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5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한국인은 아직도 6·25 전쟁 시절을 살 듯이 ‘죽느냐 사느냐’식의 처절한 삶을 살고 있다. 6·25 전쟁도 끝났고 ‘보릿고개’도 끝났지만, 그 시절을 살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다. 그것은 개화기에서부터 개발독재 체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배층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모든 공적(公的) 체제 자체에 불신을 갖게끔 만든 건 물론이고 생존을 위해 사적(私的)인 연고와 정실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었던 시절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체제와 제도를 불신하고 사적인 ‘줄’과 ‘빽’을 신뢰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피곤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사적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학연보다 투자 수익성이 높고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게 있겠는가? 이런 이치를 모르면 한국의 살인적인 대학입시 전쟁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적나라한 ‘생존 투쟁’이요 ‘계급 투쟁’이다. 6·25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또다른 6·25 전쟁을 겪고 있는 것이다
6·25 전쟁이 낳은 소용돌이는 많은 지식인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6·25 전쟁은 악마의 저주로 간주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손실은 3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되었으며,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은 난민이 된, 말과 글로 다할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을 낳은 그 전쟁이 영원히 악마의 저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악마의 저주란 말인가? 그런데 6·25 전쟁이 과연 모든 사람에게 악마의 저주로 간주되어 마땅한 일이었는가 하는 의문과 관련된 것이다. 기록으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역과 사람에 따라서는 6·25 전쟁 중 특별히 전쟁의 고통이라고 할 만한 걸 겪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마을에 들어온 북한 인민군 병사들이 친절하기까지 했다는 증언들도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6‧25 전쟁에서 4‧19 혁명 전야까지』 개정증보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50~1952년, 제2권은 1953~1955년, 제3권은 1956~195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1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승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대통령이었다. 그는 제헌국회도 식순에도 없는 기도로 시작했고, 대통령 취임식도 기독교 방식으로 했다.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했으며, 해마다 성탄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는 1953년 11월에는 성탄 선물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많이 만들어내자는 담화를 발표했다. 1955년 12월에는 국회에서 성대한 성탄 파티가 열리기도 했다. 그밖에도 기독교계를 기쁘게 만든 크고 작은 일이 아주 많았다. 이승만이 정치를 잘해서 모든 국민에게서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다면 개신교계의 전폭적인 이승만 지지는 바람직하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게 그렇질 못했다. 이승만 정권에 많은 문제가 있었던 만큼 그 정권을 뜨겁게 껴안은 개신교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개신교계는 무엇보다 양적 팽창에만 너무 몰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권력과의 유착’과 ‘양적 팽창’은 같은 발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계속 그래왔듯이, 여전히 ‘기독교인 대통령 아래 전 국민의 기독교인화’라는 꿈의 실현을 위해 뛰고 있었다. 1956년 5월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선거 때마다 그래왔듯이 개신교계는 이번에도 발 벗고 나섰다. 교회 지도자들은 정·부통령 선거 추진 기독교 중앙위원회를 결성해 대통령에 장로 이승만을, 부통령에 권사 이기붕을 추대했다. 이기붕을 제2의 이승만으로 모시면서 찬양하는 어용 지식인들을 지칭하는 ‘만송족’의 활약은 1950년대 말에 맹위를 떨치지만, 이 선거에서 ‘이기붕 부통령 만들기’ 운동에 앞장선 만송족이 있었다. 만송족의 주요 매체는 여당지인 『서울신문』이었는데, 4월 23일자에 「이승만 대통령이 이기붕 부통령이 하나의 상식이라」, 5월 15일자에 「빠짐없이 투표하자, 대통령에는 이승만 박사 부통령에는 이기붕 의장」이라는 글과 사설을 실었다.
