적 신분 때문에 더 오래 구세계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연으로, 공소인 푸키에 탱빌과 재판장 에르만 등이 조연으로, 그 외 화가 샤틀레, 구두장이 시몽, 신문 발행인 에베르 등의 주요 배심원·증인들과 죽을 때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스웨덴 귀족 페르센부터 왕비의 가족과 시녀들, 단두대의 처형 담당자 앙리 상송까지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한 편의 비극적 시대극이다.
◆ 동전의 양면과 같은 혁명, 그 소용돌이 속 비극에 휩쓸린 운명의 공동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 에마뉘엘 드 바레스키엘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귀족의 후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시대착오적인 왕당파의 관점에서 쓰였으리라는 선입견을 갖고 읽으면 안 된다. 저자는 프랑스 고등연구실습원의 교수로 임명되기 8년 전인 1991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고베르 대상을 받으며 일찍부터 큰 기대를 모은 역사학자이자 전기작가로서 프랑스 혁명부터 19세기 전반의 해박한 지식을 제공해온 인물이다. 그는 어떤 이유로 이 책을 썼고,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오늘날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혁명의 시작과 과도한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 시기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혁명의 빛나는 면과 어두운 면을 보여주면서도, 그것들을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중략) 1793년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이곳에서, 두 사회, 두 가지 표상체계, 두 세계가 축소된 형태로 맞붙어 기이한 싸움을 벌였다. 왕의 재판보다 더욱 두드러진 모습이었다. 그 적대자들은 더 분명하고, 더 명확히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혁명과 반혁명.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주권, 두 개의 정당성, 또한 적용되는 대상에 따라 그 의미가 계속 변하는 조국, 배신, 미덕, 음모라는 단어들. 서로 완전히 대립하고, 결코 화합할 수 없는 두 세계, 겉보기에는 공존하고 대화하며 접촉하지만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두 세계. 그러한 자폐증은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구들의 죽음, 그의 고발자들과 판사들의 죽음. 나는 이 비극적인 운명의 공동체에 마음을 빼앗겼다.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시체 위에 우리의 공화국을 세웠고, 그러고 나서 민주주의를 세웠다. (352~353쪽)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글은 많지만 그의 재판을 다룬 글은 별로 없다. 19세기 초반에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성스럽게 다룬 연구가 많이 나왔으며, 거의 전적으로 그의 관점에서만 다루었다. 그러한 한계를 인식한 저자는 당대 재판 기록과 특히 미공개 방청 기록은 물론 후대에 발굴된 편지까지 광범위한 자료를 속속들이 조사, 발굴, 취합하는 역사가의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매우 상세하고 균형 잡힌 당대의 역사 한 축을 입체적으로 완성해냈다. 그 성과로 프랑스 유수의 문학상과 전기작가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 “혁명은 평등이 특권층에 거둔 승리일 뿐만 아니라
여성 세계에 대한 남성의 복수이기도 했다.”
미국 외교관 거버너 모리스는 일찍이 루이 16세의 무기력함을 강조하면서 ‘완전히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모멸적인 평가를 내린 반면, (궁중에서는 약하다는 비판적 표현인) ‘선량한’ 왕과 달리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왕비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789년에 그가 조우한 프랑스는 ‘여성의 나라’였다. 당대 주요 인물 중 하나인 탈레랑 또한 혁명 직전에 모든 곳에 여성이 존재했음을 강조하며 여성이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관습, 언어, 취향, 심지어 정치까지도 지배한다고 말했다. 또한 파리의 살롱에서 젊은 여성이 정부의 결정이나 가장 복잡한 행정 운영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오늘날 우리는 양성평등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때는 어떤 시대와도 닮지 않은, 슬프고 무관심하며 절차적인 시대였다”라고 부연한다. 그렇게 자유로운 나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1792년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으며, 이듬해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계속 패배하자 왕비는 감옥에 갇힌 채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죄인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암노새, 사악한 오스트리아년, 희생자의 피로 흠뻑 적신 오스트리아의 흉악한 암호랑이, 오스트리아 암탉, 적자 부인 등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온갖 욕설과 도를 넘은 헛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역사상 어느 시기에 어느 여자도 이만큼 많은 증오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그가 말하거나 행하거나 만지는 것은 모두 미움을 받았다”, “이러한 공격의 뒤에는 왕에 대해서는 품지 않았던 질투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루이 16세는 군주제를 상징했다는 잘못밖에 없었던 반면, 왕비는 그 범죄의 화신이었다”라고 진단한다. “결국 혁명가들이 보기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진정한 범죄는 여성의 역할과 위치를 넘어 남성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당시의 여성 혐오가 얼마나 강고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들려준다.
