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 속에서 우리가 살아온 현대사는 곧 지금의 ‘나’를 만든 무대다. 그러나 오랫동안 한국사 연구에서 현대사는 ‘민감한 주제’로 외면받아왔다. 강준만은 이러한 경계를 넘어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고 자기 시각을 더해, 독자들에게 균형 잡힌 정보와 사유의 장을 제공한다. 그 결과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은 ‘한국인의 보물창고’로 자리 잡았다.
1945년 8월 15일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아우른 이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대중문화·스포츠 등 현대 한국인의 삶을 입체적으로 복원한다. 방대한 주석과 현장 사진, ‘역사 산책’ 코너를 통해 단순한 연대기가 아닌, 생생한 시대의 감각을 전한다.
각 권은 ‘한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부터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까지 시대를 지배한 정서를 탐구하며, 인간을 배제한 역사를 인간 중심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강준만은 이념과 세대를 넘어 화해를 모색하며, 『한국 현대사 산책』을 한국 현대사 기록문화의 새로운 전범으로 세웠다.
출판사 리뷰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5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한국인은 아직도 6·25 전쟁 시절을 살 듯이 ‘죽느냐 사느냐’식의 처절한 삶을 살고 있다. 6·25 전쟁도 끝났고 ‘보릿고개’도 끝났지만, 그 시절을 살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다. 그것은 개화기에서부터 개발독재 체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배층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모든 공적(公的) 체제 자체에 불신을 갖게끔 만든 건 물론이고 생존을 위해 사적(私的)인 연고와 정실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었던 시절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체제와 제도를 불신하고 사적인 ‘줄’과 ‘빽’을 신뢰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피곤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사적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학연보다 투자 수익성이 높고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게 있겠는가? 이런 이치를 모르면 한국의 살인적인 대학입시 전쟁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적나라한 ‘생존 투쟁’이요 ‘계급 투쟁’이다. 6·25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또다른 6·25 전쟁을 겪고 있는 것이다
6·25 전쟁이 낳은 소용돌이는 많은 지식인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6·25 전쟁은 악마의 저주로 간주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손실은 3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되었으며,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은 난민이 된, 말과 글로 다할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을 낳은 그 전쟁이 영원히 악마의 저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악마의 저주란 말인가? 그런데 6·25 전쟁이 과연 모든 사람에게 악마의 저주로 간주되어 마땅한 일이었는가 하는 의문과 관련된 것이다. 기록으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역과 사람에 따라서는 6·25 전쟁 중 특별히 전쟁의 고통이라고 할 만한 걸 겪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마을에 들어온 북한 인민군 병사들이 친절하기까지 했다는 증언들도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6‧25 전쟁에서 4‧19 혁명 전야까지』 개정증보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50~1952년, 제2권은 1953~1955년, 제3권은 1956~195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1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이승만과 정부의 갈팡질팡
이승만과 정부 수뇌부는 서울을 떠나 피난해놓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미군 장교는 500~800명이 폭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피해자 수의 문제와는 별도로,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조기 폭파를 한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무책임과 기만에서부터 이승만 정권은 무너지고 있었다. 더구나 전쟁 발발 이후 대한민국 지배층은 거대한 부정부패의 소굴임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였다. 지배층의 상당수는 전쟁 직전에 자식들을 유학이랍시고 미국으로 빼돌렸고, 이런 행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피난길에 오르던 어떤 장성은 트럭에 가재도구, 심지어는 개까지 실었으며, 지배층의 상당수가 이런 짓을 했다. 지배집단은 전쟁이 터지자 다시 해방 전으로 돌아가 자신과 자기 가족 챙기기에만 바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승만은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실속 없는 호전적 호언장담으로 메우려 들었다. 비극적인 건 그 호언장담이 밑으로 내려가면서 증폭되어 이승만을 성역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향후 전개될 지옥과 같은 아수라장의 작은 시작이었을 뿐이다. 전쟁은 너무도 더럽고 처참하고 잔인했다. 이승만은 7월 14일 맥아더에게 “한국군도 함께 지휘해주기 바란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승만은 신임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을 불러 “귀관은 이후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라”고 구두로 명령했다. 7월 20일 대전이 북한군에 함락되었고, 전주 점령에 이어, 23일 광주, 26~27일 여수를 점령하는 등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한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7월 초 미군의 한 전황 보고서는 북한군 보병은 ‘1급’이고, 장갑부대와 포격기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어떤 군대보다 뛰어나다”고 기록했다. 8월 1일,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양민 학살이 발생했다. 11사단 9연대 제3대대장 소령 한동석은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 1,000여 명을 신원초등학교로 소집시켰다. 성인 남자들은 이미 피신을 한 뒤였기 때문에 모인 주민 대부분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한동석은 지서 주임, 사찰계 형사, 신원 면장 등으로 하여금 군인, 경찰, 공무원, 지방유지 가족을 골라내게 한 뒤 남은 사람들을 박산 골짜기로 끌고 가서 기관총으로 집단학살한 후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제3대대는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시체를 휘발유로 불태우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을 뿐만 아니라 학살 지역과 외부의 왕래를 일체 차단했다. 생존 주민들에게는 학살에 대해 발설할 경우 공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제3대대는 719명을 죽인 전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은폐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석은 학살자의 숫자를 187명으로 줄여 공비와 통비분자들을 소탕했다고 연대에 보고했다. 그러나 한두 명도 아니고 허공으로 사라진 532명을 어떻게 은폐할 수 있었겠는가? 이 사건은 2월 말경 피난 수도인 부산까지 소문으로 퍼졌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사건 한 달 후인 3월 12일 11사단이 육군과 국방부에 진상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보고서는 “학살 주민의 대부분이 양민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이 밖에도 부녀자 강간, 물품 강요, 재산 약탈 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세균폭탄을 투하했는가?