세상을 조롱한 가짜 이강석 사건
이승만은 83세 생일에 맞춰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는 이승만의 후계자로 이기붕이 낙점되었다는 기존의 추측을 사실로 굳히는 효과를 낳았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승만이 이강석을 양자로 입양한 것에 대한 국내외 여론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기붕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은 둘째치고 그의 건강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기붕의 서대문 집은 더욱 확실하게 ‘서대문 경무대’로 불렸으며, 이기붕을 제2의 이승만으로 모시는 어용 지식인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이승만이 이강석을 양자로 입적시킨 것은 이승만의 정치 행태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승만은 오랜 미국 생활로 겉은 서구화되었지만 속은 구한말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 또 이승만의 혈통에 대한 집착은 이승만과 이기붕의 조상은 양녕대군이며, 자식이 없는 이승만이 이강석을 양자로 맞아 왕조의 재현을 도모한다는 견해까지 낳게 했다.
한국의 제1인자를 양아버지, 제2인자를 친아버지로 둔 이강석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래서 ‘가짜 이강석’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을까? 1957년 8월 21일 태풍 아그네스가 경북 동해안 일대를 강타해 그곳이 쑥대밭이 되었다. 이 지역에 강성병이 나타나 이강석 행세를 하면서 이 지역의 각급 기관장들을 농락하고 다녔다. 기관장들은 그에게 돈을 주고 아첨을 일삼는 추태를 벌였다. 가짜 이강석은 영천과 경주에서, 안동과 봉화에서 경찰서장·시장·군수·읍장·은행 지점장 등에게 은연중 금품을 요구해 46만 5,000환을 사취했다. 각지 경찰서장 등과 36사단장은 경호원을 동승시켜 관용 또는 군용 지프로 목적지까지 가게 했다. 몇몇 경찰서장은 고급 요정이나 관사에서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당시 공석 중인 치안국 통신과장 승진 운동을 한 사람도 있었고, 가짜 이강석과 같이 기념사진을 찍거나 그의 숙소 앞에 불침번을 서게 한 사람도 있었다. 결국 가짜 이강석은 법정에서 10개월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법정에서 한 그는 “자유당 정권의 부패상을 시험해보는 것도 동기의 하나였다”는 말을 해 청중들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국가보안법과 내각제 개헌 파동
1958년 11월 18일, 자유당은 간첩 색출을 명분으로 하는 전문 3장 40조 부칙 2조로 구성된 신국가보안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민주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들은 “간첩 개념의 확대 규정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 활동을 제약하고 탄압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다”고 지적한 후 “변호사의 접견 금지와 3심제의 폐지는 명백한 헌법 위반”이라고 반대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이 법안의 “언론관계 조항이 언론의 자유와 인권 보장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명백한 반대를 표시했다. 대한변호사협회도 국회 법사위에 “이 법안의 적용 범위가 모호하며,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법 조항이 있고, 심의절차를 신중히 해야 함에도 소송절차를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신국가보안법은 12월 19일 법사위에서 자유당 법사위원 10명만 참석한 채 날치기 통과되었다. 각 정당과 사회단체, 재야인사들은 12월 23일 국가보안법 반대 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날치기 규탄대회와 가두시위 등을 전개했다. 자유당은 23일 밤 전국의 무술 경찰관 300명을 무술 경위로 특채하는 식으로 급조해 24일 새벽 국회의사당으로 쳐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들은 농성 중이던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 5시간 동안 지하실에 감금했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해 12명의 의원이 부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오전 10시를 기해 무술 경찰관들이 사회를 맡은 부의장 한희석을 에워싸고 본회의장에 들어왔다.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개회된 본회의는 순식간에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12월 24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이를 ‘2·4 국가보안법 파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식을 팔아 영달을 꿈꾸는 지식인들이여”
1960년 3·15 선거를 앞두고 민간 영역에서 맹활약을 한 건 대한반공청년단·반공예술인단·대한노총만은 아니었다. 2월 9일 자유당은 학계를 총망라해 137명의 정책자문위원과 과학기술특별의원을 선정하여 자유당 선거대책에 강제동원시켰다. 그러나 모두가 다 강제동원된 것만은 아니었다. 김동리는 『서울신문』 2월 10일자와 11일자에, 박종화는 3월 5일자와 6일자에 이기붕을 예찬한 글을 썼다. 김광섭은 3월 2일자와 3일자에 「정·부통령은 동일 정당에서 나와야 한다」는 글을 썼다. 조병옥이 죽었으니 대통령 후보가 있는 당의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경희대학교 총장 조영식은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3회에 걸쳐 이기붕을 예찬하는 글을 썼다.