여성의 성격은 신경질적이라서 쉽게 ‘과잉 흥분’에 빠지며, 그래서 자유와 공공업무에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실수와 무질서를 뜻한다. 여성의 도덕적 교육은 “거의 성과가 없다.” 이러한 생각은 혁명기에 나온 수많은 문헌 속에 반복해서 나타났다. 어떤 언론인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날마다 말하듯이, 사실상 프랑스 여성의 풍습은 아직까지 혁명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거나 잠잠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잠재적으로 반혁명적이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은 샤를로트 코르데, 롤랑 부인,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 같은 여성의 재판 사이에 있었다. (230쪽)
◆ ‘광범위한 사회적 전복작전’ 같았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
여러 문헌 외에도 왕비를 천박하고 외설적으로 묘사한 많은 그림에서는 혁명기 남성이 왕비를 지배적이고 전복적이며 위험한 여성으로 보고자 했던 고정관념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여성 혐오는 오래도록 아물 수 없는 상처였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러한 성향을 가진 배심원들과 재판장 앞에 서야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은 여느 재판과 달랐다. 단순히 왕비의 재판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사라져가는 세계와 폭력 속에서 새로 태어나고 있던 세계, 이처럼 아주 이질적인 두 세계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기회이자 순간이었다. 두 세계는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대를 제거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었으며, 오랫동안 서로 화합할 수 없는 합당한 이유를 확립해왔다. 한쪽에는 공화국이, 다른 쪽에는 왕정, 왕실, 관습, 풍습이 있었다. 이 재판은 또한 한 여성의 재판이며, 한 어머니의 재판이기도 했다. 끝으로 한 외국인의 재판이었다. 이 재판이 어떤 현실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상상력의 현실이다. 그래서 이 재판은 독특한 것이었다. (28쪽)
모든 재판은 형편없는 증거를 가지고 진행되었으며, 합당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증인들은 자신들의 과거 신분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찾았다. 증인과 배심원들은 “몇 달 만에 무의미하고 평범한 존재에서 벗어나 수천 명의 동료를 살리거나 죽일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한때 왕비였던 여성을 단지 판화 속 모습으로만 보았을 뿐이며, 그와 자신들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컸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구하거나 처형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 재판의 의미이기도 했다. 평범한 소규모 자영업자의 복수, 비범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것, 오래도록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을 일상적인 것이 누르고 승리하는 복수였다. (중략) 그들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미처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막중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을 때 얼마나 황홀했을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162쪽)
◆ 역사상 성범죄 재판의 최초 사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은 시작부터 이미 비범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공녀로 태어난 데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기에 타고난 귀족적 몸집과 자세의 우아함, 드높은 자존심, 게다가 용기라는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명예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혁명기의 사람들은 아주 일찍이 왕비의 힘과 완고함을 예상했으며, 그를 혁명의 장애물로 여겼다. “왕 곁에는 한 남자만 있는데, 바로 그의 부인이다.” 그 유명한 미라보 백작이 한 이 말을 모두 알고 있었고, 결국 혁명 세력은 왕비를 희생자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혁명이 시작된 이후 4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받으며 살았다. 그들은 1789년 10월과 1792년 6월 20일에 튈르리 궁을 향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노골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찾아 죽이려 했다. “오스트리아년, 어디 있느냐? 그의 머리, 머리를 자르자!”
1792년 8월 23일에 루이 16세와 함께 탕플 탑에 갇힌 후 7개월이 지나 콩시에르주리 감옥으로 이송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과 딸의 끔찍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바로 재판정에서 어머니라는 역할마저 부정당하고 여덟 살짜리 아들과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참혹한 고발을 직접 들을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여성의 명예를 더 훼손하고자 그의 판사들은 어머니라는 역할마저 공격하는 사악한 생각을 떠올렸다. (중략) 혁명가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건드리는 것은 왕실 혈통의 신성함을 건드리는 것이며, 신성성과 혈통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그와 함께 다시 한 번 왕정을 처형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에 엄청난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파리 신문 『뒤셴 영감』의 발행인이었던 에베르의 참혹한 고발로 이어졌다. “두 여성[왕비와 고모]이 아이[왕세자]를 가운데 재우는 일이 많았고, 그곳에서 가장 광적인 방탕 행위를 자주 저질렀으며, 카페의 아들[왕세자]이 말한 바로는 모자간에 근친상간 행위가 있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에베르는 한술 더 떠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들과 잔 것은 단순한 쾌락 때문이 아니라 ‘육체를 흥분’시켜 어린 아들을 더 잘 통제하려는 사악한 정치적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라는 추악하고 끔찍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도대체 뇌가 얼마나 병들었으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공격해서 그를 공격하려는 악마 같은 계략을 꾸밀 수 있는 것인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중략)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피고인을 똑바로 보았을까? 적어도 충격적이고 끔찍한 이야기들을 면전에서 쏟아놓는 용기는 ‘죽일 놈들salauds’의 변명거리일 뿐이다.”