1952년 2월 미국이 6·25 전쟁에서 세균폭탄을 투하했다는 주장이 소련‧중국‧북한에 의해 제기되어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2월 18일 소련의 모스크바 라디오는 미국이 천연두, 장티푸스, 나병 등의 세균을 살포했다고 비난했다. 미군이 비행기로 병균의 매개체가 되는 파리, 벼룩, 거미, 대합조개 등을 이용해 페스트, 탄저병, 콜레라, 뇌염 등을 포함한 수많은 병균을 유포시켰다는 것이었다. 2월 8일 중국군이 사로잡은 미군 2사단 38연대 소속 상병 제임스 체임버스는 페스트 예방접종을 받았고, 2월 11일 철원의 중국군 고지 위에서는 F-15 비행기가 낮게 날더니 지름 10센티미터, 길이 20센티미터 크기의 회색 원통과 노란색 종이팩 등을 떨어뜨렸는데 그 속에는 파리·벼룩·개미 등의 곤충이 있었고, 벼룩에서 페스트 양성반응이 나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미국은 그러한 결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공산권의 선전공세로 세계 여론은 점차 미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소련의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 민스크 등 각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예방접종을 받았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졌으며, 베이징의 신문들은 이상하게 생긴 벌레나 썩은 음식 등의 사진을 세균전의 증거로 게재했다. 미국은 1925년의 생물학전에 관한 제네바 협약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1950년 12월 미 합동참모본부는 1951년 말까지 생물학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완료하라고 연구 개발 부서에 지시한 바 있었다. 또 미국은 1952년 생물학전 프로그램에 5억 달러를 집행했다. 이런 사실들이 의혹을 키워 나갔다. 미국은 전범으로 판명받은 일본인 세균 전문가를 재고용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아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제2대 대통령 선거
자유당은 7월 19일 대전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범석을 공천했다. 이승만은 이 전당대회에 메시지를 보내 후보 지명을 하지 말 것과 자유당에서 당수·부당수 이름을 제거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 파동을 전후해 출마 의사가 없음을 수차례 밝혔지만,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것을 요구하는 민의를 전국적으로 일으켜야만 했을 것이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재출마를 요구하는 탄원서에 350만 명이 서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승만은 7월 24일 본의는 아니지만 민의 압력에 굴복해 양보했다는 걸 밝히면서 자신의 입후보 등록을 허락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엉뚱하게도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아직 입후보 선언도 하지 않았던 목사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는 이시영, 조봉암, 신흥우 등 3명이었다. 민국당에서 이시영으로 단일 후보를 위해 조봉암에게 입후보를 사퇴하거나 단일전선 형성에 참여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조봉암은 이를 거절하고 ‘혁신’을 부르짖었다. 8월 5일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는 이승만, 부통령에는 함태영이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총투표 703만여 표 중 523만여 표를 얻었다. 조봉암은 79만여 표로 유효 투표의 11.4%를 획득했으며, 이시영은 76만여 표, 신흥우는 약 22만 표를 얻었다. 부통령 후보들의 득표 수는 함태영 294만여 표, 이범석 181만여 표, 조병옥 57만여 표, 이갑성 50만여 표, 이윤영 45만여 표, 전진한 30만여 표, 임영신 19만여 표, 백성욱 18만여 표, 정기원 16만 여 표 등이었다. 