1959년 7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가 이끄는 대한부인회 전국대회는 자유당의 정·부통령 후보를 전면 지지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나중에 대한부인회 최고위원 임영신이 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임영신과 박마리아 사이에 벌어진 ‘충성 경쟁’도 가관이었다. 임영신은 부통령에 출마하면서 2월 13일에 발표한 ‘충실한 보필자는 누구냐’는 제목의 성명에서 이승만을 ‘세기의 영걸’로 극찬했다. 2월 17일 박마리아는 대한부인회와 대한여자청년단의 이름으로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기붕 선생을, 임영신의 출마는 반동 행위이다”는 성명을 신문지상에 발표했다. 장준하는 『사상계』 1960년 4월호 ‘권두언’에서 ‘공명과 영달에만 현혹된’ 집권당의 횡포를 규탄하는 동시에 종교계·문화예술계·학계의 ‘추태’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는 “지조 없는 예술가들이여 너의 연기를 불사르라. 지식을 팔아 영달을 꿈꾸는 학자들이여 진리의 곡성은 너희들에게 반역자란 낙인을 찍으리라”고 비판했다.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둔 바로 그날 신익희가 죽을 줄 누가 알았으랴. 신익희는 5월 5일 새벽 5시경,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선 열차를 타고 전북 이리(현재 익산)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했다. 수행원들이 인공호흡을 시도하며 기차 내에 의사를 찾았지만 의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신익희가 졸도한 후 45분 만에 열차는 이리역에 도착했다. 장면의 경호책임자인 시라소니 일행은 신익희를 업고 역에서 가까운 호남병원으로 달렸지만 신익희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신익희의 운구가 그날 오후 4시 서울역에 도착하자 운집한 군중들이 그의 유해를 경무대 쪽으로 끌고 가려 하여 경찰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의 발포로 10여 명의 사상자가 났고 700여 명이 피검되었다. 신익희의 죽음 이후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의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제1부 제3장 신익희와 민주당: ‘비 내리는 호남선’」
이어령은 1956년 5월 6일자 『한국일보』에 쓴 「우상의 파괴」에서 문단의 중진들을 비판한 뒤 자신을 다음과 같이 ‘천재적인 악동’으로 묘사했다. “내가 이 순간 우상들의 분노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거룩한 우상들에 의하여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모진 형벌을 받을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소학교 시절부터 수신(修身) 점수에 59점의 낙제점을 받은 천재적인 악동이며 겸양의 동양 미덕을 모르는 배덕아다. 그러니 그만한 정도의 것은 이미 각오한 지 오래다.” 이어령 자신은 훗날 「우상의 파괴」를 비롯한 일련의 글들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던가? “그 글들은 결함에 가득 찬 글들이지만 그 글이 갖는 시대적 의미는 양보할 수 없다. 그때 기성문단을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때 나 자신이 길들여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커다란 슬픔의 힘으로 그 자살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제1부 제9장 22세 논객 이어령의 ‘우상의 파괴’」
5월 25일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가 장충단공원에서 개최한 시국 강연회엔 20만여 명의 시민이 몰려들었다. 첫 연사인 전진한의 연설이 끝나고 조병옥의 연설이 시작된 지 불과 5분도 안 되어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나 폭력으로 강연을 방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괴한들은 마이크 앰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고 기물을 파괴했으며, 연단 위로 돌과 유리병, 의자 등을 던졌다. 그리고 이 광경을 촬영하던 사진기자들에게도 돌이 날아들었다. 현장에 배치된 경찰관은 그런 폭력 사태를 뒷짐지고 구경만 하다가 폭도들이 사라진 후에야 진압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앰프의 불을 끄던 홍익대 학생 이영수를 비롯한 몇 명의 청년을 연행해갔다. 소란이 조금 진정된 후 장택상은 “여러분이 보신 이러한 사실이 바로 독재국가의 형태”라고 말했고, 조병옥은 “민주주의를 저버리는 날 이 나라는 세계에서 고립되고 말 것”이라고 외쳤다. 「제2부 제1장 국민반, 장충단공원 폭력 사태, 선거법 개정 논란」
작가 소개
지은이 :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그동안 쓴 책으로는 『법조공화국』, 『MBC의 흑역사』, 『공감의 비극』, 『정치 무당 김어준』, 『퇴마 정치』, 『정치적 올바름』,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8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등 300권이 넘는다.