한편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눈물을 보이다가 간신히 이렇게 답했다. “이 끔찍한 일들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지 않을 어머니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반인륜적 누명까지 뒤집어써야 했으며, 완전히 엉터리 같은 단 사흘간의 재판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검은 전설’의 피해자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처형 전부터 ‘하얀 전설’도 따라 다녔다. 바로 눈앞에서 목숨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용기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발견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형장에서 흘린 그의 피를 필사적으로 손수건에 적시려던 사람들은 그를 순교자로 여겼다. 그러나 전설은 전설일 뿐, 마리 앙투아네트가 세상을 뜬 지 232년 후의 지금 우리는 그 당시 상황과 진실을 직시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과 사회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로 삼으면 족할 것이다. “비극은 언제나 드러나지 않는 것의 주름 속에 숨어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주명철 교수는 이 책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은 과연 얼마나 합법적이고 정당했을까?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렇게 묻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여느 시절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공포정 시기에는 더욱, 정치가 법을 대체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이야말로 훌륭한 사례다. 에마뉘엘 드 바레스키엘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입구로 삼아 우리를 혁명법원으로 이끌어 그 당시 법원의 작동방식을 보여준다. 시대적 한계 때문에 빛이 부족해서 더욱 암울한 감방과 법정의 분위기, 거기에 끌려다니는 왕비의 심리, 배심원과 증인의 사회학, 공포정치의 메커니즘이 작가의 통찰력과 세심하면서도 여유 있는 묘사로 되살아났다. 독자는 1793년 8월 2일 탕플 탑에서 콩시에르주리로 이동해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배속받은 감방으로 들어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어둠 속에서 떠다니는 먼지와 소리, 냄새까지 느낄 수 있다. (375쪽)
재판에 진실이 있었다면, 그것은 항상 변하고 기복이 심한 인간 본성의 진실이었다. (중략) 샤틀레를 먼저 언급하는 것은 아마도 그가 법원 구성원들의 주요 모순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열광과 열정, 두려움, 충동과 이성, 진실성과 야망, 증오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자존심의 상처, 사람들의 망설임과 소심함, 이상적으로 그려진 흑백 세계에서 후회 없이 확신에 대한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곳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선인과 악인, 애국자와 배신자가 되었다. 혁명과 반혁명이었다. 이 모든 것의 끝에는 필연적으로 극단주의와 분노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너무 나갔다. 나중에 그[마리 앙투아네트]의 지지자와 반대자가 모두 그의 재판을 다시 그려볼 때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지지자는 그가 희생당한 상처의 흔적을 분명히 보여주고자 했다. 반면, 전혀 다른 이유로 반대자는 그를 더는 너그럽게 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가면이나 화장도 없이 일찍 늙어서 흉측하게 변한 그의 모습을 강조하면서, 그의 어두운 영혼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혁명가들의 시각에서 볼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육체적 몰락은 여성 본성의 악덕이 갑자기 드러난 것과 같았다. 다시 말해 이 재판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재판이었다. 바로 이것이 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과거의 왕비가 거의 신과 같은 존재였던 만큼, 평등의 감정이 이제는 간수들에게 단순한 권리를 넘어 일종의 복수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자신들이 누구인지 잊게 만드는 쾌락이 되었다. ‘불운한 포로’의 지지자에게 당연히 그것은 ‘불행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에마뉘엘 드 바레스키엘
1957년에 태어나 1979년 생클루 고등사범학교 인문과학부에 입학했다. 파리 소르본 대학 석사과정부터 장 튈라르Jean Tulard 교수를 사사하면서 1996년에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99년부터 프랑스 고등연구실습원의 교수가 되었으며, 프랑스 학술원 회원으로서 18세기와 19세기의 정치, 사회, 문화와 그 표현에 대한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그동안 약 20권의 책을 저술했고, 많은 찬사와 중요한 문학상을 받은 작가이기도 한 그는 탈레랑, 푸셰, 나폴레옹 같은 인물의 전기를 써서 프랑스 혁명부터 19세기 전반의 해박한 지식을 제공했다. 그는 『리슐리외 공작, 1766~1822년Le Duc de Richelieu, 1766-1822』(Perrin, 1990)으로 199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고베르 대상을 받으며 일찍부터 큰 기대를 모았고, 이 책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나날』로 2017년에 콩부르상과 브랑톰상을 동시에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목차
1막 감옥에서
2막 외국인
3막 피고인
4막 ‘죽음의 기사’
에필로그
후기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그림 설명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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