이승만은 8월 16일 제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기사는 중국에서 장제스가 실패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에 한국인들이 장래의 한국 운명을 결정할 것이므로 남한의 내정 개혁 없이는 미국 정부가 부패하고 독재적인 이승만 정권에 아무리 원조해야 소용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남한에 무기를 줘봐야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이 중국 국민당 정부군에 공급한 무기를 가지고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공산군에 투항해 결국은 공산군이 미국 무기를 장제스와의 전쟁에 사용한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부는 그런 문제는 아는 바 없다는 듯, 음력설을 쇠는 것을 금지, 아니 탄압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운 것처럼 보였다. 이승만은 여전히 의연하게 1950년 3·1절 기념축사에서도 북진통일론을 역설했다. 이승만의 허풍엔 브레이크가 없었다. 이승만은 4월 6일 북한에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의해 국회의원을 선출해 대한민국 국회에 합류하여 통일 정권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김일성과 박헌영 등도 죄를 용서하고 포섭하겠다는 쓸데없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제1부 제1장 ‘공갈 때리기’의 비극」
나주 부대란 인민군이 공격해오자 나주경찰서 경찰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100여 명 규모의 임시부대였다. 이들은 전남 강진·해남·완도·진도 등지로 후퇴하면서 이상한 짓을 저질렀다. 나주 부대는 7월 하순께 전남 해남군 남창에서 완도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완도중학교 교사가 전화를 받자, “우리는 인민군이다. 완도로 간다”고 밝혔다. 이에 완도에서는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시가지 환영대회까지 준비했다. 나주 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그 환영대회에 참석한 후 그 자리에서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사살했다. 이 같은 ‘함정 학살’은 해남과 완도 지역의 여러 곳에서 계속 이루어졌다. 이들의 위장술은 탁월했다. 인민군 복장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을로 들어설 땐 오랏줄로 묶은 우익 인사들을 앞장세우고 왔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들을 인민군으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주 부대의 일부는 마을을 돌며 좌익 색출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제1부 제6장 학살: 뿌리 뽑고 씨 말리기」
한반도 땅덩어리가 좁은 탓이었겠지만, 6·25 전쟁은 전형적인 ‘톱질 전쟁’이었다. 톱질을 하듯이 왔다갔다하면서 점령과 후퇴를 반복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비극적이었다. 전선이 왔다갔다하면서 죽어나는 건 민간인들이었다. 누구를 지지하는가? 이들에게는 이런 고문이 강요되었고, 그 와중에서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했다. 게다가 톱질 전쟁은 전선이 따로 없는 전 국토의 전선화(戰線化)를 초래했기 때문에 빨치산 투쟁을 낳았고, 이는 민중들 사이에 원한관계를 만들며 그 원한이 민간인들 상호간에 학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51년 1월 1일 중국군 6개 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1950년 12월 24일 서울 시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지만, ‘빽’과 줄이 있는 사람들은 얻어들은 게 있어 이미 12월 초부터 피난길에 나섰다. 12월 말 80만 명이 넘는 서울 시민이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제2부 제1장 1‧4 후퇴: 서울에서 부산까지」
작가 소개
지은이 :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그동안 쓴 책으로는 『법조공화국』, 『MBC의 흑역사』, 『공감의 비극』, 『정치 무당 김어준』, 『퇴마 정치』, 『정치적 올바름』,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8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등 300권이 넘는다.