목차
제1부 1956년: ‘동원 대중’과 ‘피해 대중’
제1장 김창룡을 알면 이승만과 1950년대가 보인다
최초의 국군장으로 치러진 김창룡의 장례 · 19 김창룡의 ‘반공 노이로제’ · 21 이승만은 이론, 김창룡은 실천 · 23 김창룡의 정치공작 · 25 함경도파·평안도파·이남파의 군내 파벌 싸움 · 28 정일권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가? · 30 “파벌주의와 부패는 쌍둥이” · 31
제2장 이승만과 자유당: ‘우의마의 정치’
“국민이 원하면 자살도 할 수 있다” · 33 대한노총: 우의마의 돌격대 · 35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는 관제 시위 홍수 · 36 혈서 전문가들의 출현 · 38 이승만은 ‘민족의 태양’ · 39
제3장 신익희와 민주당: ‘비 내리는 호남선’
“못살겠다 갈아보자” vs “갈아봤자 소용없다” · 41 30만 인파가 몰린 한강 백사장 연설 · 43 호남선 열차에서 뇌일혈로 사망한 신익희 · 45 이승만 52%, 조봉암 23.8%, 신익희 추모표 20.5% · 48 “이승만은 하늘에서 낸 사람” · 49
제4장 조봉암과 진보당: ‘피해 대중’을 위하여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 출범 · 51 조봉암의 ‘피해 대중론’ · 53 조봉암의 ‘평화통일론’ · 55 이승만을 지지한 민주당 · 58 216만 표에 기반한 진보당 창당 · 59 왜 진보세력은 분열했을까? · 60
제5장 자유당의 ‘민주당 죽이기’
야당 후보자들의 등록 방해 공작 · 63 헌정 사상 초유의 국회의원 시위 · 64 여촌야도 현상 · 66 신·구파 갈등과 장면 저격 사건 · 68 이기붕·이익흥·김종원이 배후 · 70
제6장 미국의 잉여농산물과 여촌야도
미국산 잉여농산물과 짜장면의 대중화 · 72 대책 없는 이농 현상 · 73 밀가루·설탕·면화, 삼백산업의 횡포 · 75 농촌을 희생으로 한 자본주의 발전 · 77 여촌야도의 수수께끼 · 79
제7장 북한: ‘주체 이론’과 ‘8월 종파사건’
김일성의 좌수우수론 · 82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 83 개인숭배 논란과 ‘8월 종파사건’ · 86 김일성의 위기 탈출 · 88 천리마 운동 추진 · 90
역사 산책 1 북한의 도식주의 논쟁 · 92
제8장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권력과의 유착’과 ‘양적 팽창’ · 95 “예수도 돈 있어야 믿겠습니다” · 97 함석헌은 왜 기독교를 비판했는가? · 98 대통령 장로 이승만, 부통령 권사 이기붕 · 99 개신교와 천주교의 ‘행복한 전쟁’ · 101
제9장 22세 논객 이어령의 ‘우상의 파괴’
‘문단의 무서운 테러리스트’ · 103 『한국일보』의 ‘상업적 진보성’ · 104 호흡의 문제와 세대의 문제 · 107 세대·속도에 쫓기는 이승만의 ‘우상 정치’ · 109
제10장 『동아일보』·HLKZ-TV·AFKN-TV
한국엔 언론자유가 없다? · 111 신문 배포 방해와 독자 협박 · 113 반공 기념일과 이승만 생일 경축 행사 · 115 HLKZ-TV의 개국 · 118 창업자 황태영의 집념 · 120 경영난으로 무너진 HLKZ-TV · 122 AFKN-TV와 DBC-TV · 123
제11장 김시스터스·<자유부인>·수세식 화장실
‘미8군 쇼’는 ‘한국 대중문화의 모태’ · 126 영화 <자유부인>과 ‘고무신 관객’ · 129 ‘영화 암표상’이라는 신종 직업의 등장 · 131 유료 화장실과 아파트 수세식 화장실의 등장 · 132
제2부 1957년: ‘장길산’과 ‘홍길동’을 기다린 세상
제1장 국민반, 장충단공원 폭력 사태, 선거법 개정 논란
총선에 대비한 국민반 조직 · 139 장충단공원 폭력 사태 · 141 조병옥·이기붕 밀약설 · 143