목차
머리말 :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포감과 순응주의의 내면화 · 5 ‘6·25 심성’의 지배를 받는 사회 · 7 195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 8 1950년대의 두 얼굴 · 10 진정한 화해를 위하여 · 12 ‘증오·혐오의 대량생산 체제’를 넘어서 · 14
제1부 1950년: 골육상쟁의 근본주의
제1장 ‘공갈 때리기’의 비극
이승만 정권의 미신이 된 북진통일론 · 31 북한의 음흉하고도 실질적인 남침 준비· 33 6·25 이전의 학살극 · 34 브레이크가 없는 이승만의 허풍 · 36 농민에게 농지를 돌려준 농지개혁 · 38 ‘공갈 정책’의 비극적 말로 · 40 반공의 ‘정치 상품화’, 매카시즘 · 42
역사 산책 1 “음력설을 쇠는 악덕배들의 광태” · 45
제2장 이승만의 참패로 끝난 총선거
미국의 ‘선거 연기’ 반대 · 47 중간파의 승리로 끝난 총선 · 49 중간파에 가해진 탄압 · 51 ‘내가 승리한 것이요’ · 53 민중은 민국당도 거부했다 · 54 이승만과 김일성의 ‘책임 윤리’의 부재 · 56
제3장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
‘남침 유도설’을 낳을 정도의 무방비 · 58 오판과 오보의 연속 · 59 “미국인 2,500명을 우리가 다 죽이겠소” · 62 이승만의 거짓 녹음 방송 · 64
제4장 이승만과 정부의 갈팡질팡
서두른 한강 다리 폭파 · 67 인민군의 서울 점령 후 3일간의 수수께끼 · 70 그들이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었다 · 72 도망 다니기에 바빴던 이승만 · 74 스미스 부대의 참패 · 76 한국군의 작전지휘권 이양 · 78 낙동강 방어선 구축, 다부동 전투의 승리 · 80
역사 산책 2 채병덕과 신성모 · 83
제5장 서울에서 벌어진 ‘서바이벌 게임’
처단인가, 포섭인가? · 86 선전전에 동원된 남한 정치인들 · 87 이병철과 박헌영과 시보레 자동차 · 89 인민재판과 기회주의 · 91 서울 시민들의 일상적 삶 · 93 아귀다툼을 낳은 굶주림 · 96
제6장 학살: 뿌리 뽑고 씨 말리기
골육상쟁의 근본주의 · 98 20만 명을 죽인 국민보도연맹 학살 · 100 ‘혈서 충성 맹세’로 살아남기 · 102 ‘나주 부대’의 ‘함정 학살’ · 104 임철우의 ‘곡두 운동회’ · 105
제7장 노근리: “모든 피난민을 향해 사격하라”
미군의 3박 4일 인간 사냥 · 107 피난민은 작전에 귀찮은 존재 · 109 미군의 인종차별주의 · 111 44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 · 114
제8장 두 얼굴: 학도병과 상류층
‘돼지몰이’로 불린 상류층의 일본 밀항 · 117 쌍권총으로 무장한 김두한의 활약 · 118 학도의용군의 참전 · 120 남한 소년병들끼리의 전투 · 123
제9장 적반하장: 도강파와 잔류파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 125 “내가 국민 앞에 왜 사과를 해” · 128 엉망진창 부역자 재판 · 130 서울에 잔류했던 사학자 김성칠의 증언 · 132 ‘빨갱이년’으로 몰린 박완서의 증언 · 134
역사 산책 3 얼굴 없는 ‘켈로부대’ · 136
역사 산책 4 제주 4·3 사건과 ‘귀신 잡는 해병’ · 139
역사 산책 5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 142
역사 산책 6 ‘시민증이 없으면 죽은 목숨’ · 145
제10장 악순환: 피를 보면 피에 굶주린다
‘한 많은 미아리 고개’ · 147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 · 149 오두리 마을의 비극 · 151 병균의 논리로 정당화한 학살 · 152
제11장 “평양 점령은 수치였다”
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 · 154 트루먼과 맥아더의 회담 · 157 이승만과 미군의 갈등 · 158 ‘반성의 시기에 날뛰는 한국인들’ · 160 약탈에서부터 무너진 전선 · 162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 164
제12장 신천 학살, 중국 참전, 미국 원자탄
남북 합작의 ‘인간지옥’ · 167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손님들’ · 169 ‘‘전 한반도는 끔찍한 잿더미’ · 171 미국의 도취, 중국의 참전 · 172 중국군의 ‘인해전술’ 또는 ‘유격전술’ · 175 트루먼의 ‘원자탄 사용 검토’ · 177
역사 산책 7 소련과 일본의 비밀 참전 · 178
제13장 함평과 흥남: 두 개의 다른 지옥도
함평 주민 524명 학살 · 181 견벽청야는 제11사단 작전명령 · 184 흥남 철수 작전 · 185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의 저주 · 187
제14장 “전쟁의 최초 희생자는 진실이다”
신문들의 활동과 ‘PRESS 완장 특권’ · 190 종군기자들의 어려움 · 192 TV 없는 라디오 방송기자의 활동 · 194 만화·문학·영화의 참전 · 195
제2부 1951년: ‘톱질 전쟁’의 와중에서
제1장 1·4 후퇴: 서울에서 부산까지
‘무인지경’으로 변한 서울 · 201 유엔군의 견벽청야 · 203 피난민으로 뒤덮인 부산 · 204 강원용의 지옥 체험과 증언 · 206 리영희의 지옥 체험과 증언 · 208
제2장 맥아더와 리지웨이: 원자폭탄과 몰살 작전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부임 · 210 맥아더가 계산해놓은 원자탄 26개 · 212 리지웨이의 ‘몰살 작전’ · 213 공산군의 ‘도덕적 승리’? · 215 추위와 굶주림으로 무너진 중국군 · 216
제3장 국민방위군: 9만 명을 죽인 ‘해골의 행렬’
“동사·아사·병사를 방치한 천인공노할 사건” · 218 육군 통역 장교 리영희의 증언 · 220 김윤근·신성모·이승만의 적반하장 · 222 국민방위군 고위층의 거대한 예산 착복 · 223 규명되지 않은 정치자금 조성 의혹 · 225 “국군 병사는 죽을 때 ‘빽’ 하고 죽는다” · 228
제4장 거창: 무엇을 지키기 위한 전쟁인가?
‘거창 양민 학살: 그 잊혀진 피울음’ · 231 신성모의 사건 은폐 지시 · 233 조병옥과 이시영의 고언 · 236 이승만의 특정인 총애 · 238
역사 산책 8 이승만의 김종원·김창룡 총애 · 241
역사 산책 9 거창, 그 이후 · 243
제5장 해리 트루먼의 더글러스 맥아더 해임
‘공동묘지’로 변한 서울 · 246 트루먼에게 도전한 맥아더 · 249 원자탄 사용을 원했던 이승만 · 251 지리멸렬 상태에 빠진 한국군 집중 훈련 · 252 더글러스 맥아더는 ‘영웅’인가? · 254 한국에선 영웅이었던 맥아더 · 256
역사 산책 10 6·25로 인한 전 국토의 묘지화 · 259
제6장 휴전회담: 개성에서 판문점까지
소련의 휴전 제의 · 261 7월 10일에 시작된 정전협상 · 263 ‘기 싸움’과 ‘눈 싸움’ · 265 한국을 배제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 267 정전회담장의 ‘슬픈 에피소드’ · 270
제7장 지리산에서 ‘쥐잡기 작전’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 273 빨치산 투쟁의 행태 · 276 고은의 빨치산 시 · 278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최후 · 279
제8장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
이승만, “이젠 정당이 필요하다” · 282 이범석은 누구인가? · 283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 · 284 “이승만이 국민의 지지는 받았다”? · 287
제9장 전쟁 중의 뜨거운 교육열
‘애국복권’ 열풍과 도박 성행 · 289 ‘삼팔따라지’의 교육열 · 290 6·25 전쟁 중의 교육 · 291 대학은 징집 회피의 수단 · 293 이승만 왕조 시대의 관존민비 · 295
제3부 1952년: ‘군사 전쟁’과 ‘정치 전쟁’
제1장 미국은 세균폭탄을 투하했는가?
북한과 중국의 세균전 항의 · 299 스스로 의혹을 키운 미국 · 301 이승만, “휴전은 소련의 흉계” · 303
제2장 부산: 경계가 없는 전쟁과 정치
‘쓰레기통’과 ‘장미꽃’ · 306 자유당의 승리로 끝난 지방선거 · 308 조작된 ‘무장공비 사건’과 계엄령 선포 · 310 부통령 김성수의 ‘사임 이유서’ · 312 미국의 이승만 제거 계획 · 314 미국이 개입한 발췌개헌안 타협 · 315
역사 산책 11 이승만의 이종찬에 대한 분노 · 319
역사 산책 12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의 진상 · 321
제3장 거제도: 6·25 전쟁의 축소판
17만 6,000여 명의 포로 · 324 포로수용소는 제3전선 · 326 ‘자동송환’ 대 ‘자유송환’ 공방전 · 327 수용소 사령관 납치 사건 · 329 미군의 수풍댐 폭격 · 332 평양 폭격과 백마고지 전투 · 333
제4장 대통령 선거: 이승만과 아이젠하워
중석불 사건 · 335 77세 대통령, 81세 부통령 후보 · 337 이승만 74.6%, 조봉암 11.4% · 338 미국의 대통령 선거 · 340 아이젠하워의 한국 방문 · 342 “백만학도에게 북진 명령을!” · 345
역사 산책 13 ‘청계천 화장실’과 ‘아이젠하워 양변기’ · 347
제5장 조선방직·삼성물산·기아산업
부산 조선방직 노동쟁의 사건 · 350 자유당의 하부 단체로 편입된 대한노총 · 352 1년 만에 17배로 커진 삼성물산 · 354 ‘삼천리호’ 자전거의 탄생 · 356
제6장 전쟁 속의 언론과 대중문화
피난지 부산에서 신문의 활동 · 358 ‘나는 너를 싫어한다’ 사건 · 360 라디오 방송과 전쟁 공보 영화 · 362 <아내의 노래>와 <전선야곡> · 364 국군 장병 위문 · 366 상이군인의 분노와 비극 · 368 전쟁 중에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온다 · 370
주 · 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