제2장 세상을 조롱한 가짜 이강석 사건
이승만의 양자가 된 이강석 · 146 이승만의 혈통에 대한 집착 · 147 제3인자로 통한 ‘귀하신 몸’의 출현 · 148 장길산과 홍길동의 출현을 기다리다 · 151 ‘고바우 영감’ 필화 사건 · 152
제3장 북진통일·병역 기피·맥아더·유엔군 사령부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 155 군대 내 폭력과 병역 기피 부정 · 156 ‘구국의 은인’ 맥아더 동상의 제막 · 159 유엔군 사령부의 서울 이전 · 162
제4장 1957년은 ‘소년소녀 사냥의 해’?
“얌생이 몬다”는 말이 생겨난 이유 · 163 미군과 합작한 “양주 열차 강도 사건” · 164 주한미군 범죄의 급증 · 166 한국인들에 대한 린치 사건 · 168
제5장 “그래도 남한은 이렇게 자유스럽지 않아요?”
결식아동 70만 명과 부정부패 · 170 식모와 ‘에레나가 된 순희’ · 172 오상원의 ‘황선지대’의 비극 · 173 이범선의 「오발탄」의 비극 · 175 자유당의 ‘자유’는 무엇인가? · 176 선우휘의 「불꽃」 · 178
역사 산책 2 “이밥(쌀밥)에 고깃국”의 꿈 · 180
제6장 관훈클럽·언론 부패·만화잡지·앰프촌
관훈클럽과 ‘신문의 날’ 탄생 · 183 말세를 향해 달리는 부패 잔치 · 184 ‘낙양의 지가’를 올린 『사상계』 · 185 류근일 필화 사건 · 187 『만화세계』와 만화잡지의 인기 · 187 라디오 수신을 위한 앰프촌 조성 · 188 땐스홀과 카바레의 차이가 무엇인가? · 190 ‘기타부기’와 ‘미스코리아’ · 191
제3부 1958년: ‘생각하는 백성’과 ‘인의 장막’
제1장 ‘인의 장막’에 갇힌 이승만
83세인 이승만은 1875년생 · 197 이승만의 자기중심주의 · 199 부인 프란체스카의 영향력 · 202 ‘인의 장막’은 야당의 정치선전? · 205 어린아이 같은 이승만 · 208
역사 산책 3 “이승만은 법 관념이 결여된 사람” · 212
제2장 이승만의 ‘세계 4대 강국론’
국군 병력은 세계 4위 · 215 ‘반공 독재’는 형용 모순 · 217 한국은 ‘일본 경제 부흥을 위한 뒷마당’ · 218 이승만의 슬픈 허세 · 220
제3장 ‘진보당 죽이기’와 제4대 총선거
미국의 매카시는 죽었건만 · 221 진보당 등록 취소 사건 · 223 제4대 민의원 총선거 · 226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 228
역사 산책 4 이기붕과 이정재 · 231
제4장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와 함석헌 필화 사건 · 233 언론의 적극적인 지원 사격 · 234 『사상계』와 장준하의 친미·반공 · 236 이승만의 ‘병든 민족주의’ 비판 · 238
제5장 국가보안법과 내각제 개헌 파동
자유당의 국가보안법 개악 정략 · 240 야당 의원 감금 후 날치기 통과 · 242 이기붕과 조병옥의 밀담 · 244 이승만을 반대하면 공산주의자인가? · 246
역사 산책 5 1958년 ‘개띠 해’는 산부인과 전성시대 · 248
제4부 1959년: 파국을 향한 질주
제1장 대한반공청년단·반공예술인단·대한노총
전국 89개 단부를 거느린 최대 관변단체 · 253 “민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 · 256 임화수의 반공예술인단 · 257 임화수를 위한 변명 · 259 임화수도 못 건드린 문단 파워 · 261 대한노총도 이승만의 친위부대 · 262
제2장 재일교포 북송 반대 시위
북한은 노동력, 일본은 골칫거리 해결 · 265 21일간 4,312회 736만 명 참가 · 267 이승만 정권의 무능력·무책임성 · 271 이승만의 “권력 강화용 동원정책” · 273
제3장 조봉암 사형: 216만 표는 어디로 갔는가?
조봉암 사형 집행 · 275 23.8%, 216만 3,808표의 행방 · 278 양명산은 ‘이승만 정권의 공작원’ · 280 미국은 왜 침묵했는가? · 282 민주당과 언론도 공유한 ‘반공 히스테리’ · 283
제4장 『경향신문』 폐간 사건
자유당 정권과 『경향신문』의 갈등 · 285 정략적 보복에 눈이 먼 자유당 · 287 신문의 정론성과 상업성 · 289 광고 수입 의존도 30%의 의미 · 290
제5장 재벌의 형성: 정경유착의 게임
귀속업체 불하 특혜 · 292 원조 경제와 수입 대체 특혜 · 294 은행 민영화 특혜 · 296 1950년대 한국 경제 다시 보기 · 298 「콜론 보고서」의 예견 · 301
역사 산책 6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 302
역사 산책 7 드럼통 자동차와 피마자 기름 · 305
제6장 김동리·이어령 논쟁: 실존주의와 서구적 교양주의
문단의 실존주의 열풍 · 308 서구 지식 이용의 검증 경쟁 · 310 ‘서구적 교양주의의 탄생’ · 311 카뮈는 ‘우리들의 정신적 동지’ · 313
제7장 라디오, 아나운서, 멜로영화 전성시대
최초의 국산 라디오 생산 · 316 라디오의 국산화·대중화 · 318 ‘오빠 부대’를 거느린 아나운서의 인기 · 319 멜로영화의 전성시대 · 321 교외 지도교사와 풍기 문란 단속 · 323 베스트셀러와 책의 월부 판매 · 325
제8장 조병옥 사망: 청천벽력·망연자실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이전투구 · 328 대통령 후보 조병옥, 부통령 후보 장면 · 330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난 조병옥의 사망 · 331 민주당의 ‘한심한 작태’ · 334
제9장 “지식을 팔아 영달을 꿈꾸는 지식인들이여”
이승만·이기붕 출마 환영 예술인 대회 · 336 이기붕을 따르는 ‘만송족’ 동원 · 337 이승만 신격화 ‘충성 경쟁’ · 340 장준하의 지식인 비판 · 342
제10장 3·15 선거에서 4·19 전야까지
자유당의 화려한 상상력 · 344 2·28 대구 학생 시위 · 347 자유당의 유세 방해 공작 · 350 자유당의 ‘9할 5분 득표 전략’ · 352 3·15 마산 시위 · 353 자유당의 선거 장난질 · 355 김주열의 시체 발견 · 357 4·19 혁명의 진실 · 360
역사 산책 8 개신교와 천주교의 싸움 · 362
맺는말 ‘소용돌이 문화’의 명암
‘분단의 역설’ 또는 ‘전쟁의 역설’ · 365 한국의 ‘소용돌이 문화’ · 367 ‘소용돌이 문화’의 양면성 · 369 과연 이데올로기가 문제였는가? · 371 골육상쟁의 근본주의 · 373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 375 대중의 ‘과잉 순응’ 전략 · 376 이승만의 최대 업적 · 378 학벌주의와 숭미주의 · 380 “점증하는 좌절의 혁명” · 382 여촌야도의 정치학 · 383 “공적 소극성, 사적 적극성” · 385 이제는 골로 가지 말자 · 386
주 